문학평론

 

‘뉴노멀’ 시대의 소설

김세희와 김봉곤의 작품을 중심으로

 

 

한영인 韓永仁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지만: 임현론」 「세계의 불안을 견디는 두가지 방식」 등이 있음. jwhyi@naver.com

 

* 이 글은 김세희 소설집 『가만한 나날』(민음사 2019)과 김봉곤의 소설집 『여름, 스피드』(문학동네 2018)와 단편 「그런 생활」(『문학과사회』 2019년 여름호)을 다룬다. 이후 인용 시 작품명과 면수만 표기한다.

 

 

1. ‘소확행’: ‘뉴노멀’ 시대의 테크놀로지?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소유냐 존재냐』(한국어판 까치 1996)에서 근대 산업사회가 내걸었던 ‘위대한 약속’의 핵심으로 “만인에게 해당되는 부르주아적 삶이라는 이상(理想)”을 꼽은 바 있다. “무제한의 생산, 절대적 자유, 무한한 행복이라는 삼위일체”는 근대 산업사회가 고안해낸 새로운 정치적 복음의 핵심 교리였으니 이는 누구든지 자본의 번영을 믿는 자로 하여금 지상에서 미증유의 행복을 누리게 해주리라는 달콤한 언약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 약속을 곧이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보편적 부르주아라는 이상”(12면)은 계층적 양극 분해 속에서 용해되어버렸으며 우리의 삶은 만성화된 불황과 경제위기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형국이다.

‘뉴노멀’은 이와 같이 일상화된 경제적 위기 상황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주로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선진국이 직면한 침체 상태를 지칭하는” ‘뉴노멀’은 단순히 거시경제적 성과의 부진을 말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발전모델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되는 구조적 위기 요인을 의미한다.1) 그런데 흥미로운 건 저성장과 불평등으로 대변되는 한국의 ‘뉴노멀’이 고도성장의 혜택을 누려보지 못한 청년 세대들에게 커다란 좌절과 불만을 안겨주는 동시에 작지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삶의 여러 중요한 변화들을 초래하는 동인으로도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의 경우 현재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축적이 미래의 개인적 번영을 낳으리라는 믿음이 흔들리면서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현재를 감각하는 일의 중요성에 눈을 떠가는 모양새다.

관련해 ‘소확행’은 ‘뉴노멀’ 시대에 변화한 사회의 일면을 드러내는 유행어라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의미하는 ‘소확행(小確幸)’은 무라까미 하루끼의 수필집 『랑겔한스섬의 오후』(한국어판 백암 1994)에서 처음 사용된 용어로 알려져 있지만 김난도 서울대 교수팀이 『트렌드 코리아 2018』(미래의창 2017)에서 한국사회의 새로운 트렌드로 지목하면서 일약 오늘날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유행어로 떠올랐다. 하지만 현재 ‘소확행’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박한 편이다. ‘소확행’이 “정치가 퇴보하거나 정체됐을 때 되풀이해 등장하는 징후”이며 인간을 “배불리 먹여주고 소소한 취미 활동에 몰두하게 해주면 정치고 자유고 관심 없는 존재”로 격하시키는 통치술의 일환이라거나2) 애초에 ‘소확행’의 정신이 무엇이었든 그것은 현재 소비주의적 마케팅 용어에 불과하다는 냉소적 반응이 대표적이다. 이런 비판의 근저에는 ‘소확행’이 부르주아-중산층이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꺾여버린 주체가 현실에서 취하는 체념적이고 수동적인 대응에 불과하다는 판단이 자리 잡은 듯하다. 자조적인 맥락에서 ‘소확행’을 입에 올리는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거기에는 ‘작고 확실한 행복’을 적극적으로 추구한다기보다 내게 주어진 작은 것에 만족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푸념과 원망의 정서가 강하게 묻어 있다. 확실히 ‘소확행’이라는 단어가 유통되는 사회적 맥락을 보았을 때 그 단어에서 모종의 긍정적인 가능성을 추출해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소확행’이 단지 저성장과 불평등의 ‘뉴노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적당히 현실에 만족하고 살라는 세뇌에 불과한 걸까. ‘소확행’에는 변화한 사회경제적 조건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자 하는 주체의 실천이 자리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일까. ‘소확행’의 기본정신이 욕망의 통제를 통해 삶의 만족을 획득하려는 데 있다면 거기에는 자신의 욕망을 반성하고 적정한 삶의 형식을 스스로 정립하려는 능동적인 움직임이 필연적으로 요구되지 않는가. 이런 질문들을 따라가다보면 의외로 근대 산업사회가 제시한 ‘위대한 약속’이 (거짓으로 탄로 났음에도) 아직 우리에게 뿌리깊게 남아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프롬이 말한 보편적 부르주아에의 이상은 그 불가능성이 폭로된 지금에도 여전히 모두가 도달해야 할 사회적 욕망으로 기능하고 있는 건 아닐까. ‘소확행’이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사는 건 그것이 만인이 보편적으로 지향하는 상승의 욕망과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는 탓인지도 모르겠다.

‘소확행’은 보편적 부르주아-중산층을 꿈꾸는 평범한 사람들의 욕망이 포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생각만큼 ‘소확행’과 거리가 먼 것은 없다. ‘소확행’에서 중요한 건 주체의 욕망을 ‘통제’하는 것이지 ‘포기’시키는 것이 아니다. ‘소확행’은 그 점에 있어 ‘욕망의 포기’가 아니라 ‘욕망의 통제’를 역설하는 고대 그리스의 ‘엔크라테이아’(Enkrateia) 정신과 통하는 면이 있다. 미셸 푸꼬(Michel Foucault)에 따르면 ‘엔크라테이아’는 “욕망과 쾌락의 영역에서 저항하거나 싸울 수 있게 해주는, 그래서 그것들을 확실히 지배할 수 있도록 해주는 자기지배의 능동적 형태”이며3) 이는 “단순히 욕망을 가지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맞게 욕망하는 것을 의미”4)한다. 물론 이제까지 ‘소확행’이 한국사회에서 자기지배의 능동적 테크놀로지로 기능해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작고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 내재된 자기지배의 능동적 가능성을 새롭게 창안하고 전유함으로써 이제까지와는 다른 ‘소확행’의 정치적 가능성을 탐문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작고 확실한 행복’을 추구한다는 건 (‘소확행’에 대한 흔한 오해와 달리) 즉물적인 만족을 주는 쾌락에 탐닉한다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소확행’을 위해서는 자신을 만족시켜줄 ‘작고 확실한 대상’이 어떤 것인지를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욕망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과연 내 삶에 있어 ‘적절한 욕망’의 크기와 형태가 무엇인지를 거듭 묻는 일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소확행’은 에리히 프롬이 제시한 이분법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간다. 가령 프롬이 비판하는 소유적 실존양식에서 행복은 최대치의 쾌락으로 정의되며 이때의 행복= 쾌락은 무한히 증식하는 것을 본령으로 삼는 자본처럼 결코 그 만족을 모르는 것으로 상정된다. 하지만 ‘소확행’은 행복= 쾌락의 자기증식 운동이 결코 영원할 수 없으며 그것이 약속하는 미래의 행복이란 반드시 현재의 희생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반성적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점에서 근대 자본주의가 내세우는 축적과 재생산의 논리에 일정한 거리를 둔다.

한편 축적의 논리가 지배적이던 한국사회에서 현재는 미래를 위한 예비적 자산의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구조화된 저성장 국면에서는 시점 간 선택(intertemporal choice)에 있어 현재에 대한 시간 선호(time preference)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미래에 대한 원근법적 구상력이 파괴됨으로써 현재는 커다란 의미의 공백으로 떠오르게 된다. ‘소확행’은 그 결핍을 ‘작고 확실한 무언가’로 채우려는 시도이며 이는 개별적 주체만큼이나 다양한 ‘자아의 테크놀로지’를 요구한다. 이때 글쓰기가 ‘자아의 테크놀로지’와 맺어왔던 밀접한 관련을 염두에 둔다면 ‘소확행’ 시대의 소설 쓰기가 이전과는 다른 결을 지니리라는 예측도 충분히 가능하다.5) 현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필연적으로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강조로 나타나게 마련이므로, 최근 한국소설에 “무시무시한 ‘돌파력’을 갖는” “‘나’에 관한” 이야기와 “철저한 단독자적 자기 긍정”6)이 범람하는 이유의 일단 역시 여기서 찾을 수 있겠다. 관련해 오늘날의 “문학은 표면적이고 얄팍한 세계로, 허영심과 속물들 주변의 현실로, 그리고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과 ‘소확행’ 사이에서 방황하는 너무나도 주관적이지만 보편적인 삶들에게로 향해 가는 중”7)이라는 견해도 있거니와 아닌 게 아니라 오늘날 ‘뉴노멀’ 시대의 소설들은 프롬의 이분법을 비웃기라도 하듯 소유와 존재를 둘러싼 삶의 양태를 공히 변경하면서 현실을 살아내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2. ‘소확행’의 (불)가능성: 김세희의 소설

 

김세희의 소설에는 ‘소확행’ 시대를 통과하는 인물이 마주하는 공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