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문명전환의 세계감각과 문학
다시 너와 연결될 수 있다면
『꿈에서 만나』 『스노볼』 『단명소녀 투쟁기』를 읽으며
강수환 姜受芄
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콤플렉스는 나의 힘」 「시가 다시 노래가 되었을 때」 등이 있음.
xysnp@hotmail.com
1. 디지털 시대, 주체의 분열과 연결
“다시 너와 연결될 수 있다면, 너를 만나고 싶어 이제.”1 아이돌 그룹 에스파(aespa)의 세계관은 독특하다. 이들은 현실세계의 ‘에스파’와 가상세계의 아바타에 해당하는 ‘아이’(æ)로 구분된다. 분리된 두 세계에 놓인 이들이 온전한 하나를 이루기 위해서는 연결이 필요하지만, 현실과 가상세계 사이의 ‘광야’를 떠돌고 있는 ‘블랙맘바’라는 존재가 이를 가로막는다. 결국 어려움을 이겨내고 두 세계의 존재를 연결하고자 블랙맘바를 찾아 광야로 떠난다는 것이 이들의 핵심 설정이다. 일반적으로 가상세계의 아바타는 현실의 사용자에게 종속된 것으로 여겨지나, 흥미롭게도 에스파와 아이는 각자 다른 두 세계에 자리하고 있을 뿐 위상에는 큰 차이가 없다. 즉 이들은 서로의 ‘나’이면서 동시에 독자적인 존재다. 이들이 서로를 또다른 ‘나’가 아닌 ‘너’로 부르며 다시 연결될 수 있기를 노래하는 것은 그 이유에서다.
게임 줄거리 같은 요약이지만 마냥 비현실적인 설정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실제로 우리 역시 스마트폰 액정 너머로 소셜미디어 속 저마다의 ‘아이’를 보며 비슷한 물음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거울 속의 나는 네가 아닐까. 일그러져버린 환영인 걸까.”2 특히 가상세계 속에서 구성된 ‘나’의 모습과 현실의 ‘나’ 사이의 틈이 클수록 우리는 스크린(거울)에 비친 ‘나’를 의심하고 더 나아가 환영으로 감지하기에 이른다. 마치 에스파와 아이의 관계처럼, 이때 두 세계의 ‘나’는 모두 부정할 수 없는 ‘나’이면서 동시에 ‘나’가 아니다.
문득 궁금해진다. 그렇다면 진정한 ‘나’는 과연 어느 편에 있는가? 쉬이 답하기 어려운 물음이다. 소셜미디어에 게시한 ‘나’의 이미지와 현실세계의 ‘나’ 가운데 무엇이 진짜에 더 가까운가? 현실세계의 ‘나’는 젊은 인터넷 커뮤니티 사용자들이 자기(내면)의 분신으로 삼는 ‘자캐’나 ‘오너캐’3보다 더 진정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특히 팬데믹 이후 가상세계에서 이전보다 더 많은 공적·사적 논의와 관계 맺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 진정한 ‘나’가 위치한 장소는 어디인가? 이 질문에 흔쾌히 답할 수 있기까지, 저마다의 광야를 떠돌며 분리된 각각의 ‘나’를 연결하려는 우리의 시도는 무한히 지연된다.
한편 필사적으로 두 세계의 ‘나’를 연결하려는 에스파의 세계관을 조금 먼발치에서 바라보면 으스스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다. 이는 가상세계 속 또다른 내가 통제 바깥에서 따로 존재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내가 로그아웃한 후 잠자리에 든 사이, 정지되었으리라 생각했던 가상의 ‘나’가 몽유병이라도 앓듯 온라인 이곳저곳을 배회한다고 상상해보자. 이것은 단지 우리의 정체성이 분열된 상태라는 것을 훨씬 넘어서는 이야기다.
하지만 따져보면 이 역시 놀라운 일인 것만은 아니다. 비록 현실의 ‘나’는 연결을 끊었더라도, 수많은 불특정 다수와 연결된 가상세계의 ‘나’는 그곳에서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기존에 내가 웹에 남긴 반응들(게시물, 좋아요, 리트윗 등)은 해당 반응과 접속한 또다른 사용자의 알고리즘에 개입하고, 마찬가지로 다른 이용자의 활동은 가상세계 속 ‘나’의 타임라인의 질서와 배치를 시시각각 재편한다. 그러므로 잠든 두 세계의 ‘나’가 꾸는 꿈의 형태는 다를 수밖에 없다. 현실의 ‘나’는 기억과 무의식적 욕망처럼 내면 깊숙한 곳으로부터 꿈을 길어 올리지만, 가상의 ‘나’는 다른 접속자의 반응과 같은 외부로부터 꿈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시 너와 연결될 수 있다면”을 희망했던 에스파의 가사에서 방점은 ‘연결’이 아니라 ‘너’라는 정확한 대상 위에 찍혀야 한다. 디지털 미디어 세대에게 전지구적인 연결은 마치 자연환경처럼 이미 주어진 상시적인 배경이다. 이들의 불안은 폭발적으로 확장하는 타자와의 연결 가운데 각자가 남긴 행위, 반응, 표출 등으로 인해 ‘나’의 꿈의 형상과 성질이 실시간으로 변형을 일으키는 상황 속에서, 정작 ‘너’(나)와의 싱크는 이루지 못한 채 분열되어버린 스스로를 발견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스티글러(B. Stiegler)의 말처럼 오늘날의 디지털 환경은 우리를 더는 나누어질 수 없는(in-dividual) 의미로서의 개인이 아닌, 무수히 나누어지고 데이터화되는 가분체(dividual)적 존재로 이끄는 듯하다.4 조각나고 분열된 형태로서의 개인. 이 지점에서 주체는 이미 상징적 정체성 그 자체로 인해 분열되어 있다는 정신분석학의 오랜 명제를 떠올려볼 수도 있겠지만, 늘 그렇듯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이러한 분열과 연결에의 강박 사이에서 분투하는 세대를 위시하며 이들에게로 향하는 문학은 과연 어떤 말을 건네고 있을까? 조우리 박소영 현호정의 소설5을 읽으며 그 단서를 찾아보려 한다.
2. 꿈의 감염과 주체의 틈
청소년소설가 조우리의 『꿈에서 만나』는 감염처럼 전파되는 꿈을 서사화한 작품이다. 소설은 학생들 사이에서 하나의 질병이 배회하는 장면으로 출발한다. 병명은 ‘NARC-19’로, 기면증(narcolepsy)에서 착안한 듯한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약 2~3주 동안 발작적인 수면 상태에 빠지는 것이 증상이다. 길을 걷다가도 문득 잠에 빠지는 이 질병은 겉보기에는 심한 기면증처럼 보이지만, 환자의 혈액에서 공통 바이러스가 발견되어 전염병으로 분류된다. 소설이 의도하는 바는 자명하다. 코로나19로 등교할 수 없고 친구와 거리두기를 해야 하는 혼란스러운 현실 속의 청소년들을 위로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소설은 지친 이들에게 잠을 선물하고 멀어진 친구들을 “꿈에서 만나”볼 수 있도록 팬데믹 상황을 새롭게 고쳐 쓴다. 하지만 꿈을 다루는 만큼, 작품은 이 세대의 꿈과 현실을 둘러싼 어떤 무의식을 드러낸다.
주인공 ‘니나’는 이름보다는 ‘전교 1등’으로 불린다. 싱글맘으로 성공한 엄마를 본받아 “전문직 여성”이 되리라는 포부를 안은 채 “전 세계가 전염병에 걸리는 한이 있더라도 1등급의 길을 가겠다”(21면)며 다짐하는 인물이다. 이처럼 NARC-19에도 굳건했던 니나의 세계는 학생회장과의 만남을 기점으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학교의 NARC-19 대처 방안을 안내하는 교내 홍보물을 제작하게 되는데, 서둘러 작업을 마친 뒤 책상 앞으로 돌아가고 싶은 니나와 달리 회장은 며칠에 걸쳐 포스터 디자인에 정성을 기울인다. 고작 교내 포스터 따위가 뭐가 중요하냐며 마무리를 종용하는 니나에게 회장은 반문한다. “그럼 중요한 게 뭔데?”(36면) 그날 이후 니나의 머릿속에는 시도 때도 없이 회장이 던진 물음이 불쑥 솟게 되고, 그동안 주목하지 않았던 자기 내부의 틈을 자각한다. 니나는 아래와 같이 털어놓는다.
“나도 안 읽어 봤어. 엄마가 내 이름을 그 책의 주인공한테서 따 왔다고 했어. 자기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사는 강인하고 총명한 여성이라고, 내가 그렇게 자랐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스무 살이 넘어서 읽으라고 했어. 대학에 간 다음에 읽으라고……. 요새 나는 내가, 중요한 걸 다 놓치고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왜일까?”(55~56면)
여기서 말하는 책은 루이제 린저(Luise Rinser)의 『생의 한가운데』다. ‘니나’라는 이름에 담긴 엄마의 염원대로 니나는 분명 강인하고 총명한 여성 청소년이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과 스스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중요한 걸 다 놓치고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 aespa 「Black Mamba」(2020)의 가사. ↩
- 같은 곡. ↩
- 자캐란 ‘자작 캐릭터’의 준말로 개인이 특정한 설정을 갖추어 창작한 캐릭터, 오너캐란 ‘오너 캐릭터’의 준말로 캐릭터의 주인인 자기 자신을 대표하는 캐릭터를 뜻한다. ↩
- Bernard Stiegler, The Age of Disruption, Polity Press 2019, 190면. ↩
- 이 글이 다룰 텍스트는 조우리 『꿈에서 만나』(사계절 2021), 박소영 『스노볼』(전2권, 창비 2021), 현호정 『단명소녀 투쟁기』(사계절 2021)이다. 세 텍스트는 모두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으나 세부적으로는 청소년소설, 영어덜트 소설, 일반소설로 범주를 각기 달리 표방하고 있음을 밝혀둔다. 여기서 각 장르의 정의와 개념상의 차이를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영어덜트물, 청소년소설, 장르소설 이 세 갈래가 하나로 모이는 청소년소설의 장르화 경향”(오세란 「청소년소설다움을 넘어서」, 『기묘하고 아름다운 청소년문학의 세계』, 사계절 2021, 60면)으로 서로 간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작금의 상황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 글에서 주목하려는 점은 오늘날 디지털 세대 독자군을 의식하며 쓰인 텍스트로부터 발견되는 어떤 징후들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