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좌담
다시 동학을 찾아 오늘의 길을 묻다
김용옥 金容沃
철학자, 한의사, 고려대 정교수 역임. 최근 저서로 『동경대전』 1~2권, 『노자가 옳았다』 『나는 예수입니다』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중용 인간의 맛』 등이 있음.
박맹수 朴孟洙
역사학자, 원불교 교무, 원광대 총장. 저서 『생명의 눈으로 보는 동학』 『개벽의 꿈, 동아시아를 깨우다』, 공저서 『동학으로 가는 길』 『조선의 멋진 신세계』 『백년의 유산』 등이 있음.
백낙청 白樂晴
『창작과비평』 명예편집인, 서울대 명예교수. 최근 저서로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 『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 『2013년체제 만들기』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등과 『백낙청회화록』 1~7권이 있음.
백낙청(사회) 먼저 오늘 좌담에 함께해주신 두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도올 선생은 원래 에너지가 넘치시지만 그래도 정말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고 계신데 좌담에 와주셔서 감사드리고요. 박맹수 선생은 원불교 교무로서 법명이 윤철(允哲)이고 학산(學山)이 법호지요. 지금 원광대 총장직까지 수행하고 있어 누구보다 바쁘실 텐데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창비에서 이런 좌담을 기획하게 된 계기는, 도올 김용옥 선생께서 두권짜리 『동경대전』(통나무 2021)을 내셨죠. 그야말로 대작인데, 이를 계기로 우리가 동학을 재인식하는 건 물론이고 동학이 대결했던 사상적인 유산이라든가 시대현실을 살펴보고 이어서 오늘의 상황까지 좀 폭넓게 논의해보고자 합니다.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두분도 인사 겸 간단한 소회랄까, 이 좌담에 기대하시는 바를 짤막하게 말씀해주시죠.
박맹수 저는 1955년생인데요, 대학생 시절에 『창작과비평』과 ‘창비신서’의 세례를 받으면서 사상 형성을 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학원에 진학하고 나서 도올 선생님이 하바드대 유학 마치고 와서 쓴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민음사 1985)를 읽고 받은 지적 자극은 과장해서 말하면 세세생생 잊을 수 없을 정도였고요. 세계적 석학으로 꼽히는 두분을 모시고 말석에 끼게 된 것을 과분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평소 궁금하고 듣고 싶었던 내용을 많이 여쭈어서 우리 후학들에게 큰 지침이 될 수 있는 자리로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왔습니다.

왼쪽부터 박맹수 백낙청 김용옥
김용옥 저는 우선 우리가 이 한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의 본질적 진화를 의미한다고 봐요. 과거에 만나지 않았던 사람들이 이렇게 만나고, 의사소통을 하고, 그리고 대중을 향해서 심오한 주제를 진지하게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 문명의 생명력, 그 창조적 전진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백선생님께서 도올은 정통적인 학문 수련을 받은 사람인데 우리나라 학계에서 상당히 배척하는 인상이 있고, 이런 자리를 통해서라도 어떤 역사적인 자리매김을 다시 해야 한다고 말씀하셔서 저는 눈물겨울 정도로 감사했습니다. 역사적 평가는 역사 그 자체의 몫이겠지만, 지금 제가 느끼는 이런 감격이 창비를 읽는 젊은 문학도·사상학도들에게 참신한 영감(靈感)을 던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동경대전』과 동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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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제가 도올께 그런 말씀을 드린 건 사실이에요. 도올 선생은 추종자도 많고 독자도 많지만 주류 학계에서는 일부러 담을 쌓다시피 하고 있는데, 창비가 힘이 큰 데는 아닙니다만 이렇게 함께 논의하는 자리를 통해 조금 돌파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동경대전』 1, 2권은 각기 ‘나는 코리안이다’와 ‘우리가 하느님이다’라는 부제가 달렸고 김용옥 ‘지음’이라 되어 있습니다. 단순한 번역과 주석서가 아니고 독자적인 내용을 많이 담은 책이라는 뜻이지요. 우선 1장 「서언」을 읽으면서 저는 소설 읽는 것처럼 재밌었어요. 「동경대전」(이하 김용옥 저서는 『동경대전』으로, 동학의 창시자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의 경전은 「동경대전」으로 표기함—편집자) 초판본을 입수해 비정(批正)을 하고 여러 새로운 사실을 밝혀놓았는데, 하여간 그 경위가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이 책을 쓰시기까지의 긴 과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나 지금의 소감을 간략히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김용옥 저같이 고전학 수련을 받은 사람한테는 초판본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제가 수학한 동경대의 중국철학과는 아주 엄밀한 훈고학적인 훈련을 시키는 곳이었기 때문에, 저는 초판본의 문헌학적 의미에 관해 다각적인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경대전」을 공부하려고 보니까 초판본이 없었어요. 이게 2009년에나 발견이 되는데, 제가 평생 동학의 스승으로 모신 표영삼(表暎三) 선생님도 인제경진초판본을 결국 못 보고 돌아가셨습니다. 후학으로서 입수된 초판본을 봤을 때 그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눈물이 쏟아져 나오고, 내가 너를 얼마나 찾았는데 이렇게 늦게 나타나느냐고 원망도 했죠. 우선 이 초판본에 대해서는 철학적 해석은 둘째 치고, 하드웨어적인 사실이 중요합니다. 초판본이 나타나기 전까지 이것은 무비판적으로 그냥 목판본으로 알려져 있었어요.
팔만대장경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지만 목판인쇄라는 것은 우선 경판이라 불리는 나무판을 만들어야 하고, 그 위에 글이 적힌 창호지를 뒤집어 붙여서 한 글자 한 글자 끌로 파내야 하니까 엄청난 공력과 시간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동경대전」은 거의 모든 판본이 목판본이 아니라 목활자본이었습니다. 이 사실이 굉장히 중요해요. 목판본과 달리 목활자본은 나무판을 준비할 필요가 없고, 개별 활자를 수시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목판본처럼 전체를 나무판 위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계속 해판을 하며 두세개의 인판만으로도 전체를 인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매우 간편하게 단기간에 인쇄가 가능한 것이지요.
그런데 여태까지 목판본이라고 주장해왔던 사람들은 이런 단순한 사실에 무지합니다. 그리고 수정되어야만 하는 오류를 오류라고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과학이거든요. 사계의 전문가들을 총망라해 의견을 듣고 우리나라 과거 인쇄사의 상식에 비추어 고증되어야만 하는 과학적 사실인데도 생각을 바꾸려고 하지 않아요. 답답할 뿐입니다.
박맹수 후학으로서 서너가지 큰 인상을 받았는데요, 우선 앞으로 동학사상 및 한국학 연구가 도올 선생님의 『동경대전』 이전과 이후로 나뉠 정도로 일대사건이라는 점입니다. 판본학의 어떤 전범이랄까 모범을 이 역작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이를 문헌비평이나 사료비판이라 할 수도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후학들이 잘 따를 거라고 봅니다. 또 하나는 선생님의 동학 연구는 반세기 이상에 걸치죠. 고려대 학부 시절부터 이미 박종홍(朴鍾鴻)·최동희(崔東熙)·신일철(申一澈)과 같은 1세대 동학 연구자분들의 세례를 받아 문제의식을 가지고 계셨고, 반세기간 그 화두를 놓지 않고 이번에 집대성하신 겁니다. 선생 개인에게도 대단한 학문적 성취고 우리 한국사의 커다란 성취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끝으로 제 전공은 근대 한국사상사에서 동학부터 증산교, 원불교, 민중운동인데, 동학이란 다른 말로 하면 조선학이고 국학이고 한국학입니다. 그런데 이를 연구하고 그 문제의식으로 한국사회를 진보시키려 했던 우리의 수많은 선배들이 피를 흘리고 희생됐죠. 이번에 『동경대전』이 나옴으로써 조선학을 하려고 했고 조선을 제대로 세우려 했던, 피 흘리며 돌아가신 수백만 영령들을 위한 참된 진혼곡을 올려주셨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백낙청
백낙청 멋있는 말씀이네요. 제 짧은 지식의 범위 안에서도 『동경대전』은 도올의 저서 중에서도 특별한 것 같아요. 판본학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만, 판본학이라는 건 비단 한국학이나 동양학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굉장히 중시합니다. 영문학에서도 판본학의 전통이 상당히 탄탄한데 우리나라에는 그게 참 드물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도올 선생의 다른 책들에서도 판본 얘기가 나옵니다만 이번처럼 선행 연구를 하나하나 실명으로 시시비비를 가린 예는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참 새로운 작업을 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비평적인 안목이 없는 문학자들은 사실 판본학도 제대로 못한다고 봐요. 옳은 감정(鑑定)이 나오기 어렵거든요. 그런 점에서도 참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김용옥
김용옥 한가지 말씀드릴 건 『동경대전』 제1권은 「대선생주 문집(大先生主文集)」(동학의 창시자 수운의 일대기를 기록한 책)이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대선생주 문집」에도 판본학적 문제가 얽혀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도원기서(道源記書)」라는, 필사본으로 전해져온 책을 동학의 역사를 말해주는 가장 권위있는 책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대선생주 문집」은 제가 새로 발견한 문헌이 아니라 원래 있었던 것인데, 사계의 연구자들이 「대선생주 문집」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가장 권위있다고 맹신되어온 「도원기서」보다 「대선생주 문집」이 더 오리지널한 것이라는 사실에 엄밀한 인식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도원기서」의 전반부가 원시자료인 「대선생주 문집」을 참고해가면서 재구성된 문헌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죠. 「대선생주 문집」은 후대에 만들어진 「도원기서」보다 훨씬 더 리얼한 인간 수운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대선생주 문집」에 나타난 수운의 모습을 『동경대전』 1권에 놓음으로써 사람들이 그의 저서를 알기 전에 그 인간을 알 수 있게 해준 겁니다. 『맹자(孟子)』의 「만장 하(萬章 下)」에 이런 말이 있거든요. “독기서(讀其書)” 책을 읽는다면서 “부지기인(不知其人)” 그 책을 쓴 그 사람을 모른대서야 “가호(可乎)” 그게 될 말이냐. 사실 「동경대전」을 읽으려면 수운이라는 인간을 먼저 알아야 한다, 이를 정확한 텍스트를 통해 알려줘야겠다, 이러한 독서법적 작전이 이번 『동경대전』 프로젝트의 핵심을 이루는 것입니다.

박맹수
박맹수 제가 부연설명을 드리자면 도올 선생님이 「대선생주 문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번역 주석을 하셨습니다. 그전에도 여러 이본들을 대여섯분이 검토한 적이 있어요. 이번에 도올 선생님이 엄청나게 비판한 김상기(金庠基) 선생님이 1960년대에 최초로 하셨고, 그뒤에 국사편찬위원장을 하셨던 이현종(李鉉淙) 선생님, 그리고 조동일(趙東一)·표영삼 선생님이 하셨고, 말석에 박맹수·윤석산(尹錫山) 등이 있습니다. 이런 기존의 연구를 도올 선생님이 개벽을 시켜버렸습니다.(웃음) 찬성이나 지지·공감을 떠나 굉장히 논쟁적인 문제제기를 하셨기 때문에 「대선생주 문집」의 이번 주석 번역이야말로 동학의 개벽을 일차로 이뤄내셨다 하겠습니다.
백낙청 내가 듣기로는 학산님께서 동학을 연구해온 젊은 후학들을 데리고 세미나도 하셨다는데, 도올이 확 뒤집어버리고 개벽해버린 점에 대해 반응이 어때요?
박맹수 책이 나오자마자 4월 중순부터 강독모임을 구성해서 이 잡듯이 읽고 있습니다. 반응은 아주 극과 극, 천양지차입니다. 이거야말로 전범을 보여주었다는 열렬한 의견이 3분의 2고요, 좀 까다로운 연구자들은 논쟁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거시적으로 엄밀한 판본 검토와 정치한 주석 작업을 통해 동학 연구에 있어 하나의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한 부분에는 전면적으로 공감하고 있습니다만, 세부적인 데는 조금 논란이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만 예를 들면 인제경진판이 경진년(1880년)에 인제에서 간행한 건데, 선생님도 말씀하셨지만 간기(刊記)가 없습니다. 간행 연도나 장소가 없죠. 그런데 계미중춘판은 1883년 음력 2월에 나왔다는 명확한 간기가 있어서 역사학적으로는 좀더 신빙성을 둘 수 있고 강조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입니다.
김용옥 1880년판이 초판본이고, 계미중춘판은 1883년에 목천에서 간행됐어요. 초판은 백부를 찍었는데 여러 조직에서 나누어 가졌기 때문에 초기부터 민간에서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에 비해 1883년 목천판은 좀더 많은 부수가 인출되었습니다. 그리고 중춘판 이후로 목천이 경전 간행의 중심지가 되면서 계미년에 간행된 판본들이 권위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초판본에 간기가 없다는 건 무슨 말이냐?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이걸 독립된 하나의 경전으로 간행한다는 의식이 없었다는 것이죠.
최초의 인출자들이 기획했던 것은 수운의 글과 삶 모두를 포괄하는 대규모의 문집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상황으로 그러한 포괄적인 문집을 간행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돈과 시간이 없었죠. 그래서 수운의 행장(行狀)에 해당하는 「대선생주 문집」을 빼버린 거예요. 그래서 「동경대전」은 어떤 의미에서는 잡저(雜著)라고 할 만한 몇개의 논문을 모은 간략한 서물이 되고 만 것이죠. 거기에 시나 편지, 의례절차에 관한 글을 보탰고요.
3년 후에 목천판을 낼 때는 「동경대전」을 경전으로서 정본화하자는 생각에 내용을 첨가하면서 분량과 체재를 갖추었고, 그때 비로소 간기를 집어넣은 것이죠. 1883년의 목천판, 경주판에서 내용이 첨가되었다는 사실은 우리로서는 고마운 일이지요. 그런데 그 사실을 빙자하여 「동경대전」의 초고가 구전에 의한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가설을 세우는 어리석은 학인들이 많아요. 첨가라고는 하나 기본을 이루는 경전은 변화가 거의 없습니다. 모든 판본이 하나의 모본(母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진판과 목천판을 비교하면서 경진판이 더 부실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판단입니다. 두 판본에서 겹치는 텍스트를 두고 면밀하게 대조를 해보면 경진판의 내용이 훨씬 더 정확하고 엄밀합니다. 다시 말해서 초판본의 권위는 절대적이라는 것이죠. 이것은 저의 사견이 아니라 사계 대가들의 일치된 견해입니다.
‘플레타르키아’와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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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동경대전』에서 또 큰 대목을 형성하는 게 독자적으로 쓰신 「조선사상사 대관(朝鮮思想史大觀)」이라는 논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그 키워드는 ‘플레타르키아’(pletharchia)라는 말이에요. ‘플레타르키아’와 민주주의 문제는 오늘 우리가 끝 대목에서 더 다루고 싶은 주제입니다만, 여기서 도올 선생께 질문하고 싶은 건 왜 하필이면 이 어려운 희랍어를 가져오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김용옥 우선 사람들에게 신선한 느낌을 주지요. 새로운 생각을 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말을 만드는 게 훨씬 유리하지요.(웃음) 하이데거(M. Heidegger)도 그런 작전을 많이 폈죠. ‘플레타르키아’에서 ‘플레토스’(plēthos)는 다중을 가리킵니다. 여기에 ‘아르키아’를 붙였습니다. ‘데모크라티아’(demokratia)에서 ‘크라티아’는 다스린다는 의미이지만, 사실 데모스(demos)가, 다시 말해서 민(民)이 직접 주체가 되어 다스린다는 건 역사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았거든요. 결국은 소수가 다스리는데 민의 뜻을 반영하고, 다수의 삶의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정치를 한다는 겁니다. 실상 희랍어에서 이 데모크라티아는 굉장히 나쁜 말이에요. 경멸적인 냄새가 배어 있지요.
백낙청 반대하는 사람이 욕하느라 만든 말이죠. 우중이 다스린다는 의미로.
김용옥 그런데 이 민주주의라는 말 때문에 다들 우선 동양사상을 깔봅니다. 너희들은 민주주의 전(前)단계의 왕정구조의 정치 형태밖에 없다는 거죠. 인류가 제대로 된 민주주의라는 걸 해본 적도 없는데 말이죠. 그래서 ‘데모크라티아’라는 말 자체가 엉터리다,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그리고 미국의 대표적인 정치학자 로버트 달(Robert Dahl)도 미국 헌법이 과연 민주적이냐 하는 문제를 제시했고, 오늘날에도 선거인단 같은 문제로 추태가 벌어지는데, 미국 헌법을 만든 사람들 자체가 미국 사회가 앞으로 어떻게 갈지에 대한 정확한 비전이 없었다는 거예요. 아주 편협한 문헌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불교학의 대가인 에드워드 콘즈(Edward Conze)가 지적한 대로, 민주주의 그 말 자체가 매우 독단적인, 나쁜 신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에 저는 동의합니다. 민주주의는 편견을 자아내는 명언종자(名言種子)라는 것이죠. 민주라는 명언종자의 업식에 집착되어서 그 말 한마디로 모든 건강한 담론이 불식되어버린다는 것이죠. 그래서 민주라는 언어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 동양사상에도 서양보다도 더 지고한 이념의 민본사상이 있어왔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죠. 서구처럼 왕권을 제약하는 의회를 만든다든가 하는 제도적 방식으로 민본을 실현하지 못했을지라도, 우리의 정치 형태 내부는 좀더 세밀하게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플레타르키아’라는 말을 만든 거죠.
백낙청 그 취지에는 공감합니다. 세계가 민주주의라는 걸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는 말씀도 맞고요. 그런데 저는 미국 헌법을 하는 사람들이 미국의 장래에 대해 아무 비전도 없었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민주주의는 분명 안 하겠다는 의식을 가지고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다수가 지배할까봐 삼권분립도 철저히 하고, 대통령 간접선거 하고, 상·하원 분리시켜놨잖아요? 민주주의를 할 수 없게 설계를 잘했고 그게 한동안은 잘 작동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제는 옛날식으로 진짜 책임있는 엘리트들이 하는 과두정치조차 아니고 돈 위주로 돌아가는 과두정치가 됐어요. 그러면서도 옛날하고 다른 건 오히려 지금은 민주주의를 내걸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실현 안 됐다는 것은 동감인데, 플레타르키아에서 ‘아르키아’(archia)가 ‘원리’라는 의미 아니에요? ‘다중원리’라는 의미니까 ‘민본원리’ 내지 ‘민본성’으로 번역해도 같은 말인 것 같습니다. 다만 과거에는 이를 실현할 여러 메커니즘이 부족했고 또 상하질서가 엄격한 가운데 민본사상이라고 하면 민주가 아니라 군주나 정부가 백성이라는 양떼를 잘 이끌어주고 위해주는 그런 체제였지요. 그걸 확 뛰어넘은 게 동학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굳이 ‘플레타르키아’라는 말을 안 쓰더라도 우리 동양에 원래 민본원리가 철저했는데 유교국가는 수직적인 민본주의였으나 동학에 와서 비로소 수평적인 민본주의로 바뀌었다, 그렇게만 말해도 충분하지 않나 싶어요.
김용옥 저도 선생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이고요, 그래서 요새는 ‘플레타르키아’라는 말은 많이 쓰지 않습니다.(웃음) 민본이라는 말만 해도 민주라는 말보다 더 깊은 의미를 전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민주의식의 양보를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니고요.
박맹수 2004년에 『도올심득 동경대전』(통나무)에서 이 용어를 우선 쓰셨잖아요. 후학의 입장에서 그 글을 읽고 느꼈던 소감은 용어의 정확성을 떠나서 민본성이라는 관점으로 동학의 핵심을 잡아내려고 하는 것만큼은 독보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민본의 뿌리를 맹자의 사상에서, 우리 조선에서는 정도전(鄭道傳)의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찾으셨습니다. 이것이 동학으로 이어져왔다고 볼 때, 선생님이 쓰신 것처럼 동학은 ‘땅적인 것’이죠. 조금 공부해보면 바로 실감이 오는데, 역시 동학의 본질을 드러내려면 민본성에 주목을 해야 하고, 그런 점에서 ‘플레타르키아’라는 용어를 통해 조선사상사의 민본의 역사와 전통이 동학에서 꽃피워졌다고 보는 관점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백낙청 도올도 얘기하셨지만 단군 신시(神市)의 홍익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게 민본사상이에요. ‘플레타르키아’라는 말로 전부 포괄해버리기에는 동학에서 그 민본사상이 평등사상과 결합하는 전환점이 너무 중요한 것 같아요. 그전에는 위에 있는 사람이 밑에 있는 백성을 잘 돌봐준다는 것이었고, 사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나 실학자들도 기본적으로는 그랬죠. 그런데 동학에 와서는 종전의 수직적인 플레타르키아에서 수평적인 플레타르키아로의 일대전환을 이룩합니다. 요즘에는 수평주의 자체가 새로운 신(神)이 되어버린 면이 없지 않지만 동학은 그와는 다른, 도력의 상하를 존중하는 수평적 민주주의였습니다. 민주주의 문제 또한 또다른 의미의 민주주의를 우리가 개발하고 개념을 발전시켜야겠지요.
김용옥 제가 말씀드리고자 했던 것은 ‘플레타르키아’라는 말은 포기해도 되는데, 우리다운 새로운 기준을 가지고 민주주의를 새롭게 규정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아무리 훌륭한 제도에서 뽑힌 대통령도 세종만 한 인물이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