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다시, 부패된 조건들을 바라보며

새로운 ‘관리철학’의 역풍과 최근 소설들의 분투

 

 

김녕 金寧

문학평론가. 201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주요 평론으로 「선명에서 창연으로」 「파괴의 반복을 기억한다는 것」 등이 있음.

cruciri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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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이 남긴 마지막 저서 『레트로토피아』(Retrotopia)1의 서문은 벤야민(W. Benjamin)의 잘 알려진 「역사철학테제」의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시작된다. 파울 클레(Paul Klee)의 「새로운 천사」에 대해 남긴 메시지로서 과거와 미래가 “각각의 미덕과 악덕을 서로 맞바꾸는 과정”을 포착한 글이다. 바우만은 벤야민의 통찰을 빌리되, ‘지금’ 「새로운 천사」를 다시 살펴보면서 “역사의 천사는 유턴하는 중”이며, 당대의 폭풍은 “뒤쪽으로”(24면) 불고 있다고 사태를 뒤집는다. 그러니까, 역사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향해 방향을 바꾸었다. “미래는 희망과 올바른 기대가 발생하는 서식지”가 아니라 “악몽의 장소로”(30면) 전환되었다. 낙관적이고 활기 넘치던 유토피아적 미래에 대한 희망이 패배주의적으로 낙담한, 그러나 안온하게 여겨지는 과거에 대한 향수(鄕愁)로 젖어가고 있다.

물론 이러한 논의는 핵과 개인무장이 증강되고, 국경장벽을 강화했으며, 월가 점령 시위는 실패로 돌아간 미국의 사정을 주된 근거로 삼는다는 점에서 한국사회의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역사의 천사’는 괄목할 만한 전진을 이루지 않았던가. 개개인은 ‘나’라는 단자로서 사적 영역에 유폐되는 대신 광장의 경험을 갖게 되었고, 리부트된 페미니즘은 ‘으레 그러한 것’으로 치부되어온 성차별적 관습에 경종을 가하고 개인의 문제로 환원되어왔던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하고 척결하면서 ‘연대’의 새 지평을 열었으며, 퀴어를 필두로 한 새로운 다원주의의 부상은 타자 인식의 제고를 가져왔다. 주지하다시피 최근의 한국문학 역시 전환을 맞은 ‘새로운 감수성’에 부응하고자 안팎으로 변화하고 있다. 광장을 시작으로 한 일련의 경험이 한때 ‘전망 없음’으로 채색되기도 했던 문학의 미래 구상에 대안적 가능성이라는 새로운 색채를 공급해준 셈이다. 대체로 상황은 바우만이 경고하는 레트로토피아를 향하기보다는, 미지의 영역에 놓인 두려운 미래를 더 낫고 올바른 세계로 주조하려는 의지와 그럴 수 있다는 희망을 끌어안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최근의 어떤 소설들은 그러한 낙관에 제동을 걸려는 듯 어렵사리 마련한 대안과 활로에 다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심지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가치관의 재현까지 시도하면서 이들이 보여주려 하는 ‘한계상황’은 단지 대안의 구상과 실천에 뒤따라오는 현실적인 어려움의 개별 사례로도 보인다. 어쩌면 이들은 긍정적인 전진에 들이닥친 역풍을 ‘새로운 위기’로 인식하고 날카로운 경고음을 발신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그저 기우에 불과한지, 아니면 정말로 대비해야 할 폭풍인지를 식별하려면 아무래도 바로 그 ‘최근의 어떤 소설들’을 뜯어보아야겠다.

 

 

2

 

전진, 그러나 거꾸로 부는 바람. 이처럼 상반된 두 방향의 힘과 관련해, 장희원의 「우리〔畜舍〕의 환대」2는 제목에서부터 의미심장한 암시를 던져준다. 공동체의 내부자로서 외부를 향해 가져야 할 태도로 흔히 상상되곤 했던 ‘환대’가 ‘(내부인) 우리가 보내는 것’이 아닌 ‘외부가 보내오는 것’으로 전도되어 있고, 환대에도 불구하고 내부의 시선은 외부를 ‘축사’로 명명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소설은 재현 부부에게 초점을 두고, 그들이 아들 영재의 초대를 받고 호주로 건너가 영재와 동거인들의 환영을 받는 상황을 그린다. 한데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이 “손님인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216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부는 시종일관 어떤 불온·불쾌·불편한 느낌에 사로잡혀 긴장한다. 그 불쾌의 근원은 재현과 아내에게서 각각 다르게 상상되지만, “아들과 흑인 노인, 어린 여자애가 함께”(215면) 살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아내가 묘한 불편을 느끼는 지점은 문신한 허벅지를 훤히 드러내놓고 다니는 민영과 아들이 한집에 살고 있다는 데서 주로 비롯되고, 재현이 예민하게 신경을 쓰는 건 아들과 흑인 노인 사이에서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스킨십이다.

이러한 차이는 과거 영재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포르노와 관련한 에피소드에서 해명되듯이, 아내의 경우엔 영재가 포르노를 보았다는 사실만 알고 있는 데 반해 재현의 경우엔 그것이 게이 포르노였다는 데까지 아는 점에서 연원한다. 요컨대 아내에게 영재는 의심 없는 ‘이성애자’여서 여성인 민영이 불안의 대상이지만, 아들이 ‘게이’일 가능성을 ‘더럽게’ 생각하는 재현에겐 흑인 노인이 불안의 대상인 셈이다. 소설에 영재와 흑인 노인 그리고 민영의 실제 관계를 확정 지을 수 있는 근거는 명확히 제시되지 않는다. 다만 아버지로부터 “더러운 놈”(209면)이라 모욕당하고 심한 폭행을 당했던 영재에겐 그들이 유효한 ‘대안적 가족’일 것이라는 짐작은 가능하다. 재현을 두고 “오빠한테 그렇게까지 했던 사람으론 안 보”인다며, “오빠가 저희랑 함께 살게 돼서 다행”(271면)이라는 민영의 말 역시 그 점을 뒷받침한다.

즉 영재의 ‘소속’은 이미 재현 부부가 아닌 흑인 노인과 민영 쪽으로 옮겨져 있다. 영재의 입장에서 이날의 저녁식사는 자신의 부모, 그러니까 종전의 ‘가족’을 ‘룸메이트’들과 함께 맞이하는 행사가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 선택한 ‘새로운 가족’과 ‘함께’ ‘부모’를 환영함으로써, 혈연이 부여한 전통적 가족관계와 결별을 선언하는 행사에 가깝다. 영재에겐 새로운 가족을 옛 가족으로부터 ‘승인’받아야 한다는 의무감이나 강박이 없다. 이미 ‘가족’은 재편되었다. 다만 ‘부모’와 관계 자체를 단절하는 대신 환대하여 받아들일 뿐이다. 그러니 자신들이 “이제 영원히 아들을 잃었음”을 깨닫는 중이라는 재현의 상념은 정확한 것이며, 재현이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눈부시다는 듯”(220면) 눈을 움찔거렸다는 묘사는 그가 영재가 자리 잡은 새로운 공동체의 가치를 모르지는 않음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영재의 새 보금자리가 ‘축사’로 호명되는 제목은 재현 부부가 최종적으로는 그 새로운 공동체를 받아들이지 못한 정황을 가리킨다. 그들은 가족관계의 전통과 규범에 어긋나는 낯선 가족 형상이 불러일으키는 ‘이름 붙일 수 없음’의 공포 안에 있고, 외부를 짐승들의 ‘축사’로 격하하는 방식으로 그 공포를 불식하고 붕괴된 혈연가족 공동체의 안온한 울타리를 재건하고자 하는 셈이다. 즉 여기서 재현되는 재현 부부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입장이 보여주는 바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인식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나아가 그것에 맞서 더더욱 단단한 수세를 구축하려는 움직임이다. 오히려 이 소설의 아쉬움은 진전된 인식에 대한 역풍으로서 재현 부부의 입장에 집중한 나머지, 영재가 몸담은 공동체의 실제적인 세부를 생략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관계를 이해할 단초를 재현 부부의 짐작과 통념에 기댄 추측에서 찾을 수밖에 없어 실제로 그들이 생활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습은 보기 어렵다는 점 말이다. 물론 그건 영재와 공동체에게 환대의 ‘주체’의 자리를 할애하고 있기에 발생하는 일이기도 하겠다.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하며 정리하자면, 우선 기존질서의 불합리에 반한 대안공간의 고안에 도달한데다 그 자신이 거절했던 기존질서에 환대의 손까지 내미는 영재 쪽의 낙관적인 힘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반대편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낯선 변화 앞에서 ‘인정의 주체’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된 기존질서가 당혹감 속에 자기보호의 담장을 더욱 공고히 둘러치고 있다. 이는 기존질서가 환대의 제스처를 취할 준비가 되어가기는커녕, 오히려 환대를 보내오는 새로운 주체들을 더욱더 강하게 거부함으로써 악화되어가는 상황을 나타낸다. 이는 실제로 보수성이 두드러지는 공적 영역이나 일부 종교계의 반응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들의 낯섦을 받아들이기 위해 낡은 규범을 버리는 대신, 익숙해서 아늑한 규범을 지키기 위해 차라리 아들을 잃는 쪽을 택하는 재현 부부의 모습. 역시 동일한 거센 역풍에 속하지만, 실은 더 나쁜 상황에 대한 경고 신호를 발산하고 있다. 바로 국가·민족·종교라는 커다란 범주의 ‘먼 외부’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개개인의 바로 곁에 밀착된 채 세워진 ‘구분’의 울타리—‘차이’를 존중하는 대신 ‘격리’시키려는 울타리에 대해서 말이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발걸음에 제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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