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페미니즘으로 문학을 읽는다는 것

 

다시 새로운 부작용의 시간이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의 시적 경로들

 

 

김수이 金壽伊

문학평론가. 평론집 『풍경 속의 빈 곳』 『서정은 진화한다』 『쓸 수 있거나 쓸 수 없는』 등이 있음. whitesnow1@hanmail.net

 

 

1. 미래로부터 시작하기

 

모든 국가에서 남성과 여성의 임금이 동일해지는 시점은 언제일까? 미래학자들이 예측하기로는 2065년이다. 남성과 여성이 단지 동일임금이라는 경제적 평등을 성취하기까지,1 인류는 자신보다 우월한 지능체를 창조해 진화의 역사를 새로 쓰고, 외계 행성으로 삶의 영토를 넓히며, 탄생과 죽음의 생물학적 결정조건들을 타파할 것이다.2 시인이 상상하기로는 이런 디테일. “당신 역시 공산품 로봇에 지나지 않아. (…) 인간이었을 때는 결코 알 수 없던 삶의 환희들이 밀려왔다. (…) 나는 새로운 세대를 위한 텐션 페니스사의 이중 분리 음경을 장착한 채 재생산됐다. 그리고 어딘가에 시리우스를 찾아 벌써 이곳, 13행성까지 오게 되었다.”3

인간과 삶의 전면 개조보다 후행하는 성평등의 미래는 기묘한 의문을 낳는다. 인간의 자연적 한계를 초월하는 것보다 성평등이 더 어려운 과업인가? 인공지능을 뇌에 심고 인공장기를 갈아 끼우며 사이보그화하는 인간, 성정체성과 성애의 다양화는 물론 로봇을 성애의 파트너나 삶의 동반자로 삼는 미래의 인간(?)이 여전히 과거의 젠더 트러블에 시달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상상적 질문의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현재 인류에게 젠더 문제가 그만큼 후순위에 있다는 것. ‘인간’의 경계가 재구성되고, 인류의 새로운 시간이 온 후에도 젠더의 관성—젠더가 본질적인 것이 아닌 구성적인 것이라는 증거로서—은 쉽게 약화되지 않는다는 것. 물론 미래학자들의 예측이 맞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런데 예측은 동의와 믿음에 의해 실현되는 수행성을 갖는다. 젠더의 다른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곧 현재를 바꾸는 일이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식으로 말하면, “미묘하고도 정치적인 방식으로 강제되는 수행성의 결과로서”4 수동적 행위인 젠더를, “성의 이분법이 부과한 이원적 한계를 뛰어넘어 증식”5하는 체제변혁의 능동적 행위로 전환해야 한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인공지능이 젠더 불평등을 데이터화해 인간에게 피드백하고,6 페이스북은 총 60개의 성별 옵션을 제공해 젠더프리(gender free), 젠더리스(genderless)의 세상을 열고 있다(페이스북의 한국 옵션은 남성, 여성, 사용자지정 등 총 세가지다). 올해 미국은 세계 최초로 여성 인공 생식기관인 ‘이바타’(Evatar, Eve+avatar)를 개발했는데 남성 인공 생식기관도 곧 개발할 예정에 있다.7

그리고 지금 여기, 한국사회에서 전개되는 사건들은 복합적으로 뒤얽혀 질적 변화의 특이점을 형성 중이다. 문학의 입장에서는 텍스트의 안과 밖을 실시간으로 종횡무진하며 활로를 찾아야 하는 유례없는 시간이 펼쳐지고 있다.

 

 

2. 경유해야 하는 현재들 1: ‘탈선’

 

‘다른 미래, 다른 삶, 다른 문학’에 대한 상상과 실천은 근래 한국사회와 문학을 강타한 중대 의제다. 이 의제에 불을 붙인 것은 조직적인 사회운동이나 문학작품의 탁월한 성취가 아니다. 세월호, 촛불과 박근혜 탄핵, 문단 내 성폭력 등 현실의 갑작스럽고 압도적인 사건들이었다. 의제는 복수의 발언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표현되고 확산되었다. 푸꼬(M. Foucault)가 ‘비판’이라고 부르는, “이런 식으로, 이런 대가를 치르면서 통치받지 않으려는 의지”와 “자발적 불복종의 기술, 숙고된 불복종의 기술”8이 새로운 문화를 빚으며 속속 개발되었다.

푸꼬를 좀더 따라가면, ‘통치’9에 반해 진실을 문제삼는 ‘비판’은 통치술에 대립하는 ‘대항품행’을 창출한다. 전세계가 인정했듯이 촛불집회는 시민의 품행, 민주주의의 품행을 자유로운 개인들이 열린 공동체로서 차원 높게 개발한 사건이었다. 근대적 국가이성에 대립해 발전해온 대항품행에는 세 형식이 있는데, 그 내용은 최근 한국사회의 운동성에 대한 설명으로도 읽을 수 있다. 첫째, 시민사회가 국가보다 우위에 있다는 종말론. 즉 국가의 무제한적 통치성을 정지시키는 시민사회의 출현 및 국가권력의 회수/흡수. 둘째, 국가와의 복종적 연결고리를 모두 자르고 국가에 대항하는 권리로서 “혁명 자체의 권리”. 셋째, 사회의 진리, 국가의 진리, 국가이성 등의 보유자는 국가가 아닌 국민 전체여야 한다는 사고방식.10 용기있는 실천의 두가지 예를 보자.

 

우리가 원하는 것은 어쭙잖은 해명이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우리 국민, 주권자들은 이를 알아야 할 이유가 있고, 이를 알아야 할 권리 또한 있습니다. (…) 여러분 전 두렵습니다. (…) 이것이 마지막이 아닌 시작입니다.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 꼭 함께 손을 잡고 그 끝을 봅시다.

—대구 송현여고 2학년 조성해의 촛불집회 자유발언(2016.11.5) 중에서

 

그리고 깨달았다. 문단과 문인을 둘러싼 형체 없는 환상과, 그 관념을 기꺼이 소비해왔던 나를. 그 관념 속에 나의 목소리는 소거되어 있었다는 것을. 그들의 말에는, 기성의 가치를 기성의 방식으로 탈출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개인은 기성에 대한 작용도 반작용도 아니다. 더 이상 우리는 우리가 써내려갈 문학의 이름을, 환경에 종속되고 부여받는 성질로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탈선 「게르니카를 회고하며」(『문학과사회』 2016년 겨울호 150면)

 

각기 박근혜게이트와 문단 내 성폭력 사건에 대한 두 발언은 문제의식과 태도에서 공통점이 뚜렷하다. 현실의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