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다시 5·18을 묻는다

 

 

노영기 魯永基

조선대 기초교육대학 자유전공학부 교수. 공저 『1960년대 한국의 근대화와 지식인』 『전쟁과 재현』 『한국현대사 1』 등이 있음.

noeyoungi@gmail.com

 

 

1. 왜, 다시, 5·18인가?

 

올해는 5·18항쟁1이 일어난 지 40년이 되는 해이다. 강산이 네번이나 바뀔 정도로 많은 시간이 흘렀건만 5·18항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2018년 국회에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을 통과시켰고, 2019년 12월에서야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첫발을 내디뎠다. 그동안 5·18이 여러차례 조사됐으나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까닭에 나라가 팔을 걷어붙였다. 과거에 폭력을 자행하던 국가가 이제는 진상규명 활동의 주역이 됐다. 이러한 모순된 현상이 5·18과 한국 민주주의의 어제와 오늘을 반영한다. 40년 동안 풀리지 않은 과제들이 켜켜이 쌓여 있기 때문이며 그 과제들은 과거만이 아닌 현재도 옥죄고 있다.

어쩌면 이미 ‘역사화’됐어야 할 사건이지만, 제때 청산되지 못한 과거는 과거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도 왜곡한다. 5·18에 대한 가당찮은 폄훼와 왜곡이 ‘진실’처럼 둔갑해 인터넷을 떠돌며, 사실을 부정하는 책들이 버젓이 도서관과 서점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의도와 정치적 목적은 뚜렷하다. 5·18뿐 아니라 한국의 민주주의를,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가로막으려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평화, 통일을 위협하는 세력들은 5·18을 폄하, 왜곡하는 세력들과 맞닿아 있다.

5·18항쟁을 겪은 뒤 이 땅의 사람들은 다시 민주주의와 인권을 입에 올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뭐든지/진짜가 되려거든/목숨을 걸”(이광웅 시 「목숨을 걸고」)어야 한다는 점을 각인했다. 그러나 끌려간 사람들, 숨죽인 사람들, 부끄러웠던 사람들은 오월의 영령과 그 참혹했던 열흘의 기억을 지우지 않았다. 이내 항쟁의 조각을 이어 맞추며 저항의 불씨를 되살려냈다. 그리고 1980년 오월 영령들이 그랬던 것처럼 불법과 폭력으로 국민들의 핏방울을 딛고 권력을 움켜쥔 전두환정권에 맞서 나갔다. 공권력에 가로막힌 망월동을 찾아 산을 넘고 물을 건넜다. 총 대신 돌과 화염병을 들고 학살정권에 저항했다. 그 저항의 불씨들이 모여 1987년 6월항쟁으로 폭발했다. 더이상 빛고을은 ‘육지 속의 섬’처럼 외롭지 않았다. 비록 군부정권을 끝내지 못했으나 5·18항쟁 때 못다 이룬 외침을 전국 각지에서 되살려낸 것이다.

40년이 지나는 동안 5·18도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아직 제 이름을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정부가 5월 18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고 ‘국립묘지’로 승격시킨 망월동에서 해마다 기념식을 열고 있다. 2011년 유네스코(UNESCO)는 민주주의와 인권 발전에 기여한 5·18의 세계사적 가치를 인정하여 관련 기록물을 인류가 보존·전승해야 할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했다.2 5·18이 그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인정받기까지는 오월 영령들을 비롯해 그들의 못다 이룬 뜻을 잇고자 했던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투쟁의 결과물이듯이, 5·18이 오늘에 이른 것도 국민들의 관심과 투쟁, 그리고 희생 덕분이다.

그동안 5·18의 진상을 규명하려는 몇차례의 시도가 있었다. 제13대 국회는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1988~89)를 구성하고 청문회를 열었는데, 여기에서 이전까지 ‘폭동’ ‘내란’으로 지칭됐던 5·18의 진상이 일부 드러났다. 뒤이어 1997년 국민들의 관심과 투쟁 속에서 문민정부는 특별법을 제정해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의 인사들을 처벌했다.3 비록 얼마 지나지 않아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 신군부 세력이 석방됐으나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나름의 역사적 의미를 남겼다. ‘성공한 쿠데타’일지라도 처벌할 수 있으며, 전직 대통령도 잘못이 있으면 역사적 평가와 함께 사법적 심판도 받아야 한다는 ‘과거사 청산’의 선례를 남긴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반성 없는 섣부른 ‘용서와 화해’가 ‘역사 왜곡’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점도 일깨워줬다.4

과연 1980년 5월 18일 이후 광주에서는 어떤 사건이 일어났으며, 오늘과 어떻게 연관될까? 왜 다시 5·18이며, 40년이 흐른 2020년에 5·18은 어떻게 이해될까?

 

 

2. 5·18항쟁의 재구성

 

1979년 10월 26일 ‘그때 그 사람’이 부하의 총격에 사망했다. 철옹성 같던 유신독재가 절대자의 죽음으로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국민들은 독재자가 사라졌으니 곧 민주주의가 실현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유신독재가 남긴 유산은 의외로 견고했다. 정치군인들이 호시탐탐 권력을 엿보았으며, 그들의 손에는 각종 정보와 물리력이 있었다. 그해 12월 12일 신군부는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12·12군사반란을 성공하여 군 지휘권을 장악한 그들은 정권 탈취에 박차를 가했다. 1980년 2월 중순경부터 후방의 충정부대는 신학기의 학생시위에 대비한다며 ‘충정훈련’(폭동진압훈련)을 실시했다. 5월 초순 신군부는 난데없이 ‘북괴남침설’을 유포시켰다. 5월 17일 전군 주요지휘관 회의와 단 8분간의 국무회의를 거쳐 정부와 군은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라고 공포했다. 정치적 목적으로 군을 동원하는 동시에 군이 민간을 전면통제하는 조치였다. 그보다 앞서 김대중을 비롯한 야권 인사와 학생운동권 지휘부 등에 대한 예비검속이 실시됐다. 5월 20일 개원 예정이던 국회는 탱크와 무장한 계엄군에 가로막혀 문을 열 수 없었다. 계엄 포고에 따라 언론은 군에 의해 검열·통제되고, 옥내외 집회와 정치활동이 전면 금지됐다. 민주주의와 인권은 애초부터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오직 ‘국가안보’만을 앞세운 군이 국민들의 일상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모든 걸 장악했다.

5월 18일 새벽, 7공수여단이 점거하던 전북대에서는 학생 이세종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계엄령 아래에서 민군관계가 어떻게 정립되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7공수여단은 그 사인을 ‘좌상박부 골절 및 우측 두개골 함몰 골절’로 인한 즉사이며, “변사자는 이 포위망을 탈출할 목적으로 지상 13m 동 회관(학생회관—인용자) 옥상 북편 전등주에 매달려 은신하려다 힘이 빠져 변사한 것”이며, “첩보 즉시 전주지검 안상수 검사가 현장에 입장, 지휘하여 진상규명 후 사체를 전북의대 부속병원 시체실에 안치 중”인 것으로 보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