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다음에는 무엇이?’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의 창조적 작업에 대하여

 

 

강미숙 姜美淑

인제대 리버럴아츠교육학부 교수. 주요 논문 「『연애하는 여인들』에 나타난 자기애적 주체」 「Lawrence and Lacan on “The Transformation of Hamlet”」, 저서 『D. H. 로런스와 창조성의 문학』, 역서 『D. H. 로런스의 현대문명관』(공역) 등이 있음.

langkang@inje.ac.kr

 

 

1. 개벽사상과 ‘근대의 이중과제’

 

오래 기다려온 백낙청의 로런스 연구서 제목이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임을 처음 들었을 때, 그 의미를 한참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D. H. 로런스(D. H. Lawrence, 1885~1930)는 영어권에서도 작품과 사상 양면에서 오해와 오독이 적잖은 독특한 작가인 터에, 그런 “로런스와 한반도 후천개벽사상의 만남 가능성을 탐색하”1겠다는 것은 너무 큰 기획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저자가 로런스를 ‘서양의 개벽사상가’로 꼭 집어 호명한 것이 사반세기 전인 1996년이었고,2 그 무렵 명시화한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론이 후천개벽사상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과 동일한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이 제목이 사후적이거나 즉흥적인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단도직입하자면, 백낙청에게 개벽사상이란 복고가 아닌 변혁이자 창신(創新)으로서만 유의미한 것이고, 그것은 ‘다음에는 무엇이’3 서구문명과 그 사상의 막다른 지경을 치고 나갈 수 있을지 온몸으로 모색한 로런스의 물음과 맞닿아 있다 하겠다.

백낙청이 로런스 연구의 핵심어로 ‘개벽사상’을 불러내는 것은 로런스 문학의 의의뿐 아니라 현재 한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이루고자 하는 문명대전환의 움직임을 그 이름으로써 적실히 파악하기 위함이다. 한반도 개벽사상이 근대정신의 핵심인 동시에 그 극복의 차원을 내장하고 있다는 이 관점은 현 문명, 구체적으로 ‘근대를 어떻게 이해하고 동시에 극복할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수렴된다.

근대사와 개벽사상에 과문한 평자는 그 내재적 의미를 체감하기 위한 방편으로 역사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았다.4 그것은 동학(東學)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1824~64)와 일본 메이지유신의 정신적 지주인 요시다 쇼오인(吉田松陰, 1830~59)의 사상이 갈라지는 지점이다. 동시대인인 두 사람은 ‘서세동점기(西勢東漸期)’ 동아시아에 밀어닥친 과제와 맞대결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과제를 보는 관점도 도전에 대응하며 마침내 도달한 사상도 엄청나게 달랐다는 데 있다.5 잘 알려져 있듯이, 쇼오인의 ‘존황양이(尊皇攘夷)’론은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함으로써 일본 메이지유신의 기반이 되었지만, 그의 사상에서 탈아입구(脫亞入歐)로 귀결된 근대화주의를 넘는 비전은 찾기 힘들다. 쇼오인을 추동한 서구열강 ‘오랑캐’에 대한 적개심은 기실 그들의 물질문명을 향한 비판 없는 선망의 이면이었기에, 여기서 태동한 ‘대동아공영권’ 논리 역시 동아시아의 진정한 협력체 구상이 아닌 제국주의적 침략노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강자인 ‘천황’을 향한 수직적 위계에의 열망이 낳은 타협적이고 끈질긴 복종정신에는 개벽사상이 품은 ‘민(民)’과 ‘천(天)’의 원융(圓融)한 관계에의 사유가 들어설 여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반면, 동학은 왕정체제의 근원적인 변혁을 지향하고 뿌리 깊은 신분적·성적 차별의 혁파를 과감히 수행했다. 그러면서도 수운의 ‘시천주(侍天主)’와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 1827~1898)의 ‘인시천(人是天)’ 사상 등에서 드러나듯, 개벽사상에서 각 ‘사람’〔人〕은 언제나 ‘하늘’〔天〕과 본원적으로 연결된 존재로 사유된다. 여기서 사람은 미지의 ‘하늘’—천주, 불성(佛性), 인심(人心), 일원(一圓) 등으로도 일컬어지는—의 진리를 ‘드러내고 이룩하는’6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서구 휴머니즘의 틀로써는 동학의 ‘인간’을 담아내지 못함이 물론이거니와, 동학이 추구하는 ‘대동(大同)세상’ 역시 평등한 개인들끼리의 합의에 근거한 집합체라는 의미의 서구식 근대민주주의와는 원천적으로 다른 발상에서 출발한다.

개벽에의 요청은 시대인식의 문제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백낙청이 소태산 박중빈(少太山 朴重彬, 1891~1943)의 사상에서 특별히 주목하는 바도 변화하는 시대의 핵심을 통찰한 그의 현재적 인식이다.7 소태산은 당시 시국을 살펴보고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원불교의 개교표어를 주창한다. ‘물질개벽’이 이미 일어난 사건이며, ‘개벽’이라 부를 만큼 현재에도 전면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이런 급의 진단이란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식민지시대 말기에 국한되는 미시적인 시각이 아니다. 이 표어는 바로 “현 문명에 대한 인식, 이것이 바로 물질이 개벽하는 시대라는 인식”8인바, 구체적으로는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근대라는 전지구적 관점을 포괄한 것이다.

이 개교표어에 명시된 ‘물질’과 ‘정신’이 서구철학의 일원론 및 이원론적 용법과 어떻게 다른지 간략히 짚고자 한다. 이는 흔히 말하듯 물질문명이 발달하면서 허약해진 정신문명을 보강해야 한다는 식의 절충적 관점이 아니며, 이 시기에 일어난 물질의 발달도 단순히 과학의 진보나 근대화와 같은 산술적 ‘가치’(value) 수준에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개벽사상가』에서 드러나는 저자의 지론이다(60~62면). 여기에는 창조적인 문명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물질개벽’의 의미를 거듭 묻고 서구문명의 성취 및 한계와 현실적으로 대결해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정신개벽’이 중요해지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정신’은 흔히 ‘mind’로 번역되며, 이 영어 단어는 그것의 여러 의미 가운데 특히 ‘도구적·두뇌적 지성’의 뜻으로 자주 사용된다. 반면, 우리말의 원래 어법에서 ‘정신(精神)’은 ‘정신개벽’(a Great Opening of spirit)의 역어에서 보듯이 판다른 용어이다. 사실 ‘정신’은 서구의 육체/정신 이분법 범주로는 포착하기 불가능하며, 불교의 유무를 넘어선 마음자리는 물론 유학의 심학(心學)과 이기론(理氣論) 등에서도 논쟁의 여지는 있었으나 항상 핵심적 위치를 차지한 개념이었다. 이런 차원의 ‘정신’에 대한 직관과 상상력의 부재야말로 형이상학적 사고의 맹점일 텐데, 로런스가 도구로서의 정신(mind)과 진정한 사유(thought)의 분별을 그토록 강조한 점에서 그의 자생적 개벽사상가로서 면모를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2. 변하지 않은 것과 변한 것들

 

로런스 문학이 백낙청의 오랜 화두요, 사상적 탐구의 ‘베이스캠프’였다는 발견은 『개벽사상가』를 읽은 독자들의 공통된 소감이다.9 또한, 작년에 정식 출간된 저자의 하바드대 박사학위논문(1972)의 영문판 서문을 쓴 영국의 비평가 마이클 벨(Michael Bell)도 반세기 넘는 로런스 비평사의 변전을 겪고도 “이 저서의 확실한 논지는 업데이트가 전혀 필요치 않다는 게 놀랍다”10며 그 현재적 시효성에 괄목한다.

이러한 반응들은 백낙청의 논의가 로런스 문학세계의 어떤 궁극적 지반에 도달했고, 그것이 이 실천적 비평가에게 시류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내구력을 제공했음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 언제나 당대의 비평가로서 지금 여기, 한반도에서의 삶을 우선시한 그에게 로런스는 고정된 정전이 아닌 나날이 새롭게 발견해나갈 살아 있는 텍스트이기도 했다. 이 방대하되 유연한 작업은 담론으로서도 탁월한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언제나 작품 읽기를 중심에 두어왔다는 점에서 더욱 유의미해 보인다. 이 절에서는 『개벽사상가』 제1부의 작품론을 ‘being’의 역사성, ‘기술시대’의 과제, ‘후천개벽’의 체험과 실험이라는 열쇳말로 조명함으로써 백낙청의 사유에서 변함없이 추구된 정신은 무엇이며 그 과정에서 이루어진 변모는 또 어떤 것들인지 살피고자 한다. 『개벽사상가』 제2부의 논의들은 다음 절에서 다룰 「「죽음의 배」: 동서의 만남을 향하여」(제11장) 외에는 생략할 수밖에 없으나 작품론 속에 스며 있기를 희망한다.

 

(1) ‘being’의 역사성

제1장 「『무지개』와 근대의 이중과제」는 영국 농촌마을의 3대에 걸친 결혼과 사랑 이야기를 통해 근대세계의 전개상을 포착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창조적인 역사는 어떤 것일지 면밀히 추적한다. 저자는 전통주의와 근대주의의 대비, 산업문명에 대한 찬반, 교양소설적 시각 등으로는 이 소설의 핵심에 이르지 못한다고 지적하면서 로런스 특유의 ‘being’의 사유에서 출발한다. 로런스의 ‘being’은 현상세계의 이분법에 근거한 서구 형이상학 전통에서는 낯선 존재론이자 진리관으로서, 백낙청의 로런스론 및 문학관의 관건에 해당한다. ‘being’은 존재하는 것, 존재하는 사람으로 이해되기 십상이지만, 그것은 실체를 상정하는 ‘존재자’가 아닌, 이를테면 ‘be’의 동명사형으로서 살아 있고 변화하는 생명인 ‘존재’를 뜻한다. 즉 “분명히 무(無)는 아니지만 종래의 유(有) 위주의 형이상학적 사유가 진입하지 못했던 경지”(33면)인 것이다.11 ‘진공묘유(眞空妙有)’로도 표현될 수 있을 이런 의미의 ‘being’의 사유는 협의의 종교나 철학의 추상적 이념이 아닌 ‘살아 있는 인간’을 담아내는 예술언어를 통해 가능한 것일 뿐 아니라, 인간과 우주, 그리고 예술과 진리에 걸친 로런스의 작가적 사유 전반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로런스는 서구철학 전통의 이원론과 일원론뿐 아니라 변증법적 합일과도 다른 ‘being’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여러 표현들을 동원한다. ‘being’이란 “자신의 완전한 달성”(STH 12면)이며 ‘성부/성자’ ‘법칙/사랑’ ‘여성적인 것/남성적인 것’〔陰/陽〕 ‘자연상태로 주어진 자신이 되는 것/타자를 향한 사랑과 앎을 추구하는 상태’ 등과 같이 상반되는 두 극(極)의 원리가 “‘성령’에 의해 조화와 합일을 이루는 사건”이자 (순간적인) 상태이다(29~30면). 여기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하이데거(M. Heidegger)의 ‘das Sein’이 그렇듯이 ‘being’ 자체가 지닌 ‘역사성’이다. 백낙청은 일찍부터 ‘being’의 역사성에 주목하여 문학비평을 수행해왔고, 최근에는 “be라는 술부의 실제 의미가 역사적으로 달라진다고 하는 것이 원불교나 수운 선생이 말하는 시운(時運)에 대한 인식하고 통하는 면”12이라고 한걸음 더 구체화하기도 한다.

『개벽사상가』 제1장은 ‘being의 역사’로서 『무지개』(The Rainbow, 1915)가 어떤 점에서 ‘근대의 이중과제’를 예시하는 ‘고전적 서사’인지를 추적한다. 그 가운데 기존 비평에서 간과되던 『무지개』의 ‘서곡’(prelude)과 제3세대인 어슐라의 연애사건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논의가 특히 흥미롭다. 종래 비평은 소설 첫머리의 ‘서곡’을 산업화 이전의 원형적인 삶의 패턴을 그린 것으로 해석하곤 했지만, 저자는 그것을 산업화의 진전과정에서 일어나는 소설의 본이야기와 본질적으로 연결된 것으로 자리매긴다(67면). ‘서곡’에서 브랭귄 집안 남자들은 자연 속의 본능적 삶에 자족하는 반면, 더 나은 삶, 더 의식적이고 활동적인 삶을 갈구하는 쪽은 여자들이다. 대도시도 아닌 영국 농촌의 평범한 남녀 이야기가 어떤 의미에서 전형적인 근대의 이야기가 되는가? 더욱이 역사적 변혁의 욕구가 여자 쪽에 편중된 것을 마치 보편적 현상이 된 듯 제시하는 구도는 어떻게 볼 것인가? 이런 물음들을 안고 있는 ‘서곡’에 대해 백낙청은 기존의 성역할 혹은 ‘유사 성별적 속성’의 역전이라는 이런 ‘불균형’이 ‘근대’의 특징적 변화이자 그 변화의 핵심임을 통찰한 것이 이 소설의 강점이라고 강조한다. 그렇지만 저자는 이런 역전을 자기극복의 모험과 관계의 재조정을 통해 넘어서야 할 과제로서 “작가가 생각하는 규범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어딘가 불균형을 간직한 특수한 역사현상”(70면, 강조는 인용자)으로 파악한다. 평자는 근대가 극복되어 마땅한 특수한 시기라는 이 발언에 담긴 전망에 동의하면서도, 여기서 그 과제가 과연 ‘규범적인 것’으로 설정될 수 있을지는 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로런스는 「도덕과 소설」에서 “소설의 도덕이란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균형”13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양극의 ‘균형’의 성취는 진리에 다름 아니지만, 그것은 외생적 개입이 아닌, 언제나 변하며 흔들리는 불안정의 과정을 통해 이룩될 (순간적) 균형이기에 ‘규범(規範)’보다는 더 근본적이고 차원 높은 ‘도덕(道德)’에 값하는 성취일 터이기 때문이다.14

소설의 본이야기에서 제3세대 여성인 어슐라야말로 근대적 개인으로서 시대가 제기하는 과제와 정면으로 대결한다. 제2세대 부부의 결혼생활, 특히 윌 브랭귄의 삶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근대의 본질적 한계라 할 ‘감수성의 분열’ 현장을 극적으로 포착하지만, 그것이 암묵적이고 과도기적 변화인 데 비해 어슐라의 성장은 근대 여성으로서 개인적 자의식과 허위의식의 문제를 전면화한다. 백낙청은 특히 그녀와 스크리벤스키의 연애관계가 앞선 세대들의 결혼과 달라진 점을 밝히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그들의 관계는 처음부터 “근대적인 자아와 자아의 대결의 성격을”(77면) 띠며, 이 치열한 대결과정 끝에 어슐라는 결국 자기이해에 도달하고 극복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반면 스크리벤스키는 창조적 남성으로서 완전히 파산하고 그녀로부터 버림받는다는 것이다.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라는 테제와 관련해서 평자는 특히 스크리벤스키라는 인물의 전형성이 시사적이라 생각한다. 그는 외견상 그럴듯한 매력의 소유자이지만 어슐라의 내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다. 로런스는 그가 어슐라의 창조적 모험에 동참하지 않음으로써 결국 “본질적 역사창조의 무대에서는 탈락했으나 바로 그런 연유로 실제 역사의 무대에서는 더없이 정력적인 활동을 벌이며 창궐하는 무수한 현대의 인간상임”(102면)을 드러내 보인다. 그는 현실에서는 공병대 장교로서 거리낌 없이 인도로 파견되는 식민주의자이고, 존재론적으로는 ‘행복을 발명했다’며 즐거워하면서도 내적 공허를 견디지 못하는 니체(F. W. Nietzsche)적 ‘말인(末人)’으로서 “세계사적 전형성”(같은 면)을 입증하는데, 여러 세부적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연애하는 여인들』(Women in Love, 1920)의 제럴드 크라이치를 예견케 한다. 그가 근대주의의 필연적 이면인 식민주의의 선봉인 동시에 자신의 책무인 ‘being’의 실현을 망각한 인물이라는 사실은 개인으로서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 근대에 ‘적응’하지도 근대를 ‘극복’하지도 못함을 방증한다. 그런 점에서 ‘근대의 이중과제’란 “‘두개의 동시적 과제들’이 아닌 ‘양면적 성격을 지닌 단일과제’”15라는 사실이 다시 한번 확인된다.

근대적 개인으로 성장하는 어슐라의 여정은 이전 세대까지 당연시되던 ‘여성성’ 자체에 대한 물음과 더불어 시작된다. 그 과정에서 생성된 그녀의 ‘허위의식’은 자신과 타자에 대한 기만이자 공격성으로도 나타나지만, 그녀는—그 허위의식의 생성 속에 불가분하게 얽혀든 것이기도 한—창조적 의식을 향해 분투한다. 작중인물의 자기인식과 실제의 심화되는 편차만큼이나 복잡해지는 소설언어는 ‘이중과제’를 수행하며 맞닥트리는 어슐라의 고뇌의 표현이기도 한데, 이는 문제의 핵심으로 곧바로 돌진한다는 면에서 여러모로 대조적인 예술인 『연애하는 여인들』의 전사(前史)를 속속들이 형상화하는 장점이 있다. 나아가 어슐라의 고투를 담아내는 로런스의 다양한 문체—사실주의적 내러티브에 기반하면서도 심층적 묘사 및 인물과 화자의 복합적인 관점과 언어를 융합해내는—에 대한 이 장의 예리한 분석은 작품의 심화된 이해와 더불어 리얼리즘론의 실제를 목격하게 한다.

 

(2) ‘기술시대’의 과제

『개벽사상가』 1부는 총 다섯편의 소설비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연애하는 여인들』은 그 가운데 두장(章)을 차지할 만큼 비중있게 다루어진다. 작품 자체가 어려운 만큼 작품이 제기하는 핵심에 다가가는 실마리를 찾는 일이 중요한데, 저자는 ‘기술의 본질’과 ‘기술시대’의 과제를 묻는 데서 출발한다. 사실 그의 박사학위논문은 국내외 로런스 비평사를 통틀어 하이데거를 도입해 논한 최초의 사례로 주목받기도 하지만, 그 사실보다 하이데거가 제기한 ‘기술의 본질’, ‘기술시대의 성격’에 대한 물음이 로런스 문학의 의의를 실답게 밝힐 수 있다는 데 집중한 점이 더욱 유의미하다.

이러한 작업의 의의는 그간 영미권 영문학계의 로런스 연구들을 돌아볼 때 한결 두드러진다. 로런스 당대의 우호적인 반응들이 그를 낭만적이고 직관적인 ‘천재’ 정도로 과소평가한 것이었다면, 1970년대 이래의—페미니즘 비평이나 정치비평 등—이데올로기에 기반한 비평 흐름에서 그는 기피 작가를 넘어 공공연한 타도의 대상이기도 했다. 지금도 쏟아져 나오는 유사한 해석들은 로런스 문학과 서구적 사유방식 간의 간극을 말해주는데, 마이클 벨 역시 이러한 왜곡을 불식하기 위해 하이데거를 동원해 로런스 사상의 ‘철학적 비전’을 보강하고자 한다.16 백낙청의 접근법은 이와도 다른데, 그는 로런스가 전통적 서양철학 자체의 극복을 지향한 만큼 그 작품세계에 제대로 다가서려면 ‘철학적 해석’의 보강으로는 불충분하며, 이는 종교/철학, 문학/철학의 분화를 넘어선 차원의 문제임을 ‘being’이나 ‘기술의 본질’ 등을 통해 밝히고자 한다.17 나아가 로런스 “작품의 서사를 일관되게 읽어내”고자 하는 저자의 자세 또한 최근의 미학적·이론적 비평 추세와 뚜렷한 차이점이다(113~16면). 이는 리얼리즘 문학의 문제의식이기도 한데, 그런 점에서 제3장인 「『연애하는 여인들』의 전형성 재론」을 제2장 「『연애하는 여인들』과 기술시대」에 이어 함께 숙독할 때 기술시대의 문제가 어떤 의미에서 리얼리즘 문학의 문제로서 제기될 수밖에 없는지도 실감하게 된다.

제2장은 우선 ‘기술시대’ 혹은 ‘기술문명’에 대한 로런스의 입장을 긍정/부정으로 파악하려는 시도 자체가 잘못된 접근법임을 전제한다. 그러한 접근법으로는 과학기술의 위력이 전지구를 지배하는 이 시대에—철저히 망각되거나 ‘은폐’되는—기술의 본질에 대한 사유를 촉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백낙청이 하이데거를 끌어들이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인데, 하이데거에 따르면 “‘기술의 본질’이라는 것이 기술 그 자체가 아니요 모든 기술적 장치·작용의 총화와도 구별되는 그 무엇”(112면)인바, “왜냐하면 기술의 본질은 결코 인간적인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에게 있어 “기술의 본질은 무엇보다도 기술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기술의 본질은 처음부터,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사유하게끔 하는 그 무엇에 자리하고 있다.”(113면에서 재인용)18

그런데 근대 과학기술이 역사적으로 새로운 점은 “이제 자연에 도전하여 (현존하지 않던 것을 현존하도록—인용자) 강제적으로 끌어내는(herausfordern) 독특한 방식”(126면)에 있다. 근대철학에서 자연이 ‘주체’에 의한 인식과 작용의 ‘대상’ 내지 ‘객체’라면, 과학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이제는 대상조차 대상으로서의 독자성을 상실하고 모든 것이 수리적 계산과 기술적 작동의 자료로 정리, 조직된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 이러한 기술의 역사적 전개양상은 평자가 보기에 소태산이 제기한 ‘물질개벽’에 방불한 현상이다. 기술이 진리를 드러내고 이룩하는 전례 없는 이 기계적인 방식이야말로—최근 가상현실 영역의 엄청난 확대가 불러일으킬 변화를 포함하여—“현대인 특유의 시대적 운명이자 기술시대 인간에게 닥치는 위험의 출처”(126~27면)인 것이다. 백낙청이 다른 글에서 현 문명을 ‘물질이 열리고 깨지면서 더불어 정신도 깨지는 시대’19로 진단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물질개벽으로 인해 기왕에 ‘진리’로 일컬어지던 것과 정신적 가치들까지 시험받고 해체되는 단계로 진입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술의 본질’이 “사유하게끔 하는 그 무엇”에 있다는 말은 기술시대의 위험에 대응할 수 있는, 물질개벽에 상응하는 ‘정신개벽’—유무(有無)에 집착하는 서구철학과는 다른 지혜이자 도덕으로서의 정신—에 대한 절실한 요청에 다름 아니다. 기술시대의 성격에 대한 오랜 연마 끝에 백낙청은 『개벽사상가』에 이르러 자기 논지에 더욱 확실한 근거를 갖게 된다.

물론 이런 견해가 전적인 동의를 얻는 것은 아니다. 『개벽사상가』에 대한 서평 좌담20을 위해 모인 외국문학 연구자들은 『연애하는 여인들』에서 인상적인 인물로 현 문명의 향방에 의문을 던지며 새 길을 모색하는 어슐라와 버킨보다 이 문명의 진화(進化)를 추동하고 그 필연적 종말을 끝까지 지켜보려는 제럴드와 구드런 커플, 특히 현 단계 자본주의의 원리인 기술주의를 체현하는 인물인 제럴드를 꼽는다. 『개벽사상가』 2, 3장의 예리한 논의를 통해 드러나듯이 제럴드, 구드런, 뢰르케와 같은 작중인물들은 각자의 뚜렷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큰 파괴적인 흐름을 형성하며, 그 형상화가 발자끄(H. Balzac)나 프루스뜨(M. Proust)에 비해서도 박진감 넘치고 입체적인 호소력을 지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백낙청이 포착하는 로런스 문학의 정수는 기술을 절대시하여 맹목적으로 종속되어가는 현 문명의 흐름을 적시하면서도 거기 매몰되지 않고, ‘다음에는 무엇이’ 그로부터 벗어날 다른 길을 제시하는지 묻게 하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가령 “정동적인 세계라는 측면에서 볼 때 버킨은 오히려 형상화가 덜된 ‘약한’ 캐릭터라는”21 김성호의 평가가 합당하다면, 이는 제럴드와 구드런의 형상화에 대한 상찬과 무관하게 이 소설 자체에 대한 심각한 혹평이 될 것이다. 적어도 기존에 없던 사건과 사유의 새로움을 알아보지 못하는 논평이 아닌지 그 기준을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실제로 소설의 제19장 ‘달’(Moony)에서 버킨이 어슐라 및 제럴드와의 존재적 대면 이후 도달한 ‘정신개벽’에 방불한 깨달음이 있기에 두 커플(버킨-어슐라, 제럴드-구드런)의 운명은 달라지며, “그 차이에 세계사적 의의마저 부여”(337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정동적인 세계’의 역동성과 강렬도가 어떤 것이어도 그것이 “감각과 양명한 정신의 연관”(143면에서 재인용)22이 깨어진 긴 역사를 돌이키지 못하는 한 그 역시 제럴드 등의 흐름에 안주하는 자세와 얼마나 다른가 하는 반문도 가능하다.

이 문제는 인물 형상화에 대한 판단을 넘어 백낙청 리얼리즘의 고유한 성격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가령, 변현태는 『연애하는 여인들』과 도스또옙스끼(F. M. Dostoevsky) 문학의 상통성에서 그 해답을 기대하는 듯하다. 그에 따르면 바흐찐(M. Bakhtin)에게 도스또옙스끼 시학의 백미는 “개인의 영혼이 가진 세계성”까지 전달하는 작중인물들의 대화이고 그것은 “지옥문 앞에서의 대화”로 묘사될 정도로 강렬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논의는 『연애하는 여인들』에서도 그런 강렬함이 느껴진다는 선에서 멈추고 만다.23 기존의 리얼리즘론에서 충분히 해명되지 못한 부분, 즉 도스또옙스끼와 로런스 문학의 위대함이 어떤 점에서 통하는지, 그리고 백낙청이 읽은 로런스가 어떤 점에서 도스또옙스끼와 다른지 분별하는 작업까지 이 좌담에서 수행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우연찮게도 로런스는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의 ‘대심문관’ 이야기에 대한 해설을 통해 이 러시아 작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남긴 바 있다. 로런스는 인간 본성은 기적으로서의 빵과 삶의 신비, 그리고 자신을 이끌 권위있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대심문관의 지적을 근대민주주의의 방향과 휴머니즘 자체를 겨냥한 비판과 연관시킨다.24

로런스는 기독교가 ‘지상의 빵’과 ‘천상의 빵’을 분리하자 인간과 우주의 살아 있는 연관이 상실되기 시작했고, 이후 전개된 사회주의는 ‘지상의 빵’의 분배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이 흐름은 인간과 물질 사이를 중재하는 완벽한 메커니즘을 추구하는 제럴드의 기술공학적 시대에 이르러 “인간의 순수한 도구성”(WL 223면)을 구축하게 되고, “일단 저 먹을 것을 받은 뒤에는 (…) 악마가 멋대로 뛰어들어도 좋”(WL 227면)은 자유주의 특유의 도덕적 무정부적 상태에 빠지게 된다. 버킨이 제럴드의 태도를 문제 삼고 개입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고, 제럴드의 변화와 둘 사이 우정의 성패에 문명의 향방이 걸려 있다는 판단도 여기서 가능해진다.

하지만 로런스는 지상과 천국을 분리하는 이상주의가 기독교의 전부는 아니라며, 돈을 삶으로 착각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기독교의 역사적 의의를 발견한다. 그런 점에서, 인간에 대한 (사실상 자애로운) 통찰을 악명 높은 종교재판의 주재자(‘대심문관’)로 하여금 수행하게 한 도스또옙스끼는 “사악한 사상가이자 놀라운 통찰가”25라고 꼬집는다. 기독교 사상과 문명에 대한 도스또옙스끼의 근본적인 통찰은 『개벽사상가』 여러 대목에서 탐구되는 니체의 사상과도 비교될 만하다. 하지만 이들의 관점은 이 문명의 공과를 균형있게 탐구한 연후에 그 막다른 지경을 벗어나려면 ‘다음에는 무엇이’ 요구되는지 찾아나선 로런스의 창조적 작업과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지옥문 앞에서의 대화’가 지닌 종말론적 절박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 문명권 내부에 속할 뿐, 새 길을 찾는 데에 생사를 거는 버킨 등의 대화와는 분명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근래 백낙청은 복잡한 역사적·철학적 맥락으로 인해 단적인 정의가 어렵거니와 형이상학으로 인식될 위험 등이 있어서 ‘이즘’이 붙은 단어 ‘리얼리즘’의 사용을 줄이고 “근대의 이중과제에 부응하는 예술적 성취라는 틀 안에” 리얼리즘론을 자리매기는 방식으로 논법을 전환했다고 밝힌다(157~161면). 하지만 제3장 「『연애하는 여인들』의 전형성 재론」이 입증하듯이, 기존의 이상주의를 부정하는 뢰르케 같은 인물이 살아 있는 생명까지 기계적 운동의 실현으로 파악하고 기술중심적 사고방식에 철저히 예속된 예술에 복무하게 되는 경향을 본다면, 무엇이 ‘진짜’(real)인지 묻고 탐구하는 것은 문학의 포기할 수 없는 과제이다. 과학기술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가상현실 영역이 폭발적으로 확대되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 ‘리얼리즘’은 지속적으로 연마해야 할 화두로 남을 것이다.26

 

(3) ‘후천개벽’의 체험과 실험

『개벽사상가』에서 두드러지는 저자의 변화 중 하나로 기존의 제3세계론적 입장을 대거 조정하여 ‘개벽사상’의 맥락으로 재조명한 점을 들 수 있다. 백낙청의 ‘제3세계적 시각’은 “‘제3세계’를 삼분된 세계 중 하나로 지칭하기보다 하나의 세계를 보는 민중 중심의 시각을 강조하는 입장”이라는 점에서 국제정치적 관계나 경제적 구분에 근거한 제3세계론이나 90년대 이후 구미학자들이 주도한 탈식민주의 담론과 차별성을 분명히 했지만, 그는 자신의 논의가 “제3세계적 시각의 구체적 내용에 대한 성찰이 충분치 못했던”(106~107면) 점을 반성한다.

그렇지만 후천개벽사상을 적극적으로 대면하고 수용하는 이 변화는 저자의 애초의 시각을 철회한 것이기보다 작금의 한국과 한반도 역사 및 위상의 변화와, 특히 ‘촛불혁명’으로 불리는 최근의 대사건을 계기로 그가 연마해온 전지구적 전망과 변혁사상을 더욱 주체적으로 발전시켜 ‘구체적 내용’을 실답게 채운 성과로 해석하는 편이 온당하겠다. 평자가 부연하고픈 것은 세계를 하나로 묶어서 파악하는 동시에 민중적 시각을 견지하는 일이 특정 지역에 특별한 의미와 과제를 부여하는 것과 배치되지는 않는다는 점이고, 이는 한반도 통일운동의 세계사적 의의를 줄곧 역설해온 저자도 충분히 동의할 사항일 것이다. 사실, 로런스의 ‘터의 영’ 혹은 ‘장소의 기운’(the spirit of the place)과 백낙청이 주목하는 후천개벽사상은 양자 모두 특정 장소, 환경, 자연 등과 교통하며 사람들이 만들고 지은 역사적·집단적 시운(時運)이 담긴 인문지리적인 ‘터’의 개념을 전제한 것이기도 하다(465~66면).

평자는 이 관점에서 『개벽사상가』의 제4장 「『쓴트모어』의 사유모험과 소설적 성취」와 제5장 「『날개 돋친 뱀』에 관한 단상」을 간략하게 조명하고자 한다. 『개벽사상가』에서 비중있게 배치된 『쓴트모어』(St. Mawr, 1925)론은 영국과 유럽 배경의 『연애하는 여인들』과 이후 로런스의 미대륙에서의 작품들을 연결하는 이 소설에서 어떤 변화가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파격적인 예술양식에 담긴 발본적인 사유가 무엇인지 규명하고자 고투한다.

런던 상류층의 안일한 삶을 살던 여주인공 루는 어느날 거세하지 않은 수말 쓴트모어에게서 강렬한 계시를 받는 듯한 경험을 하며 “무언가 다른 세상이 있고 다른 삶이 가능”(215면)함을 깨닫게 된다. 이는 결단코 남편 리코가 대표하는 이전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인 경험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쓴트모어가 뒤집어 엎어버린 리코의 세계가 “커다란 파도를 지으며 지구를 덮어가는 악”(217면에서 재인용)27의 본체임을 꿰뚫어 직시할 수 있게 된다. 이에 대해 백낙청은 로런스가 적시하는 궁극적인 ‘악’이란 다름 아닌 ‘역사의 종말’을 구가하는 자유주의와 일체의 진리나 실재에 대한 불신을 신봉하는 ‘포스트모던’한 가벼움 등 로런스 당대를 넘어 현재까지 관통하는 혼돈의 말세적 현상임을 인상적으로 설파한다(216~23면).

쓴트모어가 루에게 ‘다른 세상’을 열게 한 계기라면, 로런스에게 그것은 뉴멕시코에서 느낀 ‘터의 기운’이다.

 

나는 뉴멕시코가 내가 바깥세계로부터 얻은 최대의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분명히 나를 영구히 바꿔놓았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문명의 현시기, 물질적이고 기계적인 발전의 거대한 시기로부터 나를 해방시켜준 것은 다름아닌 뉴멕시코였다. 남방불교의 성지 중의 성지인 쎄일론의 성스러운 칸디에서 보낸 몇달도 나를 지배하고 있던 물질주의와 이상주의의 거대한 정신을 건드리지 못했었다. 그리고 심지어 씨칠리아의 절묘한 아름다움과 아직도 그곳에 살아 있는 옛날 그리스 다신교의 정신 한가운데서 보낸 몇해도 내 성격의 기반을 이루고 있던 본질적인 기독교를 깨뜨리지 못했었다. (…)

그러나 싼타페의 사막 위로 높이 그 눈부시고 당당한 아침이 빛나는 것을 본 순간 내 영혼 속에서 무엇인가가 멈춰섰고 나는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 뉴멕시코의 장려하고 치열한 아침을 맞아 나는 잠에서 떨쳐 일어났고 영혼의 새로운 한 부분이 문득 깨어났으며, 낡은 세계가 새로운 세계에 자리를 내주었다.(207~208면에서 재인용)28

 

하늘과 땅이 열리는 순간이라 할 만한 이 경험 이후, 로런스는 아메리카대륙을 배경으로 하는 「공주」(The Princess) 등 여러 소설에서 야생의 자연과 그 자연이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력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기울인다.29 그것은 “인간과 그를 둘러싼 우주 사이의 관계를 그 살아 있는 순간에 드러내는 일”(STH 171면)이 여기서 ‘사회’라는 매개 없이 진행되고 있음을 일러줌과 아울러, 진정한 문명 개척과 자연의 관계라는 오늘날 더욱 절실해진 물음도 제기한다. 가령, 구세계와 결별한 루는 뉴멕시코 산중에서 기존의 초월적 신성(神性)과는 다른 거룩한 무엇의 실재를 느끼지만, 그와 더불어 인간에게 악의를 행사하는 로키산맥 지대의 기운과 “지저분한 흙 같은 타성의 무게”(232면에서 재인용)30의 압도적 위력도 절감한다. 이는 ‘스스로 그러함’이라는 말 그대로, 인간중심주의의 울타리로 경계 지을 수 없는 ‘자연(自然)’의 거대한 힘을 포착한 대목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백인 원주민’이 되고자 이곳의 ‘터의 기운’과 있는 그대로 맞서는 루의 모험을 저자는 “엄청난 성공이요 서양인의 정신사에서 뜻깊은 성취”(236면)로 평가하는데, 그것은 그녀의 돌파가 일방적인 ‘문명화’도, 지난날의 부족문화로의 복귀도 아닌 새로운 창조의 길을 열어나갈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제5장 「『날개 돋친 뱀』에 관한 단상」은 저자가 학위논문의 에필로그(「『날개 돋친 뱀』에 관한 성찰」, 이하 「성찰」)에서 도달한 거의 완결된 작품 논의에 이어 그의 현재적 관심사를 한걸음 더 개진한 ‘단상들’로 구성된다. 일차적으로 「성찰」의 논의는 로런스가 유럽중심주의를 벗어난 서구작가이자, 이 장편이 “제3세계의 각성을 긍정적으로 다룬 최초의 소설”(「성찰」 311면)임을 밝힘으로써 로런스 비평에서 주목받지 못하던 『날개 돋친 뱀』(The Plumed Serpent, 1926)의 위상을 한층 높였다고 평가된다. 특히 저자에게 이 소설의 의의는 탈식민주의 담론의 발상을 앞서 담지했다는 사실보다, 최초로 발생한 제3세계혁명(멕시코혁명)을 배경으로—현실로는 존재하지 않던—토착종교 부활운동이자 의식혁명이라고 할 께쌀꼬아뜰(Quetzalcoatl)운동을 변혁의 원동력으로 구상한 데 있다. 게다가 현실에 없는 이런 운동이 “능히 있을 수 있는 현실임을 설득하기 위해서 (…) 사실주의적 묘사와 서사”(251면) 방식을 선택한 점에 그는 특히 주목한다.

「『날개 돋친 뱀』에 관한 단상」(이하 「단상」)의 문제의식은 제9장 「미국의 꿈과 미국문학의 짐: 『미국고전문학 연구』」 그리고 제10장 「로런스의 민주주의론」의 탐구와 이어진다. 가령, 아메리카대륙에서의 인디언 문제가 어떤 세계사적 의미가 있으며 왜 서양 전통 안에서는 풀기 어려운 과제인지, 또한 아스떽제국과 같은 원주민 제국의 존재와 위력이 엄연했던 멕시코에서 살아 있는 신들을 믿고 되살림으로써 ‘나라만들기’를 수행하려는 종교운동이 어떤 변혁적 잠재력과 난관을 지니는지 등을 일깨운다(443면). 또한 황정아가 지적하듯이 “어떤 관념적인 실험 같은 것으로 막연히 이해”하던 『날개 돋친 뱀』에서의 시도가 “개벽을 매개로 동학운동과 연결시키니까 엄청나게 실감나는 이야기로 다가”31와 우리의 현재적 관심사를 연마할 계기를 제공한다.

「단상」은 주로 이 소설의 ‘결함’을 짚는 가운데 정치와 종교의 바람직한 관계 및 종교성에 대한 물음을 집중적으로 제기한다. 소설의 전반부까지 유럽 출신 여주인공 케이트의 시점을 활용하여 설득력을 유지하던 서사가 후반에 이르러 급격히 개연성을 상실하는데, 저자는 주인공들이 께쌀꼬아뜰교의 신전에 살아 있는 신인(神人)으로 등극하고 대통령에 의해 께쌀꼬아뜰교가 국교로 지정되어 일종의 제정일치를 이루는 대목부터는 소설이 판타지문학의 영역에 들어가버린다고 비판한다. 달리 말하면, 이 작품의 이런저런 결함과 불협화음은 버킨과 어슐라가 꿈꾼 “‘또 하나의 길’이 대중적으로 실현되는 장소를 찾아”(248~49면, 강조는 인용자) 그것을 개연성 있는 장편으로 쓰고자 한 로런스의 시도 자체의 어려움을 나타내며, 그런 시도가 성공하기에는 아직 때와 조건이 무르익지 못했음을 방증한다고 하겠다.

「단상」은 『날개 돋친 뱀』의 결함이 우리에게 주는 역설적인 교훈을 상기시키며, 그 대안으로 (‘제정일치’나 ‘정교분리’가 아닌) “‘정교동심(政敎同心)’, 곧 정치와 종교가 한 몸은 아니되 한마음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원칙”(257면)을 제시한다. ‘정교동심’ 사상이 현대의 세속사회에 미칠 변혁적 잠재력에 공감하면서 평자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정교동심’에서의 ‘종교’ 개념과 초월적 ‘신(神)’을 상정하는 서양종교와의 차이점이다. 김용옥은 초월적인 인격신에 대한 인간의 숭배와 복속, 그리고 종교적 권위주의에 개인을 종속시키는 기존 종교의 개념을 기준으로 한다면 동학은 종교운동이 아니라고까지 단언한다. 그러면서도 동학사상이 새로운 종교사의 원점이라고도 주장하는데, 그것은 동학사상의 우주관이 기계적 우주론과는 달리 천지의 생명력과 화육(化育)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으로 본다.32 ‘탈종교적 종교성’이라 할 이러한 ‘종교’ 개념의 출현은 가령 동학정신과 불교사상을 함께 이어받은 원불교의 경우—법신불 일원상(法身佛 一圓相)으로 표현되는—일체의 초월적·관념적 상(相)을 여읜 ‘종교’의 구상인 동시에 ‘물질개벽’ 세상에 대한 철저한 인식의 결과이기도 함은 앞서 논의한 대로이다.

그런 점에서 “『날개 돋친 뱀』의 예술적 미흡함은 종교와 종교성에 대한 로런스 자신의 첨단적 사상이 제대로 담기지 못한 점과도 연관된다.”(257면) 사실, 이 소설의 호소력은 상당 부분 백인 여성 케이트의 시점과 그녀의 의식 변화에 달려 있는 반면, 대다수가 인디언 원주민인 멕시코 대중의 주체적 각성을 그리는 데는 현실적인 한계가 있어 보인다. 그런 점에서 라몬의 토착종교 재생운동이 현실에 기반을 두지 못한 채 과거로 역주행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케이트의 의문에는 작가 자신의 의구심도 실려 있다(254면). 작품의 이러한 ‘결함’의 함의를 살핌으로써 「단상」은 “우리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실질적인 전망이 열리게 되는 과제”(267면)의 구체적 내용을 더욱 분명히 촉구할 수 있게 된다. 로런스가 뉴멕시코에서 처음 겪은 하늘과 땅이 열리는 다른 세상의 체험도 마땅히 “자본이 주도하는 기술지배의 세계 전체에 대한 ‘다른 길’”(192면)이어야 하며, 이를 위해 둘러가는 에움길은 있을지언정 과거로의 복귀가 대안일 수 없다는 것이 로런스의 굳건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무엇이’ 새로운 삶의 실마리일지, 우리 시대의 과제를 드러내고 탐구하기 위해서는 깨어 있는 개개인의 집단적 힘이 더욱 절실한 시점인 것이다.

 

 

3. 「죽음의 배」가 알고 있는 것

 

마지막 장인 제11장 「「죽음의 배」: 동서의 만남을 향하여」는 글의 구도 자체가 하나의 모험처럼 다가온다. 백낙청은 무엇보다 다른 연구자들이 어느 면에서든 회피한 이 시의 ‘축자적(逐字的) 읽기’를 시도하겠다고 밝히면서, “사후의 생에 대한 로런스 나름의 분명한 생각, 더 구체적으로 인간영혼이 새로운 몸을 입고 다시 태어난다는 비전”(494면)을 직시할 것을 요구한다. 시를 읽음으로써 ‘몸으로의 환생(還生)’이라는 주제를 밝히겠다는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에 도전한 것이다. 이것은 사실 로런스의 이 시를 제대로 읽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지만, 그것이 엄청난 과제인 것은 “우리 스스로 그 (로런스의 평생에 걸친 사유의—인용자) 모험에 진지하게 동참하지 않고는 이 시가 알고 있는 것을 완전히 음미하는 일이 가능하지 않음을 뜻”(516면)하기 때문일 것이다.

평자는 2014년 이딸리아 가르냐노에서 열린 D. H. 로런스 국제학술대회에서 이 글(초본)의 구두 발표를 들었는데, 당시 가장 첨예한 논제는 ‘주체’에 관련된 것으로 기억한다. 예컨대, “불교의 일견 역설적인 특징은 힌두교, 피타고라스파, 또는 그리스도교 신앙과도 달리 영혼이든 그 무엇이든 실체적이고 본질적인 존재를 부정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혹은 무엇이 환생의 주체인가?”(511~12면)라는 물음이다. 이는 본질이나 불변의 영혼을 상정하는 전통적 발상들과 데까르뜨적 자아 관념의 해체에 성공한 이후, 그 빈 ‘주체’의 ‘처소(處所)’를 찾지 못해서 제자리를 맴도는 서양철학의 혼돈을 겨냥한 물음이기도 하다. 백낙청은 「죽음의 배」(The Ship of Death) 읽기를 통해 “로런스의 주체는 인간의 영혼이라는 ‘희한한 물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주체이”고 “그는 이러한 책임이 심지어 다음 생으로까지 연장된다고” 보며, 바로 그런 연유로 “현상세계에 대한 역설적이지만 강력한 긍정이”(513면)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이는 로런스와 동양사상(구체적으로는 대승불교적 관점)의 의미있는 일치가 발견되는 지점이거니와, 삶에 대한 저자의 깊은 책임감이 전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 장의 논의를 논평하기란 평자의 능력을 넘어서므로, 간단한 소감을 덧붙이며 글을 맺고자 한다. 첫번째로는 이 시를 통해 규명된 (죽음과 삶의 관계에 대한) 로런스의 연기론(緣起論)적 관점이다. 몸의 죽음이 단순한 신체적 소멸33이 아닌 ‘낡은 자아’의 “끝이요 적멸”로 마감되기 위해, “이것을, 우리 자신의 종결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494~95면)34라는 시의 물음은 관건적이다. 육신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 아니고 ‘죽음의 배’를 제대로 짓는 일이야말로 ‘새 자아’로 탄생하기 위한 필수조건인 것이다. 이는 현재 살아 있는 순간 나의 삶이 더없이 중요해지는 이유로서, “적멸만이 평화를 줄 수 있으며, 그것은 용기있게 살고 용기있게 죽어야만 얻을 수 있”(504면)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죽음의 배」 제10연에서 ‘적멸’의 과제가 종결된 영혼이 새 몸에 깃드는 ‘환생’의 순간—어머니의 몸에서 아기가 세상으로 나오는 그 순간의 이미지와도 겹쳐지는 장면—을 정성들여 논의하고 그 장면 자체를 회피하는 여러 읽기들을 경계한다. 그러한 시의 주제가 이미 엄연히 존재하기도 하거니와 더 크게는 바로 여기에 서양의 근대 지식 및 우주관과 다른 로런스의 고유한 사상이 집약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로런스에게 ‘삶’은 말 그대로 “인간과 그를 둘러싼 우주 사이의 이 완벽한 관계”(STH 171면)이고, 그는 “살아 있는, 몸으로 살아 있는 우주”35를 믿었다. 그 우주의 일부이기에 인간은 신비이기도 한 현생의 삶을 더욱 긍정하고 사후의 삶과의 연속성을 체감할 근거를 가질 것이며, ‘본질’과 ‘공(空)’ 모두를 극복한 살아 있는 ‘주체’로 살아가리라 믿는 것이다(515~22 참조).

저자는 이 책에서 로런스의 ‘사유모험’을 곡진하게 추적하는 가운데 그것이 동아시아, 특히 한반도의 종요로운 사상적·종교적 유산과 만나는 지점들을 발굴하고 있다. 이는 ‘근대를 어떻게 이해하고 동시에 극복할 것인가’라는 긴요한 과제의 주체적인 수행을 의미한다. 저자는 서양사상의 정점을 통찰한 엄밀한 근대 이해를 발판으로 한반도 후천개벽사상의 현재성을 부각하고 이 전환기를 넘어갈 힘을 찾아낸다. 로런스의 ‘사유모험’을 자생적인 ‘서양의 개벽사상’으로 발굴해낸 이 작업은 매순간 창조적인 삶을 위해 ‘다음에는 무엇이’ 요구되는지 찾아 나선 저자의 정신적 모험이자 깊은 책임감의 결실이라 하겠다.

 

 

  1. 백낙청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 창비 2020, 10면. 이하 『개벽사상가』로 칭하고 이 책에서의 인용은 본문에 면수만 표기.
  2. 백낙청·박혜명 「한국 민중종교의 개벽사상과 소태산의 대각」 〔1996〕, 『백낙청 회화록』 제3권, 창비 2007, 400면; 백낙청 『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 박윤철 엮음, 모시는사람들 2016, 89면.
  3. D. H. Lawrence, “The Future of the Novel,” Study of Thomas Hardy and Other Essays, ed. Bruce Stee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5 (이하 STH) 154면. 1차대전 이후 영국을 떠나 유럽과 호주, 그리고 아메리카대륙으로 이어지는 로런스 필생의 문학적·사상적 모색은 서구적 세계관을 넘어 ‘대전환’의 필연성을 체감하고 그 방도를 찾아 나선 ‘사유모험’의 도정이었다.
  4. 한국의 근대 이행의 남다른 점은 ‘독특한 식민지, 한국: 식민화는 가장 늦게, 봉기는 가장 먼저’라는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의 글 제목에 집약되어 있다. 『창작과비평』 2019년 여름호 323~35면 참조. 동학과 개벽사상이 3·1운동과 민주화운동, 그리고 촛불혁명을 이끈 정신적 근간임은 『창작과비평』 2019년 봄호 특집 ‘3·1운동의 현재성: 100주년에 부쳐’ 참조.
  5. 김용옥 『동경대전 2: 우리가 하느님이다』, 통나무 2021, 292면 참조. 수운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도올의 『동경대전』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김용옥·박맹수·백낙청의 특별좌담 「다시 동학을 찾아 오늘의 길을 묻다」(『창작과비평』 2021년 가을호, 이하 ‘특별좌담’)도 서구사상의 틀을 넘어 미래의 길을 모색하는 뜻깊은 생각거리들을 던지고 있다.
  6. 로런스에게도 “예술의 본분은 인간과 그를 둘러싼 우주 사이의 관계를 그 살아 있는 순간에 드러내는 일”이며, 가령 고흐가 해바라기를 그릴 때 그가 자신과 해바라기의 관계를 “드러내고 이룩한” 것이라고 피력하는 대목에서도 형이상학적 사고와의 차이가 선명히 드러난다. “Morality and the Novel,” STH 171면.
  7. 소태산의 정신개벽운동의 의의와 물질개벽과의 관계 등에 관해서는 백낙청 「문명의 대전환과 종교의 역할」, 『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 373~80면 참조. 이는 박여선이 「비전을 가진 이들의 만남: 백낙청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와 『D. H. 로런스의 현대문명관』을 읽고」에서 주목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창작과비평』 2020년 가을호, 특히 302~303면 참조.
  8. 백낙청 「물질개벽 시대의 공부길」,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개정판), 창비 2021, 209면; 『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 36면. 이와 관련해서는 또한 ‘특별좌담’ 116~21면 참조.
  9. 『개벽사상가』 ‘추천의 말’ 622~29면 참조.
  10. Paik Nak-chung, A Study of The Rainbow and Women in Love as Expressions of D. H. Lawrence’s Thinking on Modern Civilization, Changbi Publishers 2021, 6면.
  11. 이러한 ‘being’의 의미에 대해서는 『개벽사상가』 서장의 3절 ‘사유의 궤적: 전환점으로서의 「토마스 하디 연구」’ 25~34면 및 각주 19번 참조.
  12. ‘특별좌담’ 107면.
  13. “Morality and the Novel,” STH 172면.
  14. 평자가 ‘규범적인 것’(normative)의 해석과 관련해 부분적으로 이의를 달았지만, 사실 백낙청은 로런스 소설의 남녀관계의 ‘보수적’ 일면은 그것대로 비판하고 여성의 사회진출에 부정적이었던 작가의 시대적 한계도 분명히 지적한다. 저자는 로런스의 일부 발언의 현실성 여부를 따지기보다 그의 발언이 현대인에게, 그리고 현대사회에 어떤 본질적 문제를 제기하는지 음미할 것을 권한다(388~89면). 로런스가 당시 ‘여성참정권운동가들’을 근대의 ‘가장 용감한 집단’으로 보면서도 ‘평등주의’에 머무르는 한 ‘다음’으로 나아갈 원동력일 수 없다고 보았듯이, 백낙청은 ‘남녀평등’을 포괄할 ‘자력양성’과 ‘음양조화’ 등의 사유틀을 구상할 뿐 아니라 최근에는 우리 시대의 개혁과 개벽을 이끌 여성의 선도성까지 요청하기도 한다. 『개벽사상가』에서 개진된 그의 독특한 남성론도 이 작업의 일환으로 읽을 수 있겠으나 지면상 상론하지 못한다. 다만 이 주제와 관련하여 『개벽사상가』 제8장의 4절 ‘인간의 공격적 충동과 ‘문명의 불편함’’은 상당히 시사적이다.
  15. 『이중과제론: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 이남주 엮음, 창비 2009, 16~17면.
  16. Michael Bell, D. H. Lawrence: Language and Being,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2 참조.
  17. 백낙청 「D. H. 로런스의 소설관」,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1/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합본개정판), 창비 2011 참조.
  18. 원문은 Martin Heidegger, Was Heißt Denken?, Max Niemeyer 1954, 53면. 하이데거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에서 테크네(techne)는 ‘시’의 어원인 포이에시스(poiesis)와 마찬가지로 진리를 드러내는 한 방식이기도 했다. 『개벽사상가』 125~26면 참조.
  19. 「물질개벽 시대의 공부길」,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 214~15면; 『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 42~43면 참조.
  20. 김동수·김성호·변현태·황정아 「서평 좌담: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 『안과밖』 2020년 하반기호 (이하 「서평 좌담」) 332~61면 참조.
  21. 같은 글 339면.
  22. 원문은 D. H. Lawrence, Women in Love, ed. D. Farmer, L. Vasey and J. Worthen, Cambridge University 1987 (이하 WL) 253면.
  23. 「서평 좌담」 340~50면 참조.
  24. 『개벽사상가』 369면 참조. 로런스는 도스또옙스끼가 직시한 이 진실이 “역사의 흐름을 바꿀 것”이라고도 단언한다. D. H. Lawrence, “Introduction to The Grand Inquisitor, by F. M. Dostoevsky,” Introductions and Reviews, eds. N. H. Reeve and J. Worthe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이하 IR) 130면. ‘기적’과 ‘신비’의 삶을 요구하는 인간 본성을 대심문관은 ‘한계’로 보았지만 로런스는 그것을 진정한 ‘자유’의 요건으로 본다. 더불어 이 테제는 물질과 정신 간의 근원적인 연관성도 숙고하게 한다. ‘천국의 빵’에 대한 로런스의 해석은 ‘밥이 하늘이다’〔食以爲天〕라는 후천개벽사상이나 ‘사람이 음식을 먹는 것은 하느님이 하느님을 먹는 것과 같다’는 해월의 ‘이천식천(以天食天)’ 사상과도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25. IR 129면.
  26. 백낙청 리얼리즘론의 중요한 진전의 예로서 제7장 「재현과 (가상)현실」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장은 해체론과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축적된 이론적 문제의식과 정면 대결함으로써 재현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참다운 ‘현실’을 드러내고 이룩할 창조적 예술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27. 원문은 D. H. Lawrence, St. Mawr and Other Stories, ed. Brian Finne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3, 78면.
  28. 원문은 D. H. Lawrence, “New Mexico” 〔1928〕, Mornings in Mexico and Other Essays, ed. Virginia Crosswhite Hyd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176면.
  29. 이 점에 관해서 졸고 「로런스의 뉴멕시코 단편에 나타난 두 ‘모험’」의 2절 ‘식민화된 자연 속으로’, 『D. H. 로런스와 창조성의 문학』, 동인 2020, 150~59면 참조.
  30. 원문은 St. Mawr and Other Stories 140면.
  31. 「서평 좌담」 341면.
  32. 『동경대전 2』 2장 「동학론(東學論)」, 특히 2절의 “사람들이 천지만 알고 귀신을 알지 못한다”에 관한 논의, 118~29면 참조.
  33. 사후의 삶에 관한 관점 가운데 “완전한 소멸이라는 과학적·유물론적인 학설”(503면)은 로런스의 우주관이나 불교적 사유, 가령 『반야심경』의 ‘불생불멸(不生不滅)’과 ‘부증불감(不增不減)’의 가르침과도 배치된다. 양자역학 등의 새 발견들을 통해 기존의 실증적 과학의 한계가 조금씩 극복되기를 기대한다.
  34. 「죽음의 배」 제3연 5행에 나오는 셰익스피어가 쓴 ‘quietus’란 단어에는 ‘청산’ ‘(부채 따위의) 최종 면제’ ‘의무의 종결’ 등의 의미가 있고 다음 절에 나오는 ‘quiet’, 즉 ‘고요’의 어감과도 호응한다. 현생의 책무와 자세를 묻는 이 시구의 물음은 “어떻게 그 마음을 머물고 항복받으리까(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라는 『금강경』의 주제의 또다른 표현으로도 다가온다.
  35. D. H. Lawrence, Apocalypse and the Writings on Revelation, ed. Mara Kalnin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0, 14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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