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문학의 정치성을 다시 묻는다

 

당신의 얼굴이 되어라

질식해가는 정치를 위한 소설의 심폐소생술

 

 

권희철 權熙哲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인간쓰레기들을 위한 메시아주의」 「방랑자를 위한 여행안내서: 윤대녕론」 등이 있음. northpoletrain@gmail.com

 

 

1. 냉소주의의 화병

 

문학과 정치. 지난해 이 문제만큼 지속적인 관심을 불러모으며 다양한 논의를 만들어낸 것은 없었다. 그런데 이 오래된 문제를 2009년에 다시 떠오르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혹은 “어떤 시대적 필연성이 당신에게 지금 이 질문을 던지게 했”을까?1

이 논의들을 출발시킨 것은 새삼스럽게 가시화된 문학과 정치 사이의 분열과 거리감이었다. ‘문학과 정치’ 논의의 출발점으로 자주 거론되는 한 시인의 고백에서도 이 점은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주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며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거나 지지 방문을 하고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논문을 쓸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을 시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사회참여와 참여시 사이에서의 분열, 이것은 창작과정에서 늘 나를 괴롭히던 문제이다.”2(강조는 인용자, 이하 같음) 시인 자신의 정치적 참여는 물론 가능하다. 그리고 시의 경우에도 그것이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어떤 분열과 거리가 있으며 그 둘 사이를 좁히는 것은 쉽지 않다. 둘 사이의 연결통로를 만드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시는 어떻게 정치적일 수 있는가? 이러한 판단과 질문들이 ‘문학과 정치’ 논의의 핵심이었다.

언제나 이미 그 자리에 있던 이 분열과 거리가 새삼스럽게 불편함을 호소하며 발화하기 시작한 것이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으로 촉발된 촛불항쟁의 압력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면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일까? 하지만 이 시기 우리 사회에서 가장 두드러진 정치적·문화적 이슈가 ‘촛불’이었고 문예지들 역시 이 점에 주목하고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창작과비평』 2008년 가을호에 실린 특집 ‘이명박정부, 이대로 5년을 갈 것인가’의 여섯편 글 가운데 다섯편의 글이 ‘촛불’을 다루고 있으며, 같은 계절 『문학과사회』는 특집 ‘촛불’과 미디어의 수사학’을, 『문학동네』는 좌담 「‘촛불’은 질문이다」를 기획했다. 앞서 인용한 시인의 글이 발표되기 직전의 일이었다.

이명박정권의 등장과 함께 민주주의의 후퇴와 정치적 위기감의 고조를 목격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촛불항쟁 속에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과 투쟁의 활로를 발견했거나 발견했다고 믿고 싶어했다. 어떤 시인들은 삶 속에 구체적으로 파고드는 촛불의 활력과 생기를 보며, 그것을 시 속으로 옮겨심기를 욕망했다. 예컨대 이런 고백의 경우. “광화문과 종로 거리에서 저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시는, 문학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촛불들이 독자일 것인데, 이들이 과연 내 시를 읽고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 시와 독자, 시와 현실 사이가 아득해 보였습니다.”3 약간의 비약을 감수한다면, ‘문학과 정치’ 논의를 출발시킨 분열과 거리감이란, 촛불로 밝혀진 광화문과 종로 거리에서 새삼스럽게 다시 발견된 그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런데 시의 영역에서 주로 논의된 이 문제에 대해, 조금 늦게 도착한 어느 소설가에 관한 진술은 약간 다른 시각을 취할 것을 요구한다.

 

이런 장면을 상상해볼 수 있겠다. 전쟁터에서 폭탄을 맞아 내장이 쏟아져나온 시체가 방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데, 그 방의 방문자들이 다들 책꽂이에 꽂힌 책 이야기라든가 커튼의 색깔이랄지 구석에 서 있는 화병의 무늬랄지 날씨 얘기 따위만 끝없이 하고 있는 상황. 그런데 그 방에서 “그런데요, 여기 시체가 있는데요”라고 한 아이가 말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응, 그래. 우리도 알고 있단다”라고 한 다음에 다시 날씨 얘기를 한다. 아이의 눈에는 그게 아무래도 이상하다. “여기 시체가 있다니까요!”라고 한번 더 외친다. 그러면 사람들이 조금 성가셔한다. “그래! 여기 시체가 있어! 우리도 다 안단다. 그걸 누가 모르니!” 아이는 화가 났다. “저는 이게 무서워요!”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도 별로 좋지는 않단다. (…) 하지만 우리가 그런 큰 것에 대해 이야기해봤자 무슨 소용이겠니. 우린 벌써 이 시체를 수백년 동안 보아왔단다. 그냥 다른 얘기를 하자.” 그러고서 그들은 다시 화병의 무늬에 대해 논하기 시작한다. 아이는 화병을 집어던져 깨뜨린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얼어붙는다.4

 

문학이 정치적인 문제에 개입할 수 있고 또 개입하려 한다고 해도 남는 문제는 있다. ‘여기 시체가 있다’는 정치적 발화가 결코 그 자체로 투명하게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에 대한 표준적인 응답은 ‘그걸 누가 모르는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화병의 무늬랄지 날씨 얘기 따위만 끝없이 늘어놓는 것은 여기 시체가 있다는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다. 우리 역시 그 시체의 존재를 잘 알고 있다. 다만, 그런 큰 것에 대해 이야기해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냉소주의가 정치 자체를 질식시키고 있기 때문에, ‘여기 시체가 있다’는 정치적 발화는 별다른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문학이 어떻게 정치적일 수 있는가 하는 물음과 더불어 우리는 어떻게 이 냉소주의를 깨뜨릴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도 함께 감당해야 한다.

문학이 정치와 분열되어 있으며 그 분열상태에서 정치적으로 무력하다는 반성은 오히려 문학 외부에 정치적 활기가 있으리라는 소망을 사실판단인 양 착각하게 만들고 이런 착각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를 안심시키기까지 한다. 문학이 참여하고자 하는 정치적 공간 자체가 소멸하고 있다는 사실을 희미하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의 요점은, 질식해가는 정치에 문학이 새로운 문제제기의 산소를 주입할 권리가 있으며 그 책임을 떠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냉소주의의 시대에 ‘문학과 정치’를 논할 때 함께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니 문학이 촛불항쟁의 열기를 참조하려고 한다면, 참조의 초점은 촛불의 직접적 정치성이 아니라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장(場)의 열림, 즉 어떤 정체성도 귀속의 전제도 없이 여러 독특성들이 현시하게끔 만드는 소통적 텅 빔의 가능성이 되어야 한다. 촛불항쟁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안에 상대적으로 한정된 내용의 특정한 정치적 요구가 없었다는 데 있다. 촛불항쟁에서는 현실적 투쟁의 목표로 삼기에는 너무 일반적인 관념이 지지되거나, 강력하고 집약적인 의제를 설정하기에는 너무 다양한 요구들이 넘쳐났다. 촛불항쟁이 보여준 것은 특정한 계급의 강력한 요구가 아니라, 모든 성적·계급적 귀

  1. 심보선·서동욱·김행숙·신형철 좌담 「감각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에서」, 『문학동네』 2009년 봄호 368면.
  2. 진은영 「감각적인 것의 분배」,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69면.
  3. 심보선·이현우·오은·이문재 좌담 「‘촛불’은 질문이다」 중 이문재의 말, 『문학동네』 2008년 가을호 42면.
  4. 남궁선 「끝없이 쏟아내는 아이」(김사과 작가초상), 『문학동네』 2009년 겨울호 135~3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