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문학이란 무엇인가

 

대과(大過) 시대의 글쓰기

 

 

김상환 金上煥

서울대 철학과 교수. 저서로 『해체론 시대의 철학』 『예술가를 위한 형이상학』 『풍자와 해탈 혹은 사랑과 죽음-김수영론』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 등이 있다. kimsh@snu.ac.kr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는 이 델포이신전의 경구를 앞세워 시인의 시대에 종언을 고했다. 호메로스 이래 그리스의 역사적 현실을 조형하던 시적 사유의 입법적 권위를 “너는 너 자신조차 모르잖아” “너나 잘하세요”라는 반어법을 통해 무너뜨린 것이다. 그렇다면 시란, 문학이란 무엇인가? 이후 문학의 본질을 규정하는 무수한 정의가 있어왔다.

계몽주의로 구현되던 철인 왕의 이념에 도전하고 시인 왕 이념의 복권을 꿈꾸던 사조가 초기 낭만주의였다. 이 사조의 대변자 슐레겔(J. E. Schlegel)은 자신의 본질로 복귀한 문학을 낭만주의 문학으로, 낭만주의 문학의 핵심을 아이러니로 보았다. 여기서 “문학은 아이러니”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물음과 대답이 전도의 가능성 속에 수렴되는 역설의 지대, 그것이 문학의 고유한 공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등식에 도달하는 사색의 여정은 소크라테스의 반어법에 대한 창조적 해석에서 시작되었고, 결국 소크라테스에게 “나를 알려 하지 말라” “나의 비밀은 너의 무지에 있다”는 경고를 돌려준 셈이다. 이후 철학과 문학의 관계는 계속 쫓고 쫓기는 관계의 연속이었다. 철학은 문학을 자신의 무한한 개념적 매개의 능력을 증명하는 마지막 시험대로 삼았다. 반면 문학은 이론적 매개가 불가능한 지점에서만 어떤 의미를 생산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자 했다.

문학의 본성을 둘러싼 논쟁은 이런 내기와 경쟁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철학의 이론적 시선은 계속 문학을 포획하려 하고, 문학은 그때마다 계속 거부하는 몸짓으로 달아나기 때문이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이런 내기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차라리 생각의 방을 바꾸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델포이신전의 지혜와는 다른 지혜의 세계는 없는가? “나비야 우리 방으로 가자.”(김수영) 가령 『주역(周易)』으로 전해지는 동양의 지혜는 분명 다르게 가르친다. 여기서 가르치는 것은 “너를 알라”가 아니라 “때를 알라”이다. 이제 알아야 하는 것은 사물의 중심에 있는 변하지 않는 본질이 아니라 “시간의 중심〔時中〕”에서 일어나는 사물의 변화이다. 앎이 어떤 능력이라면, 그것은 “시간의 한복판에 정확히 자리하기〔中正〕” “시간에 올라타기〔時乘〕”의 능력이다.

『주역』이 가르치는 시중의 논리에서 본질이나 정의는 하나일 수 없다. 하나의 사물이 놓일 수 있는 여러 국면이 있고, 그 국면마다 사물이 지켜야 할 도리나 분수는 변전한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따를 때 진리는 하나로 수렴된다. 그러나 “때를 알라”는 말 속에 설 때 진리는 여러 갈래로 분기(分岐)한다. 문학의 분수나 크기도 마찬가지다. 『주역』의 미학은 여전히 분기의 길들을 그리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어떤 모양으로?

이런 물음과 더불어 우리는 두가지를 희망할 수 있다. 동양의 인문적 전통의 원천에 있는 가장 중요한 고전인 『주역』, 바로 이 오래된 책에 담긴 미학을 현대적으로 되살릴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 첫번째 희망이다. 사실 서양이론을 쫓아다니는 것도 이제 신물이 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두번째 희망은 『주역』의 미학을 이 시대의 문학을 반성하는 거울로 삼을 수 있는 가능성에 있다. 오늘날 문학이 처한 운세를 『주역』에서 묻는다면, 점을 친다면 어떤 답이 나올 것인가? 하지만 이렇게 묻고자 할 때 『주역』은 반드시 먼저 묻는다. 어떤 때의 미래인가? 길을 묻는 자는 어떤 시간 위에 올라타고 있는가?

 

 

1. 대과 시대

 

21세기초의 역사적 현실은 보통 세계화시대라 불린다. 지구촌 전체가 하나의 체제로 통합되는 시기인데, 이런 단일 세계체제의 가능성은 두 종류의 보편자에 근거한다. 하나는 화폐/상품이라는 보편자이고, 다른 하나는 테크놀로지라는 보편자이다. 이 두 종류의 보편자는 오늘날 모든 종류의 가치를 번역하는 메타언어가 되었다. 이 메타언어를 통해 사물은 무한히 입자화(粒子化)되는 동시에 무한한 재결합의 가능성 안에 놓이게 된다.

사물이 모래알 같은 입자가 된다는 것은 자연적인 규정을 상실함을 말한다. 사물이 자연상태에서 지니던 유적 특성, 종적 개성 등은 어떤 차이와 종합, 대립과 공존의 원리였다. 그러나 이런 자연적인 인연의 끈은 혈연, 지연 등과 마찬가지로 등가적 교환의 문맥이나 기술적 대체의 문맥에서는 무력해진다. 자본과 첨단기술에 의해 번역되었을 때 사물과 사물을 엮던 자연적인 유대는 완전히 사상된다. 이것은 사물들의 고립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고립화는 어떤 한계 없는 결합 가능성에 놓이기 위한 준비에 불과하다.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만남과 결합이 자본의 순환 속에서, 기술의 자기진화 논리 안에서 현실화되고 있다.

이것은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처럼 보이던 모든 구별과 차이가 끊임없이 장소와 규모를 바꾼다는 것을 말한다. 세계화시대는 세계가 어떤 단일한 논리의 지배 아래 들어서는 시대이지만, 이것이 모든 차이가 사라진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인종의 차이, 계급의 차이, 성별의 차이, 시공간상의 차이, 문화적 차이, 세대의 차이 등등. 이런 차이를 표시하던 경계선은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위치와 강도를 바꾸고 있을 뿐이다. 이런 전치와 변이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어떤 혼종과 융합이다. 비빔밥의 나물처럼 끊임없이 섞이고 혼동되는 규정성들. 문제는 이런 일반적인 탈-장르의 경향이 자본과 기술의 요구에서 온다는 데 있다. 이 두 보편자가 설정해놓은 역사적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속화되는 순환과 대체의 논리에 따라야 하고, 따라서 각 장르의 고유한 내면적 중량과 종적 차이를 잊어야 한다. 그 망각이 생존의 조건인 것이다.

세계화시대가 화폐적 추상성과 기술적 추상성 속에서 종적 차이가 망각되는 시대라면, 이같은 망각은 데까르뜨의 보편수리학(mathesis universalis)과 더불어 처음 시작되었다. 자본주의와 기술문명은 이 데까르뜨적 이념이 최종적으로 실현되는 국면이다. 사실 근대과학은 “자연은 수학의 언어로 쓰인 책”이라는 신념에서 탄생했다. 고대인은 수학을 알았지만 결코 과학에 이용하지 않았다. 사물의 참된 모습은 양적인 측면보다 질적인 측면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양과 형식만을 갖춘 수학적 대상은 질이나 내용을 결여한 추상적 대상이다. 그런 불완전한 대상을 다루는 수학은 질과 양을 고루 갖춘 온전한 자연적 사물의 탐구에 개입할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근대의 몇몇 과학자들은 수학을 과학의 언어로 승격시켰고, 수학적 해석의 가능성을 과학적 탐구의 가능성 자체와 동일시했다.

이런 수리자연학의 계획이 일반화될 때 오랫동안 서양인의 사고방식을 지배해온 존재론적 구도가 무너져야 했다. 고대인은 자연이 무수한 종(種, species)이나 유(類, genos)들로 이루어졌고, 이 유들은 어떤 위계적 구도를 형성한다고 보았다. 모든 것에는 상하귀천이 있었다. 그러나 자연이 수학적 알파벳과 문법으로 기록된 책이라는 신념에서 이런 수직적 구도의 세계관은 무너져내리고, 대신 수평적 구도의 세계관이 자리잡을 수밖에 없다. 모든 종적 차이나 유적 차이, 모든 질적 차이는 가상으로 전락하거나 양적 차이로 환원된다. 양의 차이, 수적인 차이가 모든 차이를 설명하는 원리가 된다. 자연에 있는 것은 수라는 하나의 게노스뿐이다.

화폐와 기술은 모든 가치와 대상을 수적 연산의 가능성 안에서 재현한다는 점에서 똑같이 보편수리학의 이념을 구현하고 있다. 재현한다는 것은 재규정한다는 것이다. 데까르뜨는 자연적 사물 일반을 연장(延長)이라는 단순한 이름으로 정의했다. 이 단순한 정의와 더불어 자연적 사물이 가졌던 특수한 규정들은 그림자가 되었다. 연장이라는 것은 수적 차이를 지니는 어떤 것임을 말한다. 사물은 어떤 것이든 이제 수에 불과하다. 자본주의와 기술문명은 이런 존재이해를 일상의 세부에까지 관철시키고 있다. 19세기의 최고 인간학이던 골상학(骨相學)은 말했다. 정신은 뼈다. 그러나 오늘의 경제학은 말한다. 정신은, 당신은 수다. 세계화시대는 수학적 언어가 자신의 잠재력을 극단적으로 펼쳐가는 시대이고, 수학적 언어의 무한한 지배력 안에서 모든 종류의 차이가 끊임없이 전치·전도되는 시대이다. 이 시대에 모든 차이는 한없이 부유해야 할 운명이고 무한한 교환과 대체의 문맥 속에서 자율적이고 안정된 정체성을 잃어버린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수학적 언어의 잠재력이 실현되는 과정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혼종”과 “무중력 공간의 탄생”(이광호)은 자연언어의 진화과정에서도 똑같이 관찰할 수 있는 귀결이다. 모든 언어는 특정한 발전단계에서 사물의 중력을 박탈하는 장소를 만들어낸다. 니체는 서구문화를 지배해온 플라톤주의와 기독교가 허무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통찰했다. 그러나 플라톤주의와 기독교만이 허무주의 속에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이론, 사상 혹은 언어는 상승의 마지막 단계에서 허무주의와 유사한 형태를 띠게 된다. 허무주의 혹은 냉소주의는 모든 성장의 역사가 완결되는 종착역이다. 우리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특히 소외된 정신의 문화적 성숙(Bildung)을 서술하는 마지막 대목에서 이런 암시를 읽을 수 있다. 헤겔은 문화적 교양이 진화하여 극치의 세련성을 구가하는 시기를 분열의 시기라 불렀다. 그 시기는 사물이 지녔던 자연적인 규정이 왕성한 관념적 상상력과 조작 속에서 자유롭게 뒤바뀌는 시대, 따라서 사물의 고정된 정체성이 흔들리는 시기이다.

대과 괘

대과 괘

『주역』에서 이름을 찾자면, 이런 시기는 대과(大過)의 시기라 부를 수 있다. 28번째 괘인 대과의 괘(011110)는 아래가 나무(011)이고 위가 연못(110)으로 이루어져 있다.1 연못에 물이 너무 넘친 나머지 나무까지 모두 잠겨 있는 형국이다. 여기서 나무란 조직하는 질서, 제도, 정착된 규칙 등을 말한다. 연못의 물은 원시적인 생명력이자, 활력적이지만 아직 무질서한 에너지에 해당한다. 대과의 시기는 일정한 발전단계를 거쳐 한 사회가 획득한 왕성한 잠재력이 기존의 제도적 질서 위로 범람하는 때이다. 가령 우리 시대의 역사적 현실을 “흔들리는 분단체제”(백낙청)로 특징지을 수 있다면, 분단체제의 근간을 요동치게 만드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주역』의 시각에서 접근하자면, 그것은 그 체제의 여백에서 불쑥불쑥 자라난 새로운 종류의 사회적 에너지에 있다. 이 신생의 잠재력은 그 체제의 신진대사를 통해 창출되었지만, 그 체제의 조절장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방향과 리듬을 띠고 마침내 그 체제에 동요를 가져온다.

『주역』에서 대과 괘는 물질적 풍요를 상징하는

  1. 『주역』은 모든 사태를 부드러운 선과 강한 선, 끊어진 선과 이어진 선, 음효(陰爻)와 양효(陽爻)라는 두가지 선의 복합체로 표시한다. 철저한 선의 존재론. 우리는 그것을 계사(繼絲/繫辭)존재론이라 명명한 바 있다. 여기서 우리는 표기의 편리성을 위해 끊어진 선을 0으로, 이어진 선을 1로 표시하고 원래 괘의 맨 아래선을 맨 왼쪽에 표기한다. 이는 김인환의 표기법에 따른 것이다. 김인환 옮김 『주역』(나남출판 1997) 참조. 이 글에서 대본으로 삼은 책은 임채우 옮김 『주역 왕필주』(길 2000)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