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금희 金錦姬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너무 한낮의 연애』 『오직 한 사람의 차지』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 『복자에게』, 연작소설 『크리스마스 타일』 등이 있음.

 

 

 

장편연재 1

대온실 수리 보고서

 

 

이 열매는 지난해 시월 상달, 우리 둘의

조그마한 이야기가 비롯될 때 익은 것이어니.

 

작은 아씨야, 가녀린 동무야, 남몰래 깃들인

네 가슴에 졸음 조는 옥토끼가 한 쌍.

—정지용 「자류(柘榴)」 부분

 

 

1. 원서동

 

처음에 배운 건 수리의 종류에 관한 용어들이었다. 중수와 중창과 재건의 차이 같은 것. 면접을 끝내고 받아 온 『고건축용어사전』에서 가장 먼저 찾아본 말들이었다. 면접은 친구 은혜가 소개해준 자리였다. 건축사사무소인데 문화재 공사 백서 기록담당자를 채용하고 싶어한다고.

“내가 너 석모도 헤밍웨이라고 자랑 많이 했다. 저번에 시청이랑 해서 낸 저서도 보내주고, 그 독수리 책.”

시에서 지원을 받아 작업한 그 책은 강화에서 겨울을 나는 철새 흰꼬리수리와 흰죽지수리에 관한 일종의 홍보자료였다. 같은 맹금류라도 그 둘은 독수리와는 다른 종이고 홍보책자 역시 내 저서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나는 은혜에게 애썼네, 하고 인사했다. 나와 여러모로 다른 은혜는 어떻게든 일은 되게 만들어야 한다는 신조로 항상 뭔가를 추진 중이었다. 주로 사람과 사람을 엮는, 녹록지 않은 일을 맡았고 그래서 섬 친구들 사이에서도 별명이 추진체였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보내고 며칠 뒤에 파주에서 면접을 봤다. 면접 자리에 나온 사람은 사무소 소장이 아니라 함께 일하는 동업자라고 했다. 동업자라고 해도 회사 내 무슨 직함이 있겠지 싶었는데 그런 건 없고 부를 때는 ‘소목수’라고 하면 된다고 했다. 커피를 가져다준 젊은 직원도 “소목님, 여기” 하며 잔을 두고 갔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낼 때마다 왜 일반 대학이 아닌 학점은행제로 학위를 땄는가를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여왔지만 그는 그런 질문은 하지 않았다. 은혜가 보낸 책자를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고 하더니 줄곧 그 얘기만 계속했다. 특히 어린 흰죽지수리가 교동도 평야에서 다른 수리 떼와 까치, 까마귀들과 경쟁하다 산 정상을 차지하는 부분이 감동적이었다고 했다. 책자를 쓰면서 그저 관공서 유인물로 사용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누군가의 그런 소감을 듣는 일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살아 움직이는 수리는 아니지만 저희가 하는 집수리도 수리는 수리이니까, 이 일에서도 그런 장면들이 발견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그는 그 말을, 아까부터 반복하고 있는 두 팔을 활짝활짝 벌리는 과장된 제스처와 함께 했다. 나는 공사 백서를 건조하게 기록하는 일이 감동과 무슨 상관있을까 생각하면서도 감사합니다,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목수의 방은 건축사사무소라고 하면 떠오를 만한 세련되거나 모던한 구석이 전혀 없었다. 그저 너무 많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갖가지 것들이 쌓여 있었다. 철제로 된 선반, 진열장이 공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어디서 뜯어냈는지 모를 고목재와 건축 부속품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아까부터 느껴지던 나무 냄새는 거기서 난 모양이었다.

“석모도에서, 매일 나오시는 건 아니지만 오가기 어렵지 않으실까요?”

“이제 다리가 개통해서요. 서울은 좀 걸려도 여기까지는 한시간이면 옵니다.”

“아.”

소목수는 탄식하듯 말하더니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댔다. 나는 뭐가 잘못됐나 싶어 당황했는데 “그러면 이제 예전 석모도가 아니네요” 하는 소목수의 말이 이어졌다. 변화는 대교 공사가 시작되기 전부터도 있어왔다. 교량 건설 소문이 돌고 공사 계획과 무산이 거듭되는 동안 섬에서 그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모래 한톨도 없을 것이다. 육지와 이어진다는 사실은 기후가 바뀌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예측할 수 없는 혼란 아래 섬의 많은 것들이 생기거나 사라졌고 살거나 죽기도 했다.

“하다못해 갈매기들도 곤란하죠. 페리가 안 다니면 뱃전에서 사람들이 주는 새우깡도 못 먹으니까.”

소목수가 내 말에 동의하면서 갈매기들도 재취업이 필요해졌네요, 하고 웃지도 않고 대답했다. 나는 백서 작업을 하는 곳이 어디냐고 말을 돌렸다.

“창덕궁이랑 같이 있는 창경궁, 그 안에 대온실 있는 거 아시죠? 그 보수공사입니다.”

밑줄을 긋듯 그가 힘주어 대답했다. 모처럼 큰 공사를 맡아서 담당자들이 기대하고 있다고. 이런 대공사와 함께 온 걸 보면 영두씨가 운이 좋은 것 같다고.

하지만 나는 창경궁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아주 축축하고 차가운 이불에 덮인 것처럼 마음이 서늘해졌다. 내가 십대 시절을 보냈던 곳이 창덕궁 담장을 따라 형성된 서울의 동네, 원서동이었기 때문이다.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면 더 짙고 선명해지던 검은 기와들의 윤기가 생각났고, 하숙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그 당시 3번 마을버스를 타고 안국역과 빨래터와 정독도서관을 하염없이 돌던 열네살 때의 막막함이 또렷이 떠올랐다.

빨래터는 실제 정류장 이름이었고, 궁에서 흘러나오는 개울이 있는 곳이었다. 여름이면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고 동네 고양이들도 목을 축이며 빨래터 수문을 통해 창덕궁을 드나들곤 했다. 비탈을 내려가 자세히 보면 빨래터 물길은 사람이 허리를 굽히고 걸어갈 만한 지하 통로로 계속 이어져 있었다. 어린 나는 이 물은 어디로 향하는지 궁금해했고, 그것이 한강으로 강화로, 석모도의 서해바다로 흐르는지를 생각했다.

뜻밖의 장소가 나와 망설여진 나는 기대보다 적은 작업비를 핑계로 들더라도 면접을 그만 끝내야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소목수는 “차차 배우시겠지만 그래도 요런 사전 정도는 가지고 계셔야겠죠”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뒤지기 시작했다.

“작도야, 그거 어딨지? 그거.”

아까 커피를 가져다준 직원이 아주 느리고 천천히 슬리퍼를 질질 끌며 다가왔고 얼굴만 쏙 내밀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작도 너 어제도 밤새웠냐?”

작도라고 불린 그의 얼굴에는 불면과 과로 그리고 오래된 피로가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뭐가 필요하세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묻자 소목수는 “내가 할게, 여기 인사드리고” 하며 내 쪽을 바라보았다. 문간에서 느릿느릿 걸어 들어온 그는 희미하게 웃더니 “제가 대온실 담당입니다” 하고 인사했다.

“작도는 제가 작도의 신이라 붙은 별명이고, 은세창 대리입니다.”

“세창, 가서 마저 작도해라. 오늘은 집에 꼭 가고.”

“어차피 못 가요.”

그렇게 남자가 사라지고 나서도 어지러운 사무실을 오가며 뭔가를 열심히 찾던 소목수는 이내 새의 눈처럼 또렷한 옹이가 진 나무판을 들춰내고 책 한권을 꺼냈다. 가죽 양장의 그 책에는 ‘고건축용어사전’이라는 글씨가 크게 쓰여 있었다.

 

그날 섬으로 돌아가자마자 은혜에게 연락이 왔다. 면접 결과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할 수 없이 차를 몰고 은혜네 부동산으로 갔는데 정작 은혜는 오늘 이사 들어온 집이 있다며 바로 또 나가버렸다. 맡을까 말까. 하지 않을 거라면 빨리 연락을 해야 은혜도 난처하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부동산에 앉아 대교 너머로 해가 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붉은 기운이 돌더니 얼룩덜룩한 까치놀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돌아보면 항상 어떤 장소를 지워버림으로써 삶을 견뎌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잊어야겠다 싶은 장소들은 아예 발길을 끊어서 최대한 망각할 수 있게 노력해왔지만 이 일을 맡으면 그곳에 대해 생각하고 더 알게 될 것이었다. 거기에는 일년 남짓의 내 임시 일자리가 있었고 600년 전에 건축된 고궁이 있었고 잊지 않으면 살 수가 없겠구나 싶어 망각을 결심한 낙원하숙이 있었다.

“이모, 엄마 또 나갔어요?”

문이 열리더니 은혜의 딸 산아가 헤드폰을 쓰고 들어왔다.

“누가 이사 들어온다고 나가던데 누가 왔니?”

“아, 걘가보네, 우리 반으로 전학 온다더라. 말을 안 하는 애라던데?”

“말을 못하는 친구라고?”

나는 그렇게 되물었다.

“아니, 안 한대요.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한대. 일년 넘게 말을 안 하고 있대. 엄마가 신경 쓰래. 엄만 왜 나한테만 그러는지.”

“산아가 어린이회장이니까 그렇지.”

“아니야, 엄마 부동산 손님들이니까 그렇지. 우리 엄마 돈 찐으로 좋아하잖아. 하느님, 용서하소서.”

나는 진지한 산아의 표정이 재미있어서 사전을 덮고 웃고 말았다. 은혜가 추진체라면 산아는 그 위에 얹어진 빛나는 인공위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똑똑하고 야무져서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섬에서 가장 책을 좋아하는 아이였고 그만큼 조숙해서 다른 사람을 헤아릴 줄 알았다. 누군가 전학 올 때마다 그 아이가 잘 섞여들도록 돕는 것도 산아의 몫이었다. 물론 그런 역할이 주어질 때마다 본인은 투덜거렸지만 지금도 말은 그렇게 하고 태블릿 피씨로 구글에서 말 안 하는 아이를 검색하고 있었다.

“그 사전은 뭔데, 이모?”

필요한 내용을 찾았는지 한동안 집중해서 읽던 산아가 사전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오늘 면접에서 받아 온 옛날 건축에 관한 사전이라고 설명하고 몇몇 용어를 알려주었다. 중수는 손질하여 고치는 것, 중창은 다시 짓는 것, 재건은 크게 일으켜 세우는 것이라고. 한옥에서 문은 창살무늬에 따라 이름이 다 달라서, 세로살을 꽉 채우고 가로살은 위아래와 중간에만 넣은 건 세살문, 가로살과 세로살을 다 채운 문은 만살문, 문 중간에 빛이 들어갈 수 있도록 사각형이나 팔각형으로 작은 창을 낸 문은 불발기문, ‘完’ 자 형태로 살을 짠 문은 완자문, ‘亞’ 자 무늬가 있으면 아자문이라고 한다고. 산아는 정말 흥미가 가는 건지 설명을 유심히 듣더니 그러면 이모가 고치는 문은 어떤 거냐고 물었다.

“거긴 유리 온실이라 이런 문은 없어.”

“그러면 왜 보고 있는 거예요? 시간 아깝게.”

산아는 정말이지 그렇게 시간을 허투루 쓰면 안 된다는 듯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맞아, 사실 이모 이 일 안 할지도 몰라.”

나는 가방에 사전을 넣고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은혜가 오지 않으면 산아랑 밥을 먹어야 할 텐데 외식할 곳도 없는 여기서 뭘 먹나 생각하면서. 섬 식당들은 해가 지면 대체로 운영을 마쳤다. 연륙교가 생기면서 관광객들이 늘기는 했지만 여전히 섬에서는 해가 일상을 열고 해가 하루를 닫았다.

“왜 안 하려고 하는데요?”

산아는 태블릿 피씨에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모르겠어.”

“그럼 하면 되잖아.”

“모르겠으면 하면 되는 건가?”

“나는 모르겠으면 그냥 하거든. 아까 인사한 선생님인 것 같은데 또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싶으면 그냥 해. 자기 전에 양치를 했나 안 했나 헷갈릴 때도 그냥 하고.”

“그럼 나도 그냥 해야겠네.”

“그래, 해요. 이모는 너무 돈에 관심이 없어. 이모랑 우리 엄마를 반반 섞었어야 했는데.”

산아는 일단 일을 시작해보고 자기에게 어떤지 말해달라고 했다. 자기도 그 말 안 하는 아이를 어떻게 대할지 연구해보고 나에게 상의를 하겠다는 거였다. 주일에 성당 미사 끝나고 자기랑 만나서 차를 한잔하자고, 자기는 돈이 없으니까 차는 이모가 사고 대신 자기는 간식을 준비해 오겠다고.

“간식도 이모가 준비할게. 산아는 몸만 와.”

“싫어요. 이모가 다 쓰는 거 과소비예요.”

과소비는 은혜가 뭘 사주고 싶지 않을 때 산아에게 자주 하는 말이라서 나는 또 피식 웃었다. 은혜가 어디서 났는지 화분 두개를 얻어 들고 부동산으로 돌아왔고 우리는 은혜네 집으로 가 삼겹살을 구워서 저녁을 먹었다. 은혜는 펜션이나 까페 자리를 알아보러 다니는 사람들이 꼭 외지 부동산중개인들을 끼고 와 동네 물을 흐려놓는다고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자기 이제 서울에서 왔다고 매물 좀 보여주시겨 하면 없시다 해. 딱 그 차림이 있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번지르르하고 인사도 잘하고 싹싹하게 굴다가 이쌈네저쌈네 보여주면 나중에 뒤통수친다니깐?”

은혜가 말했다. 그리고 산아가 자러 가자 작업비는 얼마나 주더냐고 물었다. 매일 출근은 아니어도 교통비 빼면 한달에 백만원이나 남을까 싶다고 하자 실망한 눈치였다. 자기는 괜찮으니 돈이 걸리면 하지 말라고 말렸다.

“나 중학교 때 서울 가서 살았잖아? 거기가 창경궁 근처였거든. 못난 소리지만 그것도 내키지가 않네.”

그때 얘기가 나오자 은혜는 조심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출생신고하면서부터 친구였던 우리는 내 전학으로 잠시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줄곧 친구로서 서로의 삶을 지켜봐왔다. 그런 은혜에게도 서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말하지 않았다. 뭘 숨기고 싶었다기보다 어려서는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커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어떤 시간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떠올리거나 반추하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생각을 거듭하다보면 그 시절의 모든 것은 결국 창백하게 축소되어 초라해지기만 했다.

“조건 안 맞으면 안 해도 돼. 너 어디 문화센터 강좌 일 시작할지도 모른다며.”

은혜가 배웅하며 말했다. 찬 밤바람 속에서도 여름으로의 진입은 분명히 느껴졌는데, 그건 공간이 훤하게 열리는 개방감 같은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자기가 원하는 만큼의 에너지를 성성하게 드러내도 될 정도로 공기가 바다가 하늘이 열리고 있었다. 나는 밤의 바다에서 아마도 낚시꾼들을 태우고 나갔을 어선들의 피로한 불빛을 살펴보다가 손을 흔들며 차에 올라탔다.

 

그 당시 석모도 아이들은 중학교를 마치면 섬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상급 학교가 없어 강화 읍내나 가까운 대도시 인천으로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강화 읍내든 인천이든 돈이 드는 건 마찬가지였고, 아빠 형편으로는 도움을 받지 않으면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중학교 1학년을 마쳐갈 때쯤부터 아빠는 그 일을 걱정했다. 자취방을 나눠 써줄 섬 졸업생을 찾거나 집에서 지내게 해줄 먼 친척들을 수소문해봐야 했다.

그런데 아빠는 엉뚱하게도 서울의 낙원하숙을 떠올렸다. 하숙집 주인인 안문자 할머니는 외할머니의 둘도 없는 친구였고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아빠와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주로 쌀이나 젓갈, 고구마 같은 걸 주문하기 위해서였다. 강화에도 사셨다고 했지만 내게는 가끔 섬을 찾아와 식사하고 갔다는 정도의 기억만 있었다. 얼굴이 달걀처럼 갸르스름하고 체구가 작아 마치 아이처럼 느껴지는 노인이었다.

아빠의 고민을 들은 할머니는 의외의 말을 했다. 서울로 고등학교를 다니려면 차라리 빨리 전학을 오라고 한 거였다. 리사라는 이름의 자기 손녀도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로 전학 와서 그나마 적응이 빨랐다고. 나는 할머니가 우리 집 형편을 모르고 하는 얘기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더이상 배를 타지 않는 아빠는 섬에서 손 닿는 대로 일하며 살고 있었다. 불성실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안정적이거나 주기적이지 않았다는 말일 뿐이다. 아빠는 봄가을에는 새우 건조장에서 일하고 관광객이 많은 여름에는 횟집에서 주차 관리를 하거나 때론 외포리 모텔촌에서 공사 인부로 일하기도 했다. 엄마의 옛 친구가 하는 염전에서도 가끔 트럭으로 소금 배달을 했다.

“낙원집 할머니가 공부를 많이 하셨더랬거든.”

어느날 아빠는 우리의 가장 큰 문제—돈의 없음—는 건너뛰고 그런 뜬금없는 얘기를 꺼냈다.

“그럼 오잘머니랑 할머이서껀 학교 친구였나봐.”

나도 싱겁게 응수했다. 누가 들으면 쓸모없게 느껴지는 얘기를 하면서 핵심을 적당히 피해 가는 데 우리는 죽이 잘 맞았다. 그렇게 눈앞에 놓인 너무 어렵고 뜨겁고 슬픈 문제는 에두르고 각자 할 수 있는 만큼의 걱정을 했다.

“영두야, 섬에서 학교 나온 할머이가 어딨냐? 건저 시장에서 일만 하는데 학교를 언제 갈 수가 있어?”

하기는 그랬다. 외할머니도 다른 마을 할머니들처럼 포구에서 하루를 보냈으니까. 마을 할머니들은 거기서 바다에서 끌어 올려진 죽은 것들과 싸우고 있었다. 엄청난 양의 새우며 밴댕이며 하는 것들을 옮겼고 소금 포대를 쏟아부었다. 포구에 나가보면 그런 할머니들이 신고 다니는 고무장화와 고무앞치마 그리고 고무장갑에서 뻐걱뻐걱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밤 풀숲에서 들리는 두꺼비 소리나 여름 바다를 차지한 민어 떼들의 우렁찬 울음과도 비슷한 소리였다. 물론 그렇게 우는 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