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금희 金錦姬

소설집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너무 한낮의 연애』 『오직 한 사람의 차지』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 『복자에게』, 연작소설 『크리스마스 타일』 등이 있음.

 

 

 

장편연재 2

대온실 수리 보고서

 

 

정문 매표소에는 외국인 몇명이 표를 사고 있었다. 제갈도희는 이쯤 해서 사무실에 연락을 해놓자고 했다. 대문간에서 쫓아낼 정도로 냉혈한은 아닐 테니까. 제갈도희가 매표소 사무실로 들어가 내선전화로 통화하는 동안 나는 외국인들을 인솔해서 투어를 시작하는 해설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생활한복을 입고 헤드셋을 쓴 해설사는 영어와 일본어를 섞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영어 투어에 들어와 있는 일본 관광객들을 배려한 것 같았다. 또 한편에는 노인들이 모자를 맞춰 쓰고 대기하고 있었는데 해설사가 일본어를 한마디 할 때마다 등산스틱을 들고 있던 노인이 알은체를 했다.

“매화나무라고 하는구먼. 이 다리 옆이 죄 매화래. 야간개장 때 음악회도 한다고 하니까 지금 저 일본인들이 와, 하는 거야.”

“와,는 무슨 와. 요즘엔 이렇게 왕래해도 원수는 원수지.”

“그렇지. 그러니까 이승만 때는 말이야, 쪽바리놈들은 오지도 가지도 말라 했다고.”

“저기 아버님,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돼요.”

해설사가 마이크로 노인을 불렀다.

“손님들이잖아요.”

노인은 뜨끔하는가 싶더니 “아니 역사가 그렇다는 거지, 나도 어려서 일본어를 배웠어요” 하고 오히려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니까요, 배우신 분이 그러면 더 안 되죠. 여기도 한국어 하시는 분들 계세요. 자, 에브리바디 레츠 고 백 투 조선. 사아, 쵸오센에타이무스릿뿌시떼미마쇼오까? 아버님도 궁궐 잘 보고 가시고요.”

세 언어로 상황을 정리한 해설사는 옥천교를 건너다 해치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그 당시 목조건물에는 화재가 큰 문제였기 때문에 상상의 동물 해치를 세워두어 궁궐을 화마로부터 지키려 했다는 내용이었다. 사무실과 연락이 닿았는지 제갈도희가 나와서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적어도 미팅을 못하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동궐관리청은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을 거쳐 문정문으로 나와 숲길을 걸으면 닿는 관천대 옆에 있었다. 세살문 창을 단 단층 한옥건물이었다. 제갈도희가 엎어져 있던 ‘외부인 출입을 금합니다’ 표지판을 세우며 관리청으로 들어갔다. 게양대에 달린 태극기가 건물의 검정기와에 닿을 듯 크게 펄럭이고 있었다. 게양대는 고궁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셈이었다.

건물 안은 책상과 파티션이 놓인 현대식 사무실이었다. 직원 한명이 제갈도희를 보고는 알은체했고 장과장이 지금 자리를 잠깐 비웠다고 알려주었다. 제갈도희가 대온실 공사를 담당하는 왕주웅 주무관이라며 그 직원을 소개해주었다. 제갈도희와 왕주무관은 담소를 주고받더니 며칠 뒤 상세실측 때 관리청과 건축사무소 실무자들끼리 점심식사를 같이하자고 얘기를 나눴다.

“완전 좋죠. 이 근처에 맛집도 많잖아요?”

“도희 디자이너님은 뭐 좋아하세요?”

“안 좋아하는 게 없죠.”

주무관이 잠깐 자리를 뜨자 제갈도희가 “저 주무관님이 올봄에 발령받은 신입직원이거든요. 그래서 아직 영혼이 살아 있어요” 하고 속삭였다. 나는 영혼이라는 말에 웃었다. 사십분을 기다려도 장과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주무관이 한번 전화를 걸어주었지만 연결은 안 됐다. 나는 기다리는 건 아무렇지 않았는데 제갈도희가 점점 숨을 가쁘게 쉬는 게 신경 쓰였다. 이 의협심 강한 곤줄박이는 금방이라도 깃털을 잔뜩 부풀린 채 일어나 이 무례한 대기 상태에 대해 항의할지도 몰랐다. 그전에 장과장이 왔으면 좋겠다고 초조해하며 공문을 재차 확인하는데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장과장이 아니라 아까 홍화문에서 봤던 해설사였다.

“연구사님, 벌써 네시차 끝났어요?” 왕주무관이 묻자 “비가 와서 종료했어요. 선생님들 모르고 있었어요?” 하며 그가 머리를 털었다. 누군가 창을 열었고 굵게 떨어지는 빗방울이 지붕을 흘러 처마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직원들이 일어나 무채색 고궁 담장들 위에 만들어지는 빗자국들을 지켜보았다.

“이런 풍광 보며 일하시면 좋겠다. 차분하고 조용하고.”

제갈도희가 해설사에게 말했다.

“그런데 빈집 지키는 기분 같은 걸 느낄 때가 있어요. 뭐라도 채워져 있는 곳은 대온실밖에 없잖아요. 원래 쓰임대로 있는 건 거기뿐이야.”

“왜요, 책고에 책들도 있잖아요.”

왕주무관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학예연구사 오아랑씨를 우리에게 소개했다.

“과장님 왔네.”

창밖을 보던 직원들이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차 한대가 들어오고 남자가 내렸다. 아랑씨도 탕비실로 사라지고 왕주무관만 입구를 서성이고 있었다. 그리고 사무실로 들어온 장과장이 매트에 신발을 터는 동안 우리의 방문을 알렸다. 우리를 힐끔 본 과장은 “그래?” 하고 반응한 뒤 책상으로 직행했다. 그리고 책상 위 공문부터 확인하더니 정말 믿을 수 없게 서랍에서 자를 꺼내 서류의 여백을 재기 시작했다. 미리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실제로 보니 너무 괴이하게 느껴져서, 혹시 이 모든 상황이 별로 재미없는 장난 아닌가도 싶었다. 하지만 장과장은 한참이나 공문을 살폈고 드디어 우리를 불렀다.

“저희가 자료 대출까지는 협조를 안 해요.”

장과장은 고개를 들지 않고 말했다.

“우리가 일해주려면 뭣 하러 수주를 줍니까? 우리가 하지.”

옆에서 제갈도희가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뭘 더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있는 자료를 빌려달라는데 냉담하게 나오다니. 나는 괜히 일을 만들었나 싶었다.

“그러면 할 수 없겠네요.”

내가 책상 위에 놓인 공문을 집어들려고 하자 장과장이 볼펜을 들고 몇군데에 줄을 그었다. ‘해방 이후 복원’이라는 부분을 가리킨 그는 “해방 이후에는 케이블카랑 대관람차까지 세워서 아예 놀이공원을 만들었죠. 복원이라고 하려면 1983년이 기점이에요”라고 정정했다.

“표현이 그렇게 됐지만 그 무렵 복원공사에 대해서는 저도 알고 있어요. 동물원이랑 식물원도 옮겨 가고, 그래서 그 중건 보고서를 촬영하려는 것이고요.”

“설계도서 조사를 이렇게까지 해요? 나쁘다는 건 아닌데……”

장과장의 말투는 덤덤했지만 여전히 불만스러워서 무슨 의도로 질문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저희는 설계도서뿐 아니라 공사 완료 후 최종 수리 보고서까지 맡았어요. 그리고 문화재청 고시 문화재수리 설계도서 작성기준령 5조를 보면 수리대상과 환경에 대한 철저한 고증 및 현황조사에 근거해 작성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고요. 법령에 명시된 이상 따를 수밖에 없죠. 제대로 된 고증 없이는 제대로 된 복원도 없다고 저희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사람 얼굴 대신 종이만 보고 있던 장과장은 마지막으로 ‘시민에게 개방’이라는 부분에 흐릿한 선을 그으면서 “그 당시 경성 사람들을 시민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을 거예요”라고 한 뒤 결재란에 싸인했다. 관리청의 자료실은 창덕궁 궐내각사 건물에 있다고 했다. 아까 왕주무관이 잠깐 언급했던 책고 건물이었다. 아랑씨가 우리를 안내하겠다며 나섰고 우리는 사무소를 나가 이제 비가 그친 풀밭을 걸었다. 통명전을 통과해 계단을 오르니 창경궁에서 창덕궁으로 넘어가는 문이 있었다. 현판은 없지만 ‘함양문’이라고 아랑씨가 알려주었다.

아랑씨는 건물들을 지날 때마다 시선 닿는 곳들을 설명했다. 저 건물이 왕과 왕비가 살았던 희정당이에요. 저기 가게는 원래 관리들이 회의하던 빈청이었는데 일제시대 때 자동차 보관하는 어차고가 되고 지금은 까페로 써요. 호박식혜가 맛있어요. 이 밑으로 가면 이방자 여사가 계셨던 낙선재가 나와요. 창덕궁 건물을 바라보자 그 담을 끼고 있는 원서동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고궁에 곁붙어 있다는 건 그 동네의 가장 큰 특징이었지만 그때의 내가 그곳을 특별하게 느끼기 시작한 건 그 때문은 아니었다.

그건 주유소에서 내 코트를 망쳐버린 금성무 역시 원서동에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였다. 번호를 받은 건 나였지만 세탁비를 물어내라고 연락하지는 못했다. 차라리 내 연락처를 알려줬어야 했는데, 나는 뒤늦게야 생각했다. 그러면 물때를 기다리듯 편안하게 연락을 기다리면 되는데.

 

강화보다 서울이 더 춥게 느껴졌던 나는 4월까지 코트를 입었고 옷자락에 묻은 기름자국도 그렇게 봄까지 학교생활을 함께했다. 리사와 나는 학교에서 바로 옆 반이 되었다. 한 반이 아니니 서로의 생활을 낱낱이 알 수는 없어도 관심을 가지려 한다면 충분히 서로를 살필 수 있는 거리였다. 리사는 대체로 조용히 학교생활을 하는 것 같았다. 쉬는 시간에 지나다가 유리창을 통해 힐끔 보면 십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책을 펴놓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친구가 없는 건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전교 1등만 한다는 키 작고 안경 쓴 여자애와 급식을 함께 먹고 교정을 거닐었다. 하지만 그애는 전혀 인기가 없어서 리사가 정말 좋아서 그애랑 다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언젠가 붓글씨시간에 누군가 실수로 전교 1등에게 먹물을 쏟았는데 선도위원회에 회부되어 징계를 받았다고 했다. 의도적이라며 부모가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병원을 운영하는 그 부모는 학교 일에 꽤 많이 간여하고 있었다. 리사와 내가 한집에 사는 것을 모르는 애들은 내 앞에서 전교 1등을 빽으로, 리사를 빽라이트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그리고 리사가 빽에게 달라붙어 있는 것이 일종의 후광효과를 누리기 위해 머리를 쓰는 것이라고 흉봤다.

학생 수가 많아서 그런지 교실은 마치 퍼즐판처럼 세밀한 경계로 각자 나뉘어 있었다. 전교생이라고 해봤자 서른명도 되지 않는 석모도에서는 그물처럼 성글었던 구분들이 여기서는 한층 촘촘해졌다. 어디 사는지, 출신 초등학교가 어딘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어느 학원을 다니는지가 너무 중요한 기준이었다. 내 하굣길을 누가 볼까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어 보였다. 학교가 끝나면 아이들은 자기 그룹의 승합차를 타고 일시에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혼자 먼 길을 돌아 지하철을 타면서 대체 리사가 뭘 걱정하고 있는지 냉소했다. 아무도 누구도 관심 없다. 새학기가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런 문장들을 마음속에 끊임없이 써보는, 리사의 충고대로 덜 웃는 아이가 되었다. 아무도 누구도 관심 없다, 나에게,라고 더 정확히 되뇌면 그 차가운 말에 마음까지 얼어붙을 듯하면서도 곧 그것에 지지 않겠다는 미약한 저항감이 들곤 했다. 음울함의 풀장으로 뛰어드는 건 어쩌면 어떻게든 힘을 내어 수면 밖으로 나오고 싶어서일지도 몰랐다. 그러던 4월의 어느날, 동네로 접어드는데 누군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 말고 나를 불렀다. 고개를 들었더니 꽃샘추위가 만만치 않은 계절에 벌써부터 티셔츠 하나만 달랑 입은 금성무가 있었다.

“아직도 코트 입고 다녀?”

잘생긴 이목구비 때문에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얼굴이지만 나는 누군지 못 알아본 척을 했다. 금성무는 자전거에서 내리더니 내 코트자락을 가리키면서 “아직도 세탁 안 한 거야?” 하고 다시 말했다.

“지우지도 않았으면서 왜 연락 안 했어?”

“내가 공부가 바빠서.”

“얼마나 바쁘길래 옷도 안 빨고 다녀?”

“모의고사가 멀지 않아서.”

“모의고사 그거 학기 초에 보는 거 아니지 않아? 내가 공고 다녀서 잘은 모르지만 암튼 복장단정은 학생의 기본이다.”

나는 자세를 바꿔서 기름자국이 보이지 않게 했다. 이렇게 만든 게 누군데 왜 내가 충고를 들어야 하는지. 서서히 열이 받기 시작했다.

“내가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세탁소가 어딨는지 몰라.”

“너 어디 사는데?”

나는 손가락으로 낙원하숙의 나무대문을 가리켰다. 저녁 햇살을 받은 대문에서는 손잡이 부분만 반짝 빛났다.

“아, 일수집 할머니네 사는구나.”

나는 놀라서 눈이 동그래지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금성무는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그리고 나를 데리고 럭키세탁소로 갔다.

“순신이 왔냐?”

세탁소 사장이 다림질을 하면서 물었다.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뭘 다리고 있나 봤더니 지폐들이었다. 세종대왕과 퇴계 이황의 얼굴이 팽팽하게 펴지고 있었다. 순신이라고 불린 금성무는 내게 코트를 벗으라고 했다.

“그러면 내일부터 뭐 입어?”

나는 누가 코트를 뺏기라도 할 듯 주머니에 넣은 손으로 그 안의 솔기를 꽉 쥐었다.

“요즘 같은 날씨에 코트 입고 다니는 게 정상이니? 내일부터 안 입고 다녀봐. 다닐 만할걸?”

금성무는 그렇게 설득했고 세탁소 사장도 “지금은 겨울옷을 싹 정리해서 넣을 때지. 입을 때는 아니야” 하고 도왔다. 하기는 강화에 있었다면 지금까지 코트를 입고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추웠고 그건 몸을 덥히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나를 안정적으로 눌러줄 얼마간의 무게가 필요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나 같은 건 누군가 놓친 유원지 풍선처럼 날아가버려도 그만일 테니까. 대문 밖만 나가면 아는 얼굴들이 나타나는 섬과, 사람 물살을 헤치고 다닐 때마다 생소한 얼굴들이 차고 슬프게 다가왔다 사라지는 이곳의 봄은 완전히 다른 계절이었다.

나는 눈치를 보다 책가방을 내리고 코트를 벗었다. 하지만 최후의 자존심을 지킬 요량으로 직접 세탁소 사장에게 내밀었다. 코트를 받아 들려고 기다리던 금성무는 내 얼굴을 잠깐 살피더니 머쓱해져 손을 거뒀다. 세탁소 사장은 사흘 뒤에 찾으러 오라고 했다.

“내가 찾아서 갖다줄게. 우리 집이 바로 여기거든.”

금성무가 가리킨 곳에는 골무늬 플라스틱 지붕의 단층집들이 서 있었다. 지붕과 복도를 공유한 단칸방들이 붙어 있는 형태였다. 창덕궁의 사괴석 담장과 집들 사이에는 소보로빵의 표면처럼 덩어리진 시멘트 반죽이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금성무는 세탁소 일을 처리하더니 잘 가라, 하고 다시 자전거를 타고 도로 쪽으로 달려갔다. 행인들을 요리조리 피해 가더니 아는 누군가를 만났는지 한 손을 들어 흔들었다. 막상 웃옷을 벗어보니 별로 춥지는 않았다. 나는 봄의 저녁 바람을 잡을 듯이 손을 한번 내밀어보았다.

 

웅장한 팔작지붕을 한 인정전 앞에는 어도가 펼쳐져 있고 양편의 품계석들 사이로 관광객들이 여기저기 돌아보고 있었다.

“연구사님이 생각하는 창덕궁 핫스폿은 어디예요? 저도 한번 가보게요.” 제갈도희가 물었다.

“인기 있는 곳은 정말 많죠. 누구는 후원이 최고다, 누구는 일월오봉도와 옥좌가 놓인 인정전이 멋지다. 그런데 저는 낙선재 같아요. 모던하고 섬세하고. 꽃담과 만월문 창살도 유명하지만 저는 거기 아궁이 빙벽이 그렇게 마음에 들어요.”

“아궁이벽이요? 전문가라 디테일이 다르시네요.”

그 벽은 낙선재 누마루 아래 있어서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데 특이하게도 깨진 얼음 모양을 하고 있다고 했다. 아궁이 불씨를 막는 화방벽으로 화재를 예방하려는 바람을 담아 얼음을 새겨넣었는데 마치 벽화처럼 보이기도 한다고. 불길을 덮으려는 깨진 얼음들이 어딘가 조선의 역사를 생각하게 한다고. 저마다 갈라진 운명이라 다시 하나로 맞춰보기 어려울 정도로 나뉜 세계같이.

“연구사님은 역사 전공이세요?” 내가 아랑씨에게 물었다.

“아뇨, 문화예술경영 전공했고 어공이에요.”

내가 어공이라는 말을 못 알아듣자 제갈도희가 ‘어쩌다 공무원’의 준말이라고 알려주었다. 공무원시험을 거치지 않은 임기제 공무원을 가리킨다고.

“영두씨는 역사 전공하셨어요? 건축?”

“아뇨, 저는 국문과 나왔는데 어쩌다보니 지금 수리 보고서를 쓰게 됐네요.”

“영두님은 석모도 헤밍웨이라고 하십니다.”

제갈도희가 빗물에 파인 웅덩이를 넘으며 말했다.

“이렇게 꼼꼼히 자료 찾아달라고 하는 분 처음이에요. 더 큰 공사 할 때도 없었어. 저도 도울 일 있음 도울게요.”

“감사합니다.”

“저한테는 공문 안 쓰셔도 돼요. 나 그런 거 싫어해.”

우리는 같이 웃다가 봉모당에 다다랐고 700년 된 향나무 앞에 섰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는 높이보다 부피를 키워 양옆에 육중한 가지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오래되어 이제 광물처럼 단단해 보이는 가지에는 나뭇결이 뚜렷하게 소용돌이쳤다. 우리는 잠시 냄새를 맡았다. 아랑씨는 향나무 어딘가에 원숭이가 있다며 찾아보라고 했다.

“원숭이를 풀어놨어요?”

제갈도희와 내가 이리저리 둘러봤지만 오목눈이들이 긴 꼬리를 흔들며 가지를 옮겨 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아랑씨는 바닥까지 닿은 향나무 가지를 가리키며 관람객들이 원숭이 모양이라고 한다고 알려주었다. 가지의 휜 모양이 정말 원숭이 얼굴과 굽은 등처럼 보였다.

“원래 창경궁에 동물원이 있었다고, 저희 부모님도 그런 거 기억하시더라고요.”

“영두씨 이십대죠? 우리 중에는 그때 일 기억하는 사람 없을걸요. 서울대공원으로 다 옮겨가고 한참 뒤라서.”

우리는 봉모당을 가로질러 책고에 도착했다. 붉은 나무판으로 마감한 다섯칸짜리 건물이었다. 제갈도희가 나무벽 아랫부분을 가리키면서 통풍을 위해 일정하게 구멍을 뚫었다고 알려주었다. 책고에는 원래 궁중의 책들이 보관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연구원 등지로 옮기고 동궐관리청에서 관리하는 정부간행물들이 주로 채워져 있었다. 필요하다고 해서 현대식 건물을 세울 수 없는 상황이다보니 복원된 궐내각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내부로 들어가니 윙윙 돌아가는 제습기 소리가 들렸고 철제책장들이 널찍한 간격으로 서 있었다. 책장을 살펴보며 걷는데 밑선반에 모여 있는 액자들이 눈에 띄었다.

“옛날 관리들 사진이에요.”

액자틀에는 먼지가 수북이 내려앉아 있었다. 아랑씨가 쪼그리고 앉아 하나씩 넘기며 이름을 읽었다. 궁내부차관이자 창경궁 공사 책임자였던 코미야 미호마쯔(小宮三保松), 박물관, 동물원, 정원 및 식물원을 담당하는 사무관으로 출발해 창경궁 총책임자로 20년을 일한 스에마쯔 쿠마히꼬(末松熊彦), 그의 뒤를 따라 창경원의 책임자가 된 시모꼬오리야마 세이이찌(下部山誠一). 창경궁사를 사전조사했을 때 한번씩 나왔던 이름들인데 사진으로 보자 실감이 더 뚜렷해졌다. 아랑씨는 동궐관리청 사업으로 역사서를 만들 때 시모꼬오리야마 세이이찌를 찾아보려 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전임 동궐관리청장에게 전해 들은 얘기였다. 1990년대의 일이었고 당시 그가 여든다섯 정도의 나이였기 때문에 충분히 인터뷰가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그의 행방을 찾을 수는 없었다고 했다.

“유명한 조류학자이기도 하고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여기를 지켰던 사람이라 궁금했겠죠.”

아랑씨는 여러 액자를 넘기다가 한 사진에 멈췄다.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입매가 얇은 남자가 흰색 셔츠를 넥타이도 없이 입고 있었다. 아랑씨는 어쩌면 내게는 이 사람도 중요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어려서 창경궁 대온실에 원정(苑丁)으로 취직해 사무국 지원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