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대중문화 속의 소설과 영화

김영하·하성란·홍상수의 작품들

 

 

한기욱 韓基煜

문학평론가. 인제대 영문과 교수. 주요 평론으로 「지구화시대의 세계문학」 등이 있음. englhkwn@ijnc.inje.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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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 문학이 침체되어 있는 데 반해 영화는 60년대 이후 바야흐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뮤직TV와 영화, 비디오와 인터넷, 핸드폰과 자동차 등의 대중소비문화에 열광하는 소위 ‘신세대’들이 문학을 외면한 지 오래기 때문에 앞으로 문학의 전망은 더욱 어두워질 것이라는 강성 비관론도 심심찮게 등장한다.1 필자는 이런 문학비관론을 믿지 않지만, 한국의 최근 영화계가 사상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김수영(金洙暎)이 60년대에 영화평을 의뢰받고 영화관에 갔다가 배우들의 엉터리 연기와 말도 안되는 장면들을 못 견뎌 십분도 채 안되어 나왔던 시절과는 사정이 판이한 것이다.2

최근에 나온 소설과 영화를 비교하면 독자(관객) 수나 화제생산력에서 영화 쪽이 단연 우세하다. 이 점에서는 요 몇년 사이 영화가 소설을 추월한 것이 확실하다. 게다가, 이제 대다수 우리 영화들이 ‘말이 되게끔’ 만들어지며 개중에는 예술적으로도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 적지 않다. 「공동경비구역 JSA」나 「박하사탕」, 「오! 수정」과 「섬」과 같은 진지한 영화들은 물론이거니와 「주유소 습격사건」 같은 오락영화조차 웬만한 할리우드 영화보다 흥미롭다. 그렇다면 하나의 예술로서 최근의 영화와 소설을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나을까? 상당히 궁금한 질문이지만, 필자는 이 거창한 물음에 답할 능력이 없다. 다만 한국의 영화가 비약적으로 성장하여 이제 소설과 비교해볼 만한 정도는 되지 않았는가 하는 막연한 느낌만 있을 뿐이다.

이 글에서 김영하, 하성란의 소설과 홍상수의 영화를 연결지어 논하려는 엉뚱하다면 엉뚱한 생각을 한 것은 이 막연한 느낌의 일단이나마 구체화해보려는 욕심에서 비롯된다. 이런 엄두를 내게 된 것은 우선은 김영하, 하성란의 소설이 영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데 반해 홍상수의 영화는 반대로 소설적인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어, 장르를 가로질러 비교해볼 만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이들을 논의대상으로 선정한 유일한 또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니다. 신예작가인 김영하와 하성란은 아직 한국 문단을 대표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독자적으로 매우 주목할 만한 예술적 작업을 해온만큼 개별적으로도 평가할 만하다. 이들의 소설은 대중문화에 침윤된 메트로폴리스의 자폐적인 일상을 각각 독특한 방식으로 다룸으로써 우리 시대 도시적 삶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예술을 선보였다고 하겠다. 두 작가의 소설이 홍상수의 영화와 만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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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金英夏) 소설의 특징은 데뷔작인 「거울에 대한 명상」(『리뷰』 1995년 봄호)에서 이미 뚜렷이 나타난다. 어느날 밤 강변의 고수부지에서 한 유부남과 그의 정부인 미혼의 여자(가희)는 정사를 벌이기에 적절한 장소를 찾다가 폐기된 자동차의 트렁크 속에 장난삼아 숨어드는데, 여자는 고의인지 실수인지 트렁크 덮개를 쾅 닫아버린다. 두 남녀는 졸지에 좁은 공간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 것이다. 김영하는 이 상황을 “우리 둘은 희극적이면서 비극적이었으며, 가장 가까워졌고 가장 멀어졌으며, 구멍을 채웠으되 구멍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런 상황은 김영하 소설의 기본적인 쎄팅이기도 하다. 트렁크의 좁은 공간은 여기서 메트로폴리스라는 거대하지만 폐쇄적인 공간의 축도이다. 이런 상황설정을 발판으로 김영하의 재치있는 말재간과 발빠른 변전이 돋보이는 화려한 허구의 세계가 펼쳐진다.

갇혀 죽음을 기다리면서도 여자는 남자에게 쎅스를 시도한다. “짙은 어둠속에서 반복되는 성희는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여자에 대한 남자의 “두려움은 서서히 가학으로 변질”되는 가운데, 여자의 말은 어느덧 남자의 은밀한 심리를 난도질하는 흉기로 변해간다. 여자는 정사중에 불쑥 “나 오늘 위험해. 배란기거든”이라고 말한다. 남자가 여자에게 “아직도 농담할 여력이 남아 있나보지?”라고 타박하자 여자는 여전히 장난기 섞인 어조로 되받는다. “재밌잖아, 죽기 직전에 임신하다. 기발하잖아. 정말로 그랬음 좋겠어. 형을 한번에 둘이나 죽이게 되는 거잖아. 형하고 형 자식.” 신세대 어법을 실감나게 구사하는 김영하의 냉소적인 언어는 희비극적인 상황에서 효과를 최대로 발휘한다. 극한상황에서 이런 말이나 행동이 정말 가능할까 따위는 신경쓰지 마라, 이 기발한 상황과 언행의 자극적인 묘미를 한껏 느껴봐라 하고 주문하는 듯하다.

김영하 소설에서 기발함을 빼면 그 매력은 상당부분 사라진다. 그러나 김영하의 소설이 오로지 기발함을 위해 구축된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심각한 메씨지가 있다. 어쩌면 기발함은 이 메씨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는 미끼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메씨지에 도달하기까지는 인간의 표층심리를 가로질러 심층으로 내려가는 꽤 복잡한 미로를 헤쳐가야 하는데, 전자게임을 하듯 그 복잡한 수순을 신속·정확하게 밟아가는 솜씨를 지켜보는 것 또한 김영하 소설을 읽는 재미이다. 이 소설에서 남자는 두 여자, 즉 정숙한 아내 성현과 혼외의 쎅스 파트너인 가희와 관계를 맺고 있다. 남자는 이 두 여자와의 관계를 “아내가 상수도라면 그녀〔가희〕는 하수도였다”고 간명하게 정리하고는 “아내는 하수도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같은 남자의 표층심리가 완전한 허구라는 것을 가희의 언어는 무자비하게 까발리기 시작한다.

가희는 백설공주의 이야기를 재해석하면서 3인의 관계를 다시 보여준다. 남자는 마법의 거울을 들여다보는 마녀이고, 그의 아내 성현은 말하는 거울이며, 그녀 자신은 백설공주라는 것이다. 페미니즘 담론을 연상케 하는 이 ‘이야기 속의 이야기’는 3인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하면서 마녀역인 남자의 파멸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끝은 아니다. 남자가 가희에 대한 증오감이 타올라 그녀를 목 졸라 죽이려는 순간 가희는 “그래 죽여라. 그렇지만 마지막으로 한가지 얘기해둘 게 있어. 네 거울은 깨졌어”라고 내뱉으면서 성현과 자신이 고등학교 1학년 때 괴한들에게 함께 강간당한 후 동성애 관계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남자는 그때서야 깨달음에 이른다. 아내인 성현은 “정갈하고 상처입지 않은 백색의 대지” 같은 여인이 아니라 가희와 동성애를 나누면서 자신을 교묘히 속인 요부인 것이다. 남자의 마지막 독백이자 이 소설의 결말은 이렇다. “모든 거울은 거짓이다. 굴절이다. 왜곡이다. 아니 투명하다. 아무것도 반사하지 않는다. 그렇다. 거울은 없다.” 이것이 아마 김영하의 최종적인 메씨지인 듯하다. 거울의 왜곡 혹은 부재는 이 소설에서 남자의 나르씨시즘적인 삶의 원리가 무너짐을 뜻한다. 이는 근대소설사에서 그다지 새로운 통찰은 아니다. 근대적 삶의 특징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상이 자기라고 확신할 수 없다는 데서 비롯되며, 그렇기에 자기 상에 대한 매혹과 반발은 근대소설의 빈번한 주제였다. 그럼에도 김영하 소설을 이해하는 데 이 대목이 중요한 것은 그의 예술관의 핵심에 나르씨시즘의 신화가 놓여있기 때문이요, 또 이 신화가 그에게는 미학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문학사적인 의의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가 한 인터뷰에서 밝힌 다음과 같은 발언은 주목할 만하다.

 

역사와 민족 등이 90년대의 인간에게서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역사와 민족 등의 범주를 동시대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틀로 규정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80년대를 풍미하던 역사와 민족 등이 빠져나간 상태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으며, 때문에 후일담 문학이나 리얼리즘 소설을 부정하는 자리를 나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90년대는 80년대를 풍미했던 준거집단이 해체된 상태이며, 그 결과 어느 누구도 나를 비추는 객관적인 거울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지금 이곳의 사람들은 객관적인 거울 없이 각 개인은 자신의 얼굴을 대면하고 있으며, 많은 경우 물질적인 것 혹은 물화된 가치관에 자신을 투사한다. 자동차나 컴퓨터의 끊임없는 버전업 욕망이나 삐삐 증후군 등은 이전의 어느 개념틀보다도 현대인의 삶을 효과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매개체이다.3

 

필자는 80년대/90년대를 이런 식으로 뚜렷이 갈라세우는 김영하의 시대구분에 공감하지 않는다. 역사나 민족에 대한 그의 이해방식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김영하의 판단에 따르면 80년대 리얼리즘 문학이 구가한 ‘객관적인 거울’이 90년대에 와서는 깨졌거나 부재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거울의 거짓 혹은 부재를 최종적인 메씨지로 내세운 김영하의 데뷔작은 역사와 민족 등을 준거틀로 삼는 리얼리즘 소설이나 거대서사를 거부하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여기서 이 거울의 빈자리에 무엇이 대신 들어서느냐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객관적인 거울을 깨뜨린 주체에게는 이제 “물질적인 것 혹은 물화된 가치관에” 투사된 조각난 이미지들, 즉 눈과 카메라 렌즈(작은 거울)에 포착되는 이미지들이 세계를 가득 채운 듯이 보인다. 이미지들과 그것들이 자동적으로 환기하는 사물화된 관계들이 압도하는 세계가 된 것이다. 이제 “눈은 마음의 창이라기보다는 스크린”(「손」)이 되고 “세상 모든 것이 이미지로 둘러싸여 있고, 우리가 취하는 하나하나의 행동이 우리가 어디선가 보았던 어떤 이미지나 실체의 복제물에 불과한”(「거울에 대한 명상」) 시대가 된 것이다. 씨뮬라크르의 세계에 진입하는 이 지점에서 김영하의 소설은 영상매체와 특별한 친화성을 갖는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거울에 대한 명상」을 포함하여 김영하의 첫 소설집 『호출』(문학동네 1997)에 실린 많은 작품들이 기발한 이야기이자 작가 나름의 ‘진지한’ 예술론이다. 왜 자신이 거울과 같은 재현을 버리고 영상적인 이미지의 세계로, 순전한 허구의 예술로 이행하는가를 밝히는 진술서인 셈이다. 사실 그의 작품들 다수가 80년대 리얼리즘 소설이나 90년대 초반의 후일담 소설들에 대한 일종의 패러디로도 읽힌다. 하지만 김영하의 포스트모던한 시대인식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입증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 대한 최종평가는 자신의 말대로 ‘지금 이곳의 사람들’의 삶을 얼마만큼 보여주고 그들이 맞닥뜨리는 곤혹스런 문제를 얼마나 깊이 파고드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필자는 김영하의 소설들이 90년대 이후 하나의 문화적 집단군을 형성한 대도시 젊은 세대들의 삶을 직시하고자 분투한다는 점을 일단 사주고 싶다. 그리고 그의 소설에 노인과 아이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어떠한 공동체에 대한 애착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하나의 결함으로보다는 그의 예술 성격을 드러내는 징표로 읽고 싶다. 이런 부재들이란 그의 예술이 젊은 세대의 대중문화적 병리학에 촛점을 맞춘 데서 비롯되는 불가피한 결핍이라고 옹호하고 싶은 것이다. 기발한 착상, 포스트모던한 기법(특히 메타픽션과 상호텍스트성과 패러디의 활용), 비교적 탄탄한 구성, 발빠른 템포, 가볍고 도발적인 언어는 확실히 영상세대의 즉각적인 지각과 변화무쌍한 생활양식을 따라잡는 데 성공하는 듯하다. 게다가, 「나는 아름답다」와 장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현란하게 보여주는 ‘죽음과 쎅스에 대한 명상’이나 「손」과 「베를 가르다」에서 제시된 ‘몸에 대한 명상’ 역시 재미있을 뿐 아니라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한편 「도마뱀」이나 「나는 아름답다」 등에 나타나는 그의 분방한 정신분석학적 상상력은 기존 소설들이 다루기 꺼리던 성애(sexuality)의 영역들을 거침없이 파고든다. 특히 시선(카메라 렌즈)과 성애의 관계에 대한 집요한 탐색은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이렇듯 그의 작품들이 젊은 세대의 문화적 병리를 다양한 기법과 심각한 주제로 변주하고 심지어 그들의 현란하지만 허망한 삶의 양식을 화끈하게 까발리고 있음에도 그에 합당한 깊이와 현실감을 지니지는 못한다. 이것이 김영하 문학의 딜레마이다. 리얼리즘의 제약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에게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마음대로 가로지르며 온갖 포스트모던한 기법을 활용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는 반면, 그의 언어가 구축하는 세계는 삶의 실제적인 공간을 건드릴 권능을 박탈당한 듯하다. 가령, 자동차 트렁크에 갇힌 남녀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쎅스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상황은 사뭇 심각한 대화내용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오락용 영화나 만화의 한 장면 같다. 일정한 효과와 재미를 내기 위해 현실과 환상을 조합하고 인물과 언어를 디자인한 듯한 것이다. 이 작품의 공간은 현실의 공간도 환상의 공간도 아니며, 기발한 착상과 재치있는 말과 화려한 정신분석학을 펼쳐놓기 위해 조작된 제3의 가상공간인 것이다.

필자는 김영하가 환상적인 요소를 사용하는 것에 못마땅해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너무 쉽게 무시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길 뿐이다. 이 점에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관한 명상’이라고 부름직한 「호출」은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이 경계를 교묘히 활용하여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연속적으로 구사하는 김영하의 빼어난 연출솜씨와 아울러 그 재능의 지나침에서 비롯되는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김영하가 그 경계를 조금만 더 신중하게 다뤘더라면 이 작품은 대중문화시대의 공허한 인간관계를 묘파한 걸작이 되었을 것이다.

「호출」은 한 청년이 권태로운 일상을 메우기 위해 벌이는 자그마한 상상적 모험에 관한 이야기로, 세 절로 구성되어 있다. 1절 ‘호출하는 자’의 초두에서 화자로 등장하는 이 청년은 한 여인을 삐삐로 호출할까 말까 망설인다. 화자는 석달 전에 애인한테 버림받고 무료한 나날을 보내다가 전날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만난 한 여인에게 첫눈에 반해, 지하철에서 삐삐를 덥석 안겨주고 내린 것이다. 그런데 화자는 여자와 만나기 직전 이런 말을 한다. “내가 가장 즐기는 경계는 현실과 상상 사이의 경계이다. 나는 가끔 현실을 상상이라 생각하기도 하고 상상을 현실이라 믿고 살기도 한다. 그렇다 해도 그 혼동이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 적은 없었다. 마치 영화를 보듯, 나는 내가 구성한 그 상상의 세

  1. 김영하 「워크아웃 직전의 문학」, 『현대문학』 2001년 1월호 참조.
  2. 김수영 「‘문예영화’ 붐에 대하여」, 『김수영 전집』 2권, 민음사 1981 참조.
  3. 류보선 「죽음, 그 아름답고도 불길한 유혹」, 김영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문학동네 1996, 170〜7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