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대지의 향기, 꽃속에서 터진 말

조태일론

 

 

손택수 孫宅洙

1970년 전남 담양 출생.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호랑이 발자국』이 있음. ststo70@freechal.com

 

 

 

“대지에 탄력이 있어 널 위로 오르게 하는 거야.

발가락을 땅에 대기만 해도 대지의 아들 안테오스처럼

곧 기운을 얻게 될 거야.”(괴테 『파우스트』 2부 3막)

 

 

1

 

대나무는 온몸이 자다. 대자로 있기 전부터 대자로 살아 있다. 강골은 그렇다. 대나무는 세상을 재기 위해 뻗어올라간 몸의 마디마디 눈금을 긋는다. 우듬지 끝이 더이상 올라갈 수 없는 곳, 마지막 마디 하나를 더 뽑아올린 곳, 아뜩한 그 너머까지 대나무 죽 푸른 금을 긋는다. 죽형(竹兄) 조태일(趙泰一, 1941~99)의 시를 읽는 일은 대지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길차게 솟구쳐오른 한 그루의 곧고 곧은 영혼을 어루만지는 일과 같다. 그것은 또한 시인이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지난 연대의 질곡을 찬찬히 더듬어보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인의 시는 거기서 머물지 않는다. “서러운 마음들을 깎아/곧음을 영원에 세우고”(「대창」, 『식칼론』) 뜨겁게 치밀어오를 때의 그 드센 기세와 달리 그는 몸속을 텅 비움으로써 옥죈 마디와 마디 사이의 공명통을 통해 서늘한 울림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 울림은 가혹했던 시대를 살다 간 시인의 아픔을 안팎으로 진동시켜 뽑아낸 것이라 더욱 오랜 여운을 남기고 있다.

1941년 9월 대처승의 아들로 태어난 조태일은 1962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다시 포도(鋪道)에서」와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아침 선박」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아침 선박』(선명문화사 1965), 『식칼론』(시인사 1970), 『국토』(창작과비평사 1975), 『가거도』(창작과비평사 1983), 『자유가 시인더러』(창작과비평사 1987), 『산속에서 꽃속에서』(창작과비평사 1991), 『풀꽃은 꺾이지 않는다』(창작과비평사 1995),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창작과비평사 1999)까지 모두 여덟권의 시집을 남겼다. 바지런했던 창작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이십대엔 벌써 시전문 월간지 『시인』을 주재하며 김지하, 양성우, 김준태 등 우리 시의 빛나는 첨병들을 발굴하였는가 하면 1974년에는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회의 창설을 주도하기도 했다. 또한 긴급조치 9호 위반과 유신독재 비판으로 인해 투옥과 구속을 거듭하였다. 이처럼 선 굵은 시적 생애를 통해 느낄 수 있는 모습과 달리 시인은 평소에 다감하고 여린 감성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시인을 기리며 작고 5주기를 맞은 지난해 9월 시선집 『나는 노래가 되었다』(창비)가 나왔다. 9월에 태어나서 “내 유서를 20년쯤 앞당겨 쓸 일은/1999년 9월 9일 이전”(「간추린 일기」, 『식칼론』)이라고 했던 자신의 예언대로 눈을 감은 그 9월에 시선집이 태어난 것이다.

참된 시는 매순간을 거듭 새로 태어나는 의미의 공터를 갖고 있다. 굳어진 의미를 빨아들여 새살을 입힌 뒤 다시 내뱉는 블랙홀 같은 것 말이다. 완전히 파악된 시는 이미 시가 아니다. 파악되면서 동시에 파악되길 거부하는 영역을 갖고 있어야 한다. 『나는 노래가 되었다』와 선집에 실리지 못한 여러 작품들을 찾아 읽으며 느낀 바이지만, 조태일의 시는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아직 많이 남겨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나는 노래가 되었다’면 그 노래가 타고 있는 음률은 어떤 것인가. 시가 살아 있길 원할 때 그 시엔 생명의 율동에 따라 호흡하는 어떤 리듬이 내장되어 있게 마련이다. 조태일의 시를 읽다보면 치렁치렁하게 휘감겨오는 리듬이 먼저 느껴진다. 그 리듬은 세련된 가성보단 분출하는 육성에 더 가까운 것이어서 언뜻 조악해 보이기도 하나 옹졸한 기교를 뛰어넘는 웅혼한 가락의 범람을 통해 즉각적인 몸의 반응을 견인해낸다. 대교약졸(大巧若拙)이라 했던가. 마감질을 하지 않고 윤곽선 없이 단번에 그어져내린 몰골(沒骨) 기법을 연상케 하는 그 리듬은 “뿌리를 깊이 내리며/천지간에 감기는 리듬”(「송장」, 『식칼론』)으로서 거대한 대지의 숨결로부터 온다.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야윈 팔다리일망정 한껏 휘저어

슬픔도 기쁨도 한껏 가슴으로 맞대며 우리는

우리의 가락 속을 거닐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불지필 일이다.

우리의 숨결을 보탤 일이다.

일렁이는 피와 다 닳아진 살결과

허연 뼈까지를 통째로 보탤 일이다.

–「국토서시」(『국토』) 전문

 

시어 하나 하나가 살아 펄떡거리는 것 같다. 이 시의 생생함은 무엇보다 활자로 고정되어 있으나 시각을 뛰어넘어 청각을 지향하는 말소리의 진동으로부터 온다. 청자를 염두에 둔 구어체의 반복과 병렬은 독자로 하여금 시인의 목소리를 현장에서 직접 듣고 있다는 상상적 경험을 가능케 한다. 이 시를 잠자코 눈으로 읽었을 때보다 소리내어 읽었을 때 더 큰 울림이 오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이같은 형식이 공허하게 들리지 않는 것은 역동적인 이미지들과 실핏줄을 잇고 있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즉 4연의 ‘버려진 땅’과 ‘빈 벌판 빈 하늘’은 어떤 결핍과 소외의 정서를 환기하는데,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혼은 소외감을 더욱 심화시킨다. 이처럼 소외로 얼룩져 황무지화된 국토의 가장 밑바닥에서 화자는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의 저항을 보고 있다. 돌멩이의 저항은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과 병치됨으로써 그 저항의지가 풀잎의 생명의지와 다른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대지에 착근한 이같은 이미지들은 발바닥이 다 닳고, 숨결이 다 타오르는 소멸의 과정을 통해 새 살과 새 숨결을 꿈꾸기에 이른다. 그 숨결은 죽은 자의 혼에까지 스며들 수 있는 숨결, 즉 죽음까지 스며들어 살고 싶은 대지의 의지를 상징한다. 그 중심에 ‘불’이 있다. 마지막 5연에서 국토에 ‘일렁이는 피와 다 닳아진 살결과/허연 뼈까지를 통째로’ 바쳐야 한다는 일종의 희생제의적 진술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화자는 번제의식을 치름으로써 ‘빈 하늘’로의 상승을 꿈꾼다. 마치 시인의 발바닥에 있는 소용돌이무늬가 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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