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반도에서의 근대와 탈근대

 

대한민국 60년의 안과 밖, 그리고 정체성

 

 

홍석률 洪錫律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 저서로 『통일문제와 정치사회적 갈등: 1953~1961』, 주요 논문으로 「1968년 푸에블로 사건과 남한·북한·미국의 삼각관계」 등이 있음. srhong@sungshin.ac.kr

 

 

2008년 대한민국은 환갑을 맞이한다. 건국 60주년을 맞아 지나간 역사를 성찰하고 이를 기념하는 작업은 의미가 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특징적인 현상 중 하나는 민족적 통합과 근대 국민국가의 건설, 산업화, 민주화 등 근대의 제반 과제들을 분리하여 선후관계로 이야기하는 경향이다. ‘선건국 후통일론’ ‘선산업화 후민주론’ 등이 그것이다.

우리는 왜 근대의 다양한 측면들을 분리하여 선후관계로 정립하는 것에 그토록 익숙한 것일까? 이는 결국 건국이 민족의 통합과 함께하지 못하고, 산업화가 민주주의와 같이 가지 못했던 우리의 역사적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이는 일제 식민지화로 인해 근대적 문물과 제도의 도입이 근대 국민국가와 민주주의의 성립으로 이어지지 못했던 우리의 일그러진 근대가 아직도 현재진행형임을 대변하고 있다. 물론 근대의 여러 과제들을 동시에 완벽하게 성취한 나라는 현실 역사에서 존재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근대의 한 과제를 다른 과제에서 분리하여 선후관계로 정립하고, 특정시기에는 이것만이 가능했다고 하면서 다른 과제를 배제하는, 그래서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이 여전히 대결하는 우리 사회의 양상은 무언가 성찰의 필요성을 던져주고 있다.

국가의 나이와 인간의 나이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어렵지만, 대한민국은 이제 60갑자를 다 돌아 환갑을 맞이했으니 한 단락을 짓는 성숙함과 완성됨을 기대하게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대한민국의 안과 밖을 함께 돌아보며 근대의 온전한 성취를 기약하고, 그 과정에서 근대 이후의 가능성도 함께 이야기해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1. 대한민국의 간극, 분단과 전쟁의 형성

 

“오늘은 정부수립 내일은 남북통일.”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행사를 주관했던 ‘국민축하준비위원회’가 주최한 현상모집에서 1등 없는 2등으로 선정된 표어이다. 대한민국 건국 주도세력은 이처럼 건국과 민족통합이 함께 이루어지지 못하고, 통일이 미완의 과제로 남았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정부수립은 식민통치와 미군정의 점령통치에서 벗어나 일단 ‘자주독립’의 과제를 성취한 것으로서 궁극적으로 민족통합을 달성하는 데도 유리한 국면을 조성할 것이라고 했다.1 하지만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과 민족통합이 분리되었던 그 간극에는 단지 채워지지 못한 부족함만이 남은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대폭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불꽃이 튀고 있었다.

한반도 분단 위기가 가시화된 1947년 가을부터 많은 사람들이 분단은 곧바로 동족상잔의 전쟁을 유발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반도에는 오랫동안 통일된 중앙집권적 왕조가 존재했고, 식민지가 된 이후에도 분할통치 같은 것은 없었다. 분열의 불씨가 될 심각한 인종·언어·종교적 차이와 갈등도 없었다. 더구나 한국은 독일과 달리 패전국도 아니었다. 건국과 민족통합이 분리되는 양상은 불가피하고도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기보다 상상조차 힘들었던 최악의 파탄적 상황이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작업이 진행되던 1948년 7월 남쪽의 지식인 330명은 성명서를 발표하여 “통일과 자주는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이는 “선후(先後)가 있을 리 없다”면서, 양자가 분리되는 상황은 “동포상잔의 참변이 순치(馴致)되는 실태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2 또한 “‘전과(戰果)’로 표현되는 제주도의 ‘토벌(討伐)’”에 대해서도 우려를 피력했다. 제주도 4·3항쟁의 진압과정에서 이미 ‘동포상잔’의 참변의 조짐이 보였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간극은 건국(자주)과 통일 사이에만 존재한 것이 아니었다. 제헌의회가 제정한 헌법은 농지를 농민에게 분배하고, 친일파 처벌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음을 명시했다. 나아가 헌법의 경제관련 조항들은 사회주의적 색채와 요소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었다. 건국 주도세력은 대부분 자본가, 지주, 친일파를 중요 지지기반으로 한 정치집단의 구성원들이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조항들을 헌법에 삽입한 것은 자신들이 배제한 개혁적·진보적 정치집단의 요구와 밑으로부터의 압력을 의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이 점은 또한 국가는 단지 이를 주도하는 집단의 도구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정치사회적 집단들이 갈등하는 장이며, 따라서 이들 사이의 관계를 반영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헌법상에 표방된 민주공화국의 이상과 대한민국의 현실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했다. 정부수립이 민족통합과 분리되던 파행적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민주적 합의기반은 대단히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좌익과 중간파 정치세력은 물론이고 1947년까지도 대한민국 건국 주도세력과 함께 반탁운동을 했던 김구, 임시정부 세력도 여기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처럼 대단히 협소한 기반 위에서 탄생한 정부는 민주주의의 실제 내용을 채워주기 어려웠고, 헌법에 규정된 사회개혁을 제대로 실행하기도 어려웠다. 그 간극에서 또한 불꽃이 발생했다.

물론 불꽃 튀는 상황을 만든 것은 한국인들만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외적 규정력이 크게 작용했다. 해방은 미·소 양군의 분할점령으로 이어졌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파시스트국가와 맞서 싸우는 동맹국이었지만 점차 패권대립을 벌이는 상태로 돌입했다. 한반도는 그 어떤 지역보다도 냉전이 일찍 시작한 곳이었다. 한국에서의 좌우 이념갈등과 친일잔재 청산 등 민족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미·소의 분할점령 및 그들이 한반도에서 추진한 점령정책의 결과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3

분단과 전쟁의 원인을 이야기할 때 내인(內因)과 외인(外因) 어느 쪽이 더 중요하냐는 논쟁이 있어왔다. 그러나 양자의 구분은 그다지 의미없어 보인다. 미·소의 분할점령과 점령정책은 한국인들 사이의 갈등을 조장했고, 또한 반탁운동에서 나타나듯 한국인 내부의 갈등은 미·소 대립에도 영향을 미쳤다. 내인·외인을 구분하고 그 서열을 정하는 것은 해방 직후의 복잡한 상황을 종합적으

  1. 『자료 대한민국사』 7권, 국사편찬위원회 1974, 811~39면.
  2. 「330인 연명 성명서: 조국의 위기를 천명함」(1948.7), 도진순 『한국 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서울대출판부 1997, 394~96면에서 재인용.
  3.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동노·이교선 옮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창비 2001, 261~30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