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촛불의 눈으로 한국문학을 보다
데모스의 재구성 그리고 시
황규관 黃圭官
시인. 시집 『패배는 나의 힘』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정오가 온다』, 산문집 『강을 버린 세계에서 살아가기』 등이 있음. grleaf@hanmail.net
이중나선으로서의 촛불
지난가을에서 올 초봄까지 계속됐던 광장의 촛불은 분명 우리에게 일대 사건이었다. 특정한 역사적 사건에 유일한 기원이 있을 리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촛불의 상류를 향해 비판적 분석을 또는 활달한 상상력을 동원할 필요가 있다. 현상적으로는 이명박 집권 초기의 광우병 쇠고기 사태를 떠올릴 수도 있으나 거기에도 뭔가 꺼림칙한 점이 있다. 이명박의 등장에는 참여정부의 실패를 핑계삼은 자본주의적 욕망의 전개가 그 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시간을 거꾸로 돌려 이명박의 등장을 복기할 때 밀려오는 곤혹스러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어느날 갑자기 펼쳐지지 않았다. 거기에도 참담한 과거가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다만 이명박의 등장과 더불어 한국사회의 비틀린 욕망은 거리낌 없이 대로를 활보하기 시작했던 것인데, 그런 욕망이 활개를 치게 되면 사회의 전반적 윤리가 동반 하락한다는 진리(?)를 확인하는 일은 의외로 치명적이다.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최형익 옮김, 비르투 2011)에서 약간의 위트를 섞어 “사람의 힘으로 없앨 수 없는 것은, 설령 손해가 종종 따른다 해도 허용되는 게 상책이다. 사치와 질투, 탐욕, 만취에서 기인하는 악행이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을 용인해야 한다. 그 이유는, 비록 그것이 악덕이긴 하지만, 입법 행위에 의해서 결코 금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376면)라고 말했지만, 자본이 사회와 국가권력을 구성하기까지 하는 자본주의체제에서 자본 위에 올라탄 ‘악덕’의 창궐은 공동체의 물적 토대를 특히 심각하게 파괴한다. 더군다나 한국사회는 IMF구제금융체제 이후 국가와 사회가 그 구성원의 삶을 언제든 방기할 수 있다는 체험을 깊이 내면화해왔다. 그런 토양 위에서 세속적인 욕망들은 도리어 능동적인 힘을 발휘해왔던 것인데 문제는 이 욕망들이 개체의 보존 본능(코나투스)을 넘어 타자의 삶마저 파괴하고, 성찰하는 이성마저 내팽개쳐버렸다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 촛불항쟁의 심층에 무엇이 있었는가를 살펴보면 우리는 좀더 생산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지난 촛불 때 벌어졌던 여러 잡음들—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과 투쟁노선의 설왕설래를 이해하는 단초도 되지 않을까 싶다. 나아가 촛불항쟁의 성격 규정과 촛불의 힘으로 탄생한 문재인정부의 예상 진로를 유추하는 데 얼마간 도움이 될지 모른다. 이것은 다시 우리에게 과연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역량이 존재하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시금석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역사가 발화된 언어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기왕에 발화된 언어들을 비롯해 침묵 속에 내재된 무의식의 언어들을 검토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결론적으로 지난 촛불항쟁은 어떤 이중나선 구조로 보이는데, 하나는 이명박·박근혜의 시간을 다시 옛 민주정부(?) 수준으로 되돌려 87년체제를 완성하고자 하는 목소리들, 그리고 다른 하나는 87년체제에서 또다른 억압을 발견한 목소리들.
이 이중나선의 존재는 지난겨울의 광장에서 분명하게 확인되었다. 그리고 이 이중나선은 함께 대통령을 탄핵하는 초유의 사건을 만들어냈지만, 이것도 또한 법의 테두리 안에서 허여된 사건이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87년체제 안에서 항쟁은 갈무리되었으며 이어진 조기 대선에서 이중나선 중 하나는 체제 안으로 빠르게 휘말려 들어갔다. 하지만 다른 하나, 즉 87년체제에서 억압을 발견한 목소리들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변함없이 활발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이중나선은 DNA구조 같은 과학의 원본과는 다르게 결합되어 있었다. 너무도 쉽게 분리 가능한 느슨한 결합관계로 잠복해 있다가 촛불항쟁으로 가시화되었을 뿐이다. 지난 촛불항쟁에 혁명적 요소가 있었다면 87년체제를 넘어서고자 하는 리비도가 출현했다는 점에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중나선의 분리를 촉진한 밑바탕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경제성장이 무엇인지 몸소 경험한 세대와 이들에게 반감을 가진, IMF금융신탁통치체제를 내면화한 세대 사이의 괴리일 가능성이 크다. 돌이켜보면 어느 집권세력이건 경제성장을 강조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참여정부의 실패도 사실 경제성장의 신화를 버리지 못해서, 아니 경제를 성장시켜달라는 사회의 요구를 감당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 아니었던가. 세계 자본주의가 더이상 성장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에 직면했는데도 말이다. 자본주의체제에서는 뉴프런티어가 없으면 경제성장이 불가능한 법인데, 참여정부는 비정규직 양산의 제도화와 한미FTA(자유무역협정) 등을 경제성장의 뉴프런티어로 삼았고 이 지점에서 이중나선이 발생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지난 시절 문학장에 불었던 미래파 바람은 노동자의 삶을 저당 잡고 경제가 운용되던 참여정부 복판에서였다. 이 진단에는 마땅히 정치한 분석이 필요하지만, 미래파 바람의 사회경제적 바탕에 고도화된 금융자본주의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물음에는 나름 이유가 있다. 사실 김영삼정부 때부터 시작된 이른바 ‘국제화’가 IMF금융신탁통치를 통해 급격한 변침을 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IMF금융신탁통치 시절, 그러니까 김대중정부 시절 유행한 광고 카피는 “바이 코리아”와 “부자 되세요”였는데, 이 언어들이 전통적인 의미의 근면·성실을 강조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시쳇말로 ‘돈 놓고 돈 먹기’ 게임에 참여하라는 유혹이나 다름없었다. 급기야 이런 금융자본 환경은 참여정부에 와서 ‘동북아금융허브’라는 국가정책으로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금융자본주의의 특징은 모든 사물 관계가 금융 기호와 상동성을 가진 기호들로 대체된다는 사실이다. 금융경제는 실물경제를 압도하며, 고전적인 부의 축적 과정을 조롱거리로 만든다. 그런데 금융자본주의는 무엇으로 움직이는가? 그것은 언어와 정보이며, 이 언어와 정보는 그 속도와 효율을 위해 인코딩(encoding)-디코딩(decoding) 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런 과정의 누적과 복잡화를 통해 사회는 인코딩과 디코딩 사이에서 기호로 표상되게 마련이다. 이렇게 형성된 사회경제적 무의식이 시의 언어에 아무런 작용을 미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야말로 ‘관념론’적인 발상은 아닐까? (자본주의 근대문명 자체가 그렇지만) 특히 금융자본주의의 고도화는 사물과 사건의 독특성을 제거하는 특징을 갖는데, 두말할 것도 없이 그것들은 (자본축적과) 인코딩-디코딩 과정에서 걸림돌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른바 비물질노동의 대두는 이러한 사회경제적 환경을 바탕으로 한다. 비물질노동의 대두는 그 짝패로 물질노동의 의미와 가치를 격하시키는 현상을 동반한다. 참여정부 시절 역대 정권 최대로 노동자가 구속·수감되었고 비정규직을 보호한다며 만들어진 비정규직보호법이 비정규직 노동자를 양산하는 데 힘을 보탠 것은 의미심장한 현상이다. 어쨌든 우리에게 실제적인 삶의 감각을 발생시키던 노동은 보이지 않는 세계로 배제되었으며, 따라서 언어화해야 할 필요가 없는 세계가 되어버렸다. 문학이라는 상부구조를 향해 으르렁거리던 노동이라는 하부구조가 눈앞에서 치워졌다고 하면 지나친 걸까.
그렇다고 해서 미래파 바람이 이러한 금융자본주의에 동조하거나 협력하기 위해 불었다는 말은 아니다. 도리어 우리 시에서 언어가 지나치게 기호화되고, 현실을 통해 언어를 갱신하기보다 기존 언어를 통해 언어를 재배치하는 과정에 돌입하게 된 사회적 밑바탕이 금융자본주의의 본격화가 아니었던가, 하는 물음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시가 사회경제적 바탕에 전적으로 종속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물음은 다른 맥락이 더 추가되어 검토해야 할 가설이지만, 오늘날 점점 더 심해지는 기호화 경향을 감안하면 마냥 무시하기는 힘들 것이다.
‘데모스’ 없는 민주주의
채효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