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시대의 미궁, 부동산 문제

▶ 부동산은 이 시대의 미궁이다. 우리 사회에서 첨예한 불공정·불평등 쟁점도 부동산 문제에서 출발해 부동산 문제로 귀결되는 듯하다. ‘집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이라는 그럴듯한 말도 무주택자들에게는 흰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 지금, 청년세대의 주거환경은 나날이 열악해지고 있다. 학자금 대출을 등에 업고 대학을 졸업해 비정규직으로 몇년씩 일해도 넉넉한 안식처를 구하기 어렵다. 손원평의 소설 「타인의 집」은 이러한 청년의 현실을 한편의 시트콤처럼 그린 작품이다. 주인공은 “역세권, 스세권, 슬세권에 속”한 아파트에서 집주인도 아닌 전세입자에게 월세를 내고 산다. 청년 네명이 한 공간에서 “각자도생”하는 형태의 “기괴한 풍경”으로 공동생활을 이어가던 중 문제가 발생한다. 새로운 집주인이 될지도 모를 이들이 집을 차례로 둘러보는 동안 이 집의 세입자와 ‘세입자의 세입자’들이 받았을 타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현실과 관련해 대화 「청년, 한국사회를 말하다」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준다. 대담자들은 다양한 사회현실을 두고 토론하는데, 그중에서도 “주식은 안 사면 그만이라 쳐도 집에 안 살 수는 없기 때문에 부동산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문제”라는 문제의식 아래 부동산 문제를 청년들의 생활과 커뮤니티 측면에서 접근하는 부분에 눈길이 갔다. 이는 기후위기와 같은 재난 상황에서도 삶을 온전하게 영위할 수 있게 하는 생활공간으로서의 집이 왜 필요하고 어떤 형태로 존재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이끈다. 부동산을 단순한 주거공간으로만, 혹은 자산 증식의 수단으로만 인식하는 데서 벗어날 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어느 사회라도 청년세대가 희망을 잃고 무너지면 회복하기 어렵다. 부동산 가격 폭등은 손원평 소설에서 그려지듯 청년에게 “절망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일상에 “불행과 우울의 악취가” 스며들게 한다. 부동산이라는 미궁에서 빠져나와 미래 세대가 생활할 수 있는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는 방법을 이제 진지하게 모색해야 할 때다.

이세주

 

‘적당한 성장’ 개념과 한국 농업

▶ 『창작과비평』은 지난해 봄호에 ‘생태정치 확장과 체제전환’ 특집을 선보인 데 이어 기후위기 관련 글들을 연속해 실어왔다. 독서모임 ‘클럽 창작과비평’의 과제로 플라스틱 병뚜껑을 모아 재활용하는 에코 챌린지가 포함된 것도 그 연장선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봄호에 실린 백낙청의 「기후위기와 근대의 이중과제」는 직전의 겨울호 ‘대화’에서 제시된 화두들을 짚으며 시작한다. 대화 당시 기후위기 문제를 논할 때 쉽게 간과되는 사안으로 ‘분단체제’와 ‘적정성장(적당한 성장)’이 이야기된바, 필자는 이에 대한 보충을 개진한다. 특히 ‘적당한 성장’ 개념에 대한 부정적 반응을 언급하며 이것이 타협적 용어로 받아들여지기 십상이지만, 체제전환을 위해 탈성장을 꿈꾸려면 “얼마만큼의 성장을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적당한지를 연마”해야 할 필요성, 그럼으로써 “경제에 대한 관념의 전환”을 이룰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한다. ‘적당한 성장’은 이번에 처음 마주한 용어지만, 졸업논문에 ‘지속 가능한 농업’ 개념을 활용하고 있는 나로서는 더욱 눈여겨보게 되었다. 지속 가능성은 미래 세대의 필요를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현재 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우리 농업은 그간 경제적 지속 가능성에만 치중하여 사회 수요에 발맞추는 사회적 측면이나 폐기물과 탄소 관리 등 환경적 측면에서는 균형을 이루지 못했다. 관련 연구자들 중 일부는 이제 경제발전은 현실적으로 무시해야 하는 개념이라고까지 말하며 새로운 농정 전환을 촉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답일까? 백낙청의 지적처럼 문제는 양적인 성장을 아예 멈추면 “가장 취약한 계층이 가장 혹독하게 당하게 마련”이라는 데 있다. 우리나라 GDP의 2퍼센트도 차지하지 못하는 농업은 공익 직불금 지급 등의 정책으로 겨우 소득을 보전하는 실정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식량안보산업 명목으로 각종 제재에서 제외하고 재화를 투입해왔음에도 시장 시스템에 제대로 안착하지 못했고 여타 농업 강국과 같은 규모의 경제를 이루지 못했다. 그러니 자본주의로부터의 체제전환을 중요한 목적으로 두는 동시에 지금의 농업인들의 삶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것을 한국 농업의 과제로 삼아야 할 때다. 이러한 접근이 ‘기후변화 말고 체제변화’라는 구호에 비추어 태만하거나 미온적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기를 바란다.

조수민

 

생각의 재구축이 필요한 때

▶ 문예지라는 ‘신문물’을 처음 접하는 설렘으로 ‘책머리에’ 「지금은 독화살을 뽑아야 할 때」를 음미하듯 읽었다. 그간 스쳐가듯 짤막한 영상과 뉴스를 접하면서도 기후위기에 대해 ‘심각한 수준이구나’ 하고 남의 일처럼 고개를 끄덕일 뿐 나의 생각과 고민을 더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이 코로나19의 발생과 “무관하지 않”으며 이제 “전지구적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재구축해야 할 상황”이라는 대목을 읽으며 일순간 기후위기 문제가 내 삶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진실을 마주한 느낌이랄까. 특집 또한 무척 좋게 읽었다. 각 글이 미국의 상황, 미중 관계, 한반도 문제에 관해 개괄적으로 서술하여 흐름을 잘 파악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선 특히 미국과 관련되지 않은 문제가 없는 것 같다. 사드 배치부터 미중 무역 갈등까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등 터질까 조심해야 하는 신세다. 특집 중 이혜정의 글은 이처럼 ‘눈치게임’을 하게 만드는 막강한 미국이라는 나라의 모순을 꼬집는다. 트럼프 극렬 지지자들이 미 의사당을 무단침입한 사건과 의사당에 걸린 인종주의적 그림을 대비시키는 도입부를 통해 미국의 실태를 선명하게 부각한다. 미국은 이런 모순된 역사 속에서 이어져왔거니와 그나마의 불완전한 봉합도 트럼프의 무책임한 선동으로 와장창 무너진 듯하다. 나는 여기서 인류 역사의 보편성을 유추해보기도 했는데, 무언가 쌓아 올리는 것은 참으로 오랜 시간과 공력이 드는 일이지만 이를 허무는 것은 너무 쉽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변곡점이나 비극들도 신중한 결정이나 계획하에 이루어졌다기보다 우발적 사건이나 개인의 오판 및 무능력에서 기인한 경우가 많았다. 미중 패권 다툼 속에서 우리는 북핵 문제까지 있어 더욱 혼란한 상황이다. 지난호를 통해 나의 의식을 재구축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어 고맙다.

오정호

 

글 속의 삶과 경험이 나에게로

▶ 한영인의 평론 「우리 시대의 노동 이야기」가 인상 깊었고 문학평론을 읽는 매력이 컸다. 혼자 읽을 때 알쏭달쏭하거나 도무지 해석이 안 됐던 부분에 대해 다른 의견을 살피면서 내 생각을 채우고 넓혀가는 일이 상당히 재미있었다. 시란에서는 송경동 「비대면의 세계」와 최현우 「서른」이 좋았다. 송경동의 시는 인간의 이기심으로 일어난 기후위기 문제를 다루면서, 그러한 이기심에서 비롯한 다른 여러 현실 또한 줄곧 외면해온 인간을 비판한다. 최현우의 시는 “어떻게 오셨습니까/오면서 다치거나 다치게 만든 사람은 없었습니까” “지켜달라고 하세요/그렇게 하세요” 같은 구절이 마음에 와닿았다. 코로나19로 지친 마음을 위로하는 시와,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문제들을 돌아보게 하는 시가 각각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란에선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어디선가 상처를 받으면서도 제 몫의 삶을 견디고 있는 이들을 찾아내 위로해주는 듯한 문진영의 「미노리와 테쯔」가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박상영 소설 「요즘 애들」은 몰입감이 대단해서 ‘요즘 애들’의 마음으로 읽다가 분기탱천하기도 하고 얼마간 기성세대의 입장을 짐작해보기도 했다. “어떤 종류의 이해는 실패하고 나서야 비로소, 삶의 자세로 남기도 한다”라는 문장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촌평란을 보면서는 황정아 외 『코로나 팬데믹과 한국의 길』을 꼭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돌봄사회와 성장 중심 사회가 공존하기 어렵다면, 우리는 기꺼이 돌봄사회로 가야 하지 않을까. 다만 돌봄사회와 탈성장으로의 전환을 병행하기 위해 ‘검소한 풍요’를 지향한다 할 때 얼마만큼이 검소한 것이고 얼마만큼이 풍요로운 것인지, 즉 ‘적정’이란 어느 정도일지 꼭 생각해보아야 할 듯하다. 각자가 생각하는 적정의 기준이 너무 다르지 않아야만 우리가 함께 쓰고 있는 “한편의 영화”의 “결말”이 조금이라도 긍정적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조혜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