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젊은 시, 젊은 독자, 젊은 문예지

▶ 내가 다니는 대학의 교수님께 ‘클럽 창작과비평’이라는 서포터즈 활동을 소개했더니 ‘희귀한 분들을 보게 되었다’며 놀라워하셨다. 요즘 시대에 계간지를 읽고 리뷰도 쓰는 젊은 독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셨던 모양이다. 그러나 기성세대의 우려와 달리 요즘 젊은 독자들은 상당히 의미 있는 소비력을 행사하고 있고, 그 움직임에 호응하는 다양한 문학적 기획도 약동하고 있다. 지난호는 흥미로운 주제와 방식의 기획들로 젊은 독자층의 정동에 반응하고, 신호에 응답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대화 「젊은 시의 정치성」이 특히 흥미로웠다. ‘젊은 시는 어렵다’라는 세간의 지적에서 시작해 두명의 시인과 두명의 문학평론가가 ‘쓰는 몸’으로도, ‘읽는 몸’으로도 기울지 않고 쉼 없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성혁 평론가의 관점이 나머지 참여자들과 사뭇 달랐는데, 정치적 올바름이 오히려 시의 정치성을 억압한다는 지적이나 시가 인기 있는 소비재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가 줄글이 아니라 주고받는 좌담 형식으로 제기되니 더욱 흥미롭게 읽혔다. 상호 간의 대화 속에서 주장의 맥락과 근거를 넓혀가고, 서로 맞서며 갈라지는 지점에서는 각자 의견을 재확인하기도 하는 등 좌담의 매력이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느끼게 했다. 신철규나 문보영 등 다양한 예시를 통해 시가 ‘시로서’ 발휘하는 정치성을 발견해주는 시선도 미더웠다. 내가 바로 ‘젊은’ 독자이기 때문에 그간 볼 수 없었던 부분들에 대해, 나아가 그런 시각차가 어떻게 발생하는지에 대해 확인한 기분이다.

혹 계간지를 손에 들기를 망설이는 내 또래의 이들이 있다면 권하고 싶다. 기민한 사유와 다양한 담론 속에서 ‘우리의 정동’을 한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꼭 한번 읽어보라고.

전예원 jywjyj@naver.com

 

리얼리즘 문학의 도약을 기대하며

▶ 손가락 터치 하나로 화면이 바뀌고 원하는 정보를 바로바로 찾을 수 있는 지금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전부인 ‘말초적 시대’다. 외부의 자극은 정신이나 영혼까지 가닿지 못하고 ‘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건반사식의 반응만 난무한다. 자극적인 말, 자극적인 영상에 사람들의 신경이 즉각적으로 쏠린다. 정치·언론·개인의 ‘정동’ 모두 이처럼 ‘모바일화’되어가는 듯하다. 이러한 ‘정동의 시대’에 ‘사유’가 필요하다. 즉각적인 반응으로 가벼워진 인간을 현실에 발붙이게 하는 건, ‘두루 깊이 생각하는’ 사유가 아닐까. 이러한 사유를 끄집어내는 데 문학만큼 유용한 게 있을까 싶다.

리얼리즘이 재부상한 시기라고 한다. 용산참사와 세월호사건을 겪고, 촛불과 페미니즘운동을 거치며 리얼리즘 문학이 전성기를 맞고 있다. 지금의 리얼리즘 문학은 말초적인 우리 시대를 거울처럼 되비춰준다. 모순된 사회구조로부터 억압받고 소외당하는 존재를 보여주고 그들의 반격과 마음속 분노를 그대로 표현한다. 그런 면에서 리얼리즘 문학은 정동적이다. 물론 최근 리얼리즘 문학의 작품성이 균질하게 좋은 것은 아니다. 어떤 작품은 현실 재현에만 급급하고 또 어떤 작품은 사유의 무게에 짓눌려 있다. 과도한 사유는 오히려 현실 도피를 유도한다. 좋은 문학은 우리 현실을 생생히 보여주면서도, 사유와 함께 ‘변화’도 이끌어내는 것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지난호 특집 가운데 한기욱의 「사유·정동·리얼리즘」이 인상적이었다. 작년 말에 읽은 김기창의 소설 『방콕』(민음사 2019)을 떠올리게 했는데, 그 작품이 세계화된 시스템과 개인 사이의 관계를 잘 표현했기 때문이다. 한기욱의 논의에 비춰보자면, 『방콕』의 인물들이 누구 하나 현실 밖으로 나아가는 변화를 꾀하지 못한 점은 못내 아쉽다. 그러고 보면 ‘사유’는 단순히 생각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생각을 깊게 해 긍정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게 진정한 사유가 아닐까. 재부상한 리얼리즘 문학도 그러해야 할 것 같다. 현실과 우리 사회를 재현하는 데 머물지 말고, 비관과 비극에 빠지지 않으며 현실을 변화시키는 사유를 이끌어내야 한다. 그런 작품을 기다린다.

강미지 keloo@hanmail.net

 

식민주의라는 오래된 바이러스

▶ 지난호를 통해 『창작과비평』을 처음 접한 독자다. 동시대 작가들의 시와 소설에서, 다양한 글과 좌담에서 우리 삶에 맞닿아 있는 문제와 현상들에 관한 예민한 관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일본과 관련된 두편의 글을 재미있게 보았다. 일본의 패전 후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과 관련하여 벌어진 ‘4·24 교육투쟁’을 다룬 글과 ‘후꾸시마 오염수 문제’를 다룬 글이다.

4·24 교육투쟁은 처음 알게 된 역사인데, 필자 정영환은 2010년 2월 24일자 『아사히신문』 사설에 언급된 일본정부의 조선학교 고교무상화제도 배제 움직임을 언급하며 글을 시작한다. 조선학교에 한해 ‘북한에 이익을 준다’는 정치적 이유로 무상화를 반대하고 교육의 형평성을 아무렇지도 않게 위배하며 차별을 정당화하는 현상을 들여다보자니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엉뚱한 논리를 들이대며 문제의 본질을 벗어나거나 논점을 흐리고 물타기를 하는 양상, ‘공산주의자의 선동’이라는 색칠하기 수법이 비단 일본만의 이야기일까? 나아가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천황제에 기반한 식민주의’라는 막강한 일본발 바이러스가 존재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진다. 토오꾜오대학 교수 타까하시 테쯔야의 표현을 일부 빌리자면, 이 식민주의라는 바이러스는 타자의 고통에 둔감하고, 이들의 희생을 요구하며, 이를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도록 한다. 이 식민주의 바이러스가 집약적으로 터져 나온 곳이 후꾸시마이고 이 바이러스는 오끼나와에도 오래 머물고 있지만, 아직도 세가 약화되지 않고 우리나라에도 잠복하고 있는 것만 같다. 한 사회의 자정능력, 면역기능이 떨어지는 순간 언제든 다시 활개를 치며 숙주를 괴롭힐 것이다. 나에게는 이 바이러스가 신종코로나바이러스보다 더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김민수 calm7clear@gmail.com

 

지금 동물권을 말해야 하는 이유

▶ 계간지를 받으면 가장 먼저 시란을 확인한다. 시인 이름이 가나다순으로 실린 구성이 어쩐지 좀 귀엽다고 생각하면서. 지난호 목차를 훑던 나의 시선은 ‘이기성 / 고기를 원하는가 외’에서 멈췄다. 입으로 소리 내어 발음해보았다. 고기를 원하는가 외, 고기를 원하는가 왜, 고기를 원하는가? 왜?

나는 동물을 먹지 않는다. 사람들은 나를 엄격한 채식주의자, 극단주의자, 환경주의자 등 여러 말로 부르지만, 나는 나를 ‘연결주의자’라고 정체화한다. 이것이 최소한의 비폭력이라고, 우리 세계의 관계성을 지켜나가는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에. 인간 윤리의 영역이 넓어지고 다채로워져야 한다고 할 때 이 확장에 중요하게 가담하는 이슈가 비인간/동물권 문제다. 지난호를 통해 동물권을 중심으로 우리 시대의 중요한 징후들을 짚어내는 글을 만날 수 있어 반가웠다. 인간-동물이기를 넘어 비인간 – 동물로의 타자 되기를 시도하는 이기성의 시 「고기를 원하는가」뿐 아니라 성다영의 시 「행운은 여기까지」에서도 “나는 견딜 수 없다/나는 새를 파는 시장에 가지 않는다/나는 개를 사지 않는다”라는 구절이 기억에 남는다. 계란프라이가 볶음밥 위에 예쁘게 놓이기까지 닭은 A4용지보다 작은 철장에서 평생을 산다는 것, 삼겹살이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구워지기까지 돼지는 1년에 고작 40여분을 걷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제 안다. 성다영의 시는 그런 ‘새롭지 않은’ 풍경을 다시금 떠올리게 했다. 문선희의 『묻다』와 한승태의 『고기로 태어나서』 등 ‘동물르뽀’를 중심으로 이 책들이 동물권의 현실을 알리는 데 감당한 저마다의 역할을 정리한 이정숙의 문학평론도 인상적이었다. 지난호의 키워드를 하나만 꼽으라면 ‘정치성’이 아닐까 하는데, 동물권과 관련한 이 글들도 우리의 정치성을 다시 한번 묻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현희진 contextextur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