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독특한 식민지, 한국
식민화는 가장 늦게, 봉기는 가장 먼저
브루스 커밍스 Bruce Cumings
미국 시카고대학 석좌교수. 한국근현대사 및 동아시아 국제관계 전문가. 국내 번역 출간 저서로 『한국전쟁의 기원』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대학과 제국』 『김정일 코드』 『미국 패권의 역사』 등이 있음.
* 이 글의 원제는 “Korea, A Unique Colony: Last to be Colonized and First to Revolt”이다. ⓒ Bruce Cumings 2019/한국어판 ⓒ 창비 2019
** 나는 2019년 3월 28~29일 서울에서 열린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포럼’에서 파워포인트를 이용해 연설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3·1운동에 관해서 수년 전 확고한 결론에 도달했던 터라, 그때의 전반적인 진술들이 여전히 옳다고 생각하는지 자문했다. 답은 ‘그렇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연설의 대부분을 나의 저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Korea’s Place in the Sun: A Modern History, 한국어판 창비 2001)에서 끌어왔다. 논문을 요청받았더라면 새로운 내용으로 집필해야 했을 것이다.
한국의 제국 경험이 다른 식민지들과 구별되는 몇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세계시간대에서 그 경험은 ‘때늦은’ 것이었다. 1866년 벨기에 국왕 레오폴트 2세는 세계 전역에 가차없이 확장된 유럽식민주의에 주목하면서, “세계는 이미 거의 다 약탈되었다”라고 말했다. 일본의 한국 합병은 그로부터 거의 반세기 뒤에 이루어졌다. 그때쯤에는 반(反)식민주의 사상과 운동들이 특히 영국과 미국에 널리 퍼져 있었고, 우드로우 윌슨(Woodrow Wilson)이 민족자결을 요청하는 14개조 평화원칙을 발표할 당시(1918년—옮긴이), 일본은 그들의 식민기획을 본격적으로 출범시키지도 못한 상태였다.
두번째 특징은 한국과 일본이 왜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것같이 힘겹고 불편한 현대사를 공유하고 있는지 알려준다. 그것은 두 나라의 관계가 벨기에와 자이르, 혹은 뽀르뚜갈과 모잠비끄의 관계보다는 독일과 프랑스, 혹은 영국과 아일랜드의 관계와 훨씬 더 비슷하기 때문이다. 전지구적 식민주의는 흔히 이전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던 곳에 새로운 국가를 세우고, 민족·인종·종교·부족의 경계들에 따라 이리저리 나누어진 수많은 지리적 단위들을 정리해서 새로운 국경선을 긋고 다양한 부족과 민족으로 결집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 모두는 1910년 이전 수세기 동안 존재해왔다. 한국은 유럽 민족들보다 훨씬 이전에 민족적·언어적 통일성을 이루었고 오랫동안 공인된 국경선을 갖고 있었다. 더구나 중국에 상대적으로 인접한 까닭에, 한국인들은 늘 일본에 대해 잘하면 우월하고 못해도 동등하다고 느끼며 살았다.
그리하여 1910년 이후 일본인들은 새것을 만드는 대신 대체하는 데 주력했다. 한국의 양반 출신 선비-관리들을 일본인 지배 엘리트로 교체했으니, 그런 관리들은 대부분 흡수되거나 해체되었다. 이전의 중앙 중심 국가행정 대신에 식민지식 강압적 조정을 실시했으며, 유교 고전을 일본식 근대교육으로 바꾸었다. 또한 초보 단계의 한국자본과 전문기술 대신에 일본 자본과 기술을 구축하였으며, 한국의 인재를 일본의 인재로 대체했다. 종국에는 심지어 한국어 대신 일본어를 쓰게 했다.
한국인은 이러한 정책들에 대해 일본에 전혀 고마워하지 않았고, 일본이 새로운 것을 창출했다고도 믿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일본이 구체제, 한국의 주권과 독립, 초보적이지만 자생적인 근대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가적 자긍심을 송두리째 앗아갔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일부 다른 식민지 민족들과 달리, 대다수 한국인들은 일본의 통치를 오로지 불법적이고 굴욕적인 것으로만 받아들였다. 그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나 공통된 중국문화권이라는 점에서, 더 중요하게는 19세기 후반까지의 발전수준 면에서 양국이 아주 가깝다는 사실 때문에 한국인들은 일본의 지배에 더더욱 치를 떨었고, 무엇보다 양국관계에 격렬한 감정이, 즉 한국인들에게 “역사의 우연들만 아니라면 우리가 잘나갈 텐데”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혐오/존중의 양가적 메커니즘이 생겨났다.
셋째, 한국 식민화가 시기적으로 너무 늦었다는 점 외에도, 일본은 강대국, 특히 시어도어 로즈벨트(Theodore Roosevelt)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결정적인 지원을 받았다(1905년 로즈벨트와 일본이 태프트- 카쯔라 밀약을 체결하여 필리핀과 한국의 교환을 승인하고 식민지에서의 권리를 상호 인정한 것을 가리킨다—옮긴이). 일본은 영국과 미국이 일본 몫으로 주려고 한 제국을 얻었고, 1930년대 세계경제의 붕괴 이후에서야 다른 열강들과 마찬가지로 배타적인 지역 권역(圈域)을 조직하고자 했다(그리고 심지어 그때조차도 일본의 시도는 미온적이었고, 그때조차도 그들의 발전계획은 “정통적으로 서구적인” 것이었다).1
일본 식민주의자들은 1905~1910년 사이에 이루어진 그들의 권력 장악에 대한 격렬한 저항 때문에 한국통치의 첫 십년간 강압적인 ‘무단통치’를 밀어붙였다. 교사들까지 제복을 입고 긴 칼을 차고 다녔다. 총독부가 한국사회에 군림하면서 독단적이고 강제적인 통제권을 행사했다. 총독부와 관계를 맺은 세력은 오로지 잔존하는 상류계급과 식민지 벼락부자들뿐이었으며, 그 관계마저도 한국인들에게 국가기구의 중요한 역할을 맡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반대세력을 끌어들이거나 저지하기 위해 고안된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한국에서 의심할 여지없이 중앙관료권력을 강화했고, 토지귀족들과의 오랜 균형과 긴장을 완전히 깨버렸다. 나아가 상명하복식 운영을 통해 최초로 군(郡) 단위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