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이호철 李浩哲

1932년 함경남도 원산 출생. 1955년 『문학예술』로 등단. 소설집 『나상』 『이단자』 『문』 『이산타령 친족타령』, 장편 『소시민』 『남녘사람 북녁사람』 『물은 흘러서 강』 등이 있음.

 

 

 

동베를린 일별(一瞥) 기행, 2003년 가을

 

 

저는 지난 2003년 9월 10일부터 18일까지 독일 베를린 시에서 열렸던 제3차 세계문학인대회의 ‘아시아·태평양 축제주간’의 한국문학인 대표로 초청을 받아 간 길에, 바야흐로 통일 13주년을 맞은 옛 동독지역을 둘러볼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6·25사변 중인 1950년 12월, 만 18세의 나이로 단신 월남해와서 반세기 넘게 애오라지 망향의 꿈을 부여안은 채 글만 써온 72세의 소설가의 눈으로 ‘통일이라는 것이 이뤄지고 13년이 지난 독일이라는 나라의 모습을 속속들이 한번 보아내자’는 것이었습니다만, 체류기간이 원체 1주일 남짓인데다 본행사 틈틈이 이런 일을 해낸다는 것이 당키나 했겠습니까요.

하지만 본행사라는 것은 주로 여덟시 넘어 밤시간에, 독일어판으로 2002년에 나온 연작소설 『남녘사람 북녁사람』 원작자 자격으로 제가 우리말로 한 대목 읽고, 그걸 현지 배우 한분이 독일어로 읽고 나서, 두어 시간씩 질의·응답이 진행되었으니까 저로서는 그닥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어느 하루 낮 오후 세시경 우리나라의 분단문제에 대해 현지인의 사회로 토론자리가 있긴 했으나, 그것도 저로서는 과히 부담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같이 동행했던 영상물 제작회사 ‘인터뷰 코리아’사의 대표인 민병모 형과 함께 베를린에 도착한 이튿날, 동베를린의 한 복덕방을 통해 에버스발데 전철역 근처에 맞춤한 싸구려 민박집 하나를 구했습니다. 물론 현지어로 통역해줄 젊은 사람 하나도 벌써 민형이 서울에서 인터넷을 통해 구해놓았더군요.

이렇게 취재길에 나섰는데, 미리 밝혀두거니와 저는 통일이 이뤄지기 전인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에도 이곳에 한번 와본 일이 있었어요. 바로 1991년이었지요. 그때 마악 공산주의체제라는 것이 무너지기 시작한, 구 소련제국의 모스끄바며 뻬쩨르부르그며, 폴란드의 바르샤바며,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며, 그밖에도 서유럽의 몇개 나라 도시들을 50여일간이나 돌고 나서 1993년에 『세기말의 사상기행』이라는 책자 한권까지 펴냈습니다만, 역시 12년이라는 세월이 엄청나기는 하더군요. 그때하고는 생판 달라졌더라구요. 그때는 주로 동베를린 쪽에 체류하면서 기차로 두 시간 거리쯤 되는 남쪽의 막데부르크라는 곳까지 내려갔는데, 대낮에 현지의 한 주정뱅이가 동독에서 첫 데모가 벌어졌던 라이프찌히로 당장 안내해주겠노라고 엉겨붙어 꽤나 당황하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주위가 황량한 속에서도 동독 현지주민들은 거개가 온통 들떠 있더라구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대단히 신바람이 나 있는 사람도 물론 개중에는 있었지만, 태반의 동독사람들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어 보였습니다. 도대체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어느 방향으로 돌아가는가, 제각기 조용히 지켜보자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한데 그로부터 다시 12년 만에 와보는 동·서독 통일 뒤의 동베를린은?

그 인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우선 12년 전 그때의 황량하던 국면에서는 어느정도 벗어났다, 하지만 동독이라는 공산주의 치하를 살았던 현지인들은 아직도 뭔지 어리벙벙해 있다,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다시 딱 부러지게 말하자면, 날이면 날마다 개개인 속으로 깊이 개입해들어오던 강한 정치권력, 공산주의 정치권력이라는 것이 어느날 갑자기 곤두박질치듯이 없어져버리자 모두가 하나같이 훌렁훌렁 휑해졌다고 할까요, 모두가 그 무슨 무중력상태에 함입(陷入)해버린 듯 보인다고 할까요. 오늘의 동베를린 사람들은 하나같이 각자가 평상(平常)의 사람살이로, 본래의 오순도순한 사람살이로 돌아와준 것은 무척 고맙고 대견하지만, 연중 365일 하루 24시간 노상 무겁게 짓눌러오던 공산주의 정치권력이라는 것이 깨끗이 물러가준 것은 당장 날아갈 듯이 시원하고 좋지만……

취재에 나서서 이틀째 되는 날 아침 일찍 우연히 만난 한 오십대쯤 보이는 건설현장의 노동자에게 “옛날 동독 치하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짧게 한마디로” 하고 물었을 때, 극히 잠깐 골똘하게 생각해보고 나서 즉시 돌아온 그이의 대답인즉 “그야 삶의 질(質)은 그전보다 엄청 높아졌지만, 경쟁사회 속을 하루하루 견뎌내기가 무척 버겁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나는 물끄러미 잠시 그 체대 큰 뚱뚱한 건설노동자의 얼굴을 마주 쳐다보면서 나대로 동독 주민들의 일반적인 수준의 높이를 잠시 생각해보았지요. 그렇습니다. 수준의 높이…… 수준, 수준! 어느 모로 보아도 건설현장의 일꾼, 우리 표현으로는 노가다판의 ‘품팔이 일꾼’으로 생긴 사람에게서 즉답으로 저런 말이 나온다는 것부터가 역시 다르구나, 싶어지며 철학의 나라 독일을 새삼 일깨워주더군요.

아무튼 첫 취재길에 나서서 마수걸이로 걸린 것이 우리가 며칠 동안 거처할 민박집을 구해준 복덕방 주인었는데, 이 사람의 사사로운 개인 사연부터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이 사람은 우리의 취재목표에 쏘옥 들어맞았어요. 조촐한 복덕방 사무실을 물어 물어 어렵게 찾아가 이만저만해서 동쪽 멀리 한국에서 왔노라고 운을 떼며, 동독시절에도 이곳에서 살았느냐, 그때는 직업이 뭐였느냐고 첫인사 삼아 무심하게 묻자, 그이는 대번에 반색을 하며 동독시절에는 건설회사 사무직원으로 있었노라고 하고는 “마침 잘 왔다, 당신들에게 중요한 문건 하나부터 보여줄 것이 있다”면서 서둘러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뒤쪽 서류함에서 웬 서류뭉치 하나를 찾아 우리 앞에 내놓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곤 와락 흥분하면서 얼른 보기에는 조금 정신나간 사람마냥 횡설수설하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라고 덮어놓고 소리소리 지르는 것 같았는데, 통역을 통해서 전후사정을 자세히 들어본즉, 아닌게아니라 참으로 해괴한 사연이었습니다. 그 종이뭉치들은, 동독 치하 때 보안당국이 본인들 몰래 전국민을 엄하게 감시한 개개 자취들을 담은 것들로, 예를 들면 그 당시 어느 누군가가 자기의 수상해 보이는 언행 같은 것을 본인 몰래 동독 보안당국에 밀고했다면 바로 그 실물 증거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동·서독이 통일된 뒤인 오늘에는 떡하니 법으로 정해져서, 피해 당사자가 문건을 보고 싶다고 관계기관에 신청만 하면 열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예 복사까지 해서 내준다는 겁니다. 아니, 아무리 인권이 좋다지만 세상에, 원 저럴 수가……

그래서 지금 이렇게 동베를린 에버스발데 전철역 근처의 큰길가에서 복덕방을 운영하고 있는 이 사람도 혹여나 싶어 관계당국에 신청을 했는데, 맙소사! 세상에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바로 친누님과 자형이 자기를 밀고했던 증거물이 나왔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항상 서방세계로 도주할 생각을 먹고 있고 노상 우리 공산체제에 불만을 갖고 있다고 밀고했더라는 겁니다. 물론 자형이나 누님이 열성당원들이긴 했지만, 설마하니 친동생을 당국에 밀고까지 했으리라고 어찌 꿈속엔들 상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홉살 터울의 누님과는 평소에 의좋은 남매로서 말다툼 한번 해본 일이 없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 돌아가신 뒤에는 어머니 노릇까지 누님이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누님이 어떻게 자기를 당국에 밀고할 수 있느냐,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 그래서 이 사람은 즉각 누님과 아예 인연을 끊었다, 단호히 의절을 했노라는 것입니다.

그이는 그러지 않아도 큰 눈을 부릅뜨며 자신의 이런 행태에 어떤 식으로건 반대 기미를 보이는 사람에게까지 한바탕 행패를 부리려는 듯이 아주아주 격분을 했습니다. 제 쪽에서 슬그머니 겁까지 났을 정도로요. 독일 통일이라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피차 시퍼렇게 살아 있는 상태로 가족 의절을 가져다준 셈입니다. 동·서독이 통일이 안되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이 남매에게 이런 횡액은 애당초 닥치지 않았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래서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은 가도 가도 복잡한가봅니다만, 이런 경우를 닥치니까, 처음에 거론한 그 ‘수준’이란 것도 힘을 쓰지는 못하는 것 같더라구요. 그 ‘수준’과는 또 차원이 엄청 다른 문제더라구요. 실제로 사람들 사는 개개적인 세부세부 국면은 그 ‘수준’보다는 바로 이런 모습으로 개개의 감정 쪽이 더 기승을 부리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어머니 같은 누님이 자기를 밀고했다! 명명백백한 증빙문건이 이렇게 있지 않은가, 어찌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이건 도저히 못 참는다, 당연히 의절이다. 이렇게 길길이 뛰는 그이를 진정시킬 겸 저는 우선 나지막하게 물었습니다.

“그 누님이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고는 있습니까?”

“그야, 알고 있지요. 교외 쪽에 무슨무슨 마을의 단독주택에 살고 있지요.”

“전화번호 같은 것은 알고 있습니까?”

“그야, 알고 있지요.”

저는 우선 이 사람 누님댁의 전화번호와 정확한 집주소부터 챙기고는 차근차근 조심조심 나지막이 말했습니다. 사실은 나도 당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다. 어쩌면 당신보다 몇배 몇십배 더 어려운 상황에 있다. 이렇게 말하면 당신은 날 쳐죽이려고 들는지 모르지만 차라리 내 입장에서는 당신이 부럽기까지 하다. 나로서는 당신처럼 그럴 수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싶다는 말이다. 이것 봐요, 당신 누님은 내가 보기에 나쁜 사람은 아니야.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 내가 보기에 누님은 당신을 보호하려고 그런 짓을 한 거야. 누님은 그때 그 체제가 영원히 가리라고 철석처럼 믿고 있었고, 그러니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남동생이 서방으로 내빼다가 보안경찰의 총알에 맞아죽는 것을 막아보려는 일념에서, 당신을 저들 감시하에 묶어두려고 했던 거야. 왜냐, 당신 죽는 것은 도저히 못 보겠기에. 그러니 여보, 내 말 들어. 제발, 내 말 한번만 들어. 내일 다시 올 테니까 당신이 우선 누님에게 전화를 걸어둬. 만날 용건이 생겼으니 내일 몇시에 찾아가겠다고 전화를 해둬. 그렇게 누님댁엘 가보자구. 그렇게 한번 3자 대면으로 모든 얘기를 죄다 털어놓아보자구. 미리 털어놓자면, 그 경우 내 입장은 우선 당신편이지만 당신 누님편도 될 것이야. 왜냐하면 누님도 누님대로 할 말이 많아 보이니까 말야. 오죽하면 당신을 당국에 밀고까지 했겠느냔 말이야. 내 말 알아듣겠어? 내일 그렇게 하자구. 나도 이참에 진정으로 보람있는 일을 한번 해보고 싶단 말이야. 대체 독일 통일이라는 것이 뭐냔 말이야. 통일이라는 것이 대체 뭐 말라죽은 것인데, 멀쩡하게 잘살아가던 당신 집안을, 당신 남매를 생으로 이렇게 찢어놓았느냐, 이거야. 그 옛날 나름대로 오직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제대로 살려내자는 일념에서 한 누님의 그 행태를, 당신 쪽에서 깊이 이해해야 한다고.

상대는 잠시 온 상판이 굳어지며 아래위 입술을 꽉 물고 조금 골똘하게 생각하는 것 같더니, 다음 순간 단호하게 머리를 가로저었습니다. 도저히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깊은 앙금을 지닌 채 이대로 간단히 누님과 자형을 만나러 제 발로 찾아갈 수는 없다는 것인가봅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누님을 찾아가는 것은 자기로선 오불관언(吾不關焉)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알겠다, 일단 누님을 찾아가 만나보고 나서 당신을 다시 찾아오마 하자, 그이는 조금 의아해하며 누님이 과연 당신들을 만나주겠는지, 자칫 헛걸음이나 되지 않을는지, 그 점을 염려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단 부딪쳐보기로 하고 그 복덕방을 나왔습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우리는 그 누님이 살고 있다는 베를린 교외 멀리 있는 동네로 전철과 기차를 번갈아 타며 찾아갔습니다. 그 마을은 제각기 널찍널찍한 터에 그만그만한 집들이 차락차락 가라앉은 주택가였습니다. 우리 기준으로 보자면 대표적인 중산층 주택가였지만, 뭔가 조금 살풍경해 보였습니다. 생동하는 활기가 없어 보였는데, 잠시 뒤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마을 생긴 외양은 그러하지만, 주로 연금으로 먹고사는 늙은 부부가 많다는 것 아닙니까.

어제 그 복덕방을 나와서 곧장 그 누님댁에 전화를 걸었습죠만, 누님의 반응은 시큰둥하더랍니다. 멀리 한국에서 취재차 왔노라고 하며 내일 오전 열시경 댁으로 찾아뵈려 한다고 여쭈었더니, 저편에서 아연 긴장을 하며 경계부터 하는 것이 전화로도 생생하게 느껴지더라는 겁니다. 그러곤 어떻게 전화번호를 알았느냐, 무슨 문제를 취재하려고 날 만나려 하느냐 등등 꼬치꼬치 되묻더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럴수록 이쪽에서는 시원시원하게 적당히 둘러대니, 아무튼 남편하고 의논해서 알려드릴 터이니 내일 아침 여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