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테러 이후의 세계와 한반도

 

동북아시아의 화해와 일본

 

 

와다 하루끼 和田春樹

일본 토오꾜오대 명예교수. 많은 저서 중 『한국전쟁』 『역사로서의 사회주의』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등이 국내에 소개되어 있음. 이 글의 원제는 「東北アジアの和解と日本」임.

ⓒ和田春樹 2002 / 한국어판ⓒ창작과비평사 2002

 

 

1. 소위 포스트 9·11사태와 우리

 

9·11 테러사건은 이슬람 원리주의자의 일파인 빈 라덴(Osama bin Laden)의 조직이 미국의 정책과 체제에 가한 공격이었다. 그 바탕에는 미국이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하는 이슬람세계에 관해서 취해온 정책에 대한 강한 비판과, 거기에 기인하는 미국에 대한 증오가 깔려 있었을 것이다. 무차별 살육이라 할 만한 규모로 행해진 테러에 대해 미국 대통령은 ‘테러는 미국적 가치, 즉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라고 규정하면서 미국 국민의 단결과 세계 여러 국가의 지지를 요청했다. 그리고 테러리스트에 대한 보복과 테러리스트를 돕는 국가에 대한 제재를 내용으로 하는 전쟁을 시작했다. 현대기술의 정수를 모은 미국의 군사력 앞에서 탈레반군이 분쇄되고 아프가니스탄을 유효지배(有效支配)했던 정권은 괴멸했지만, 빈 라덴을 위시한 테러리스트들은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세계로 흩어진 것처럼 보인다. 뉴욕의 테러로 3천 수백명이 죽었지만 미국의 아프간전쟁으로 죽은 사람은 일반시민만 해도 벌써 그 수효를 넘었다는 계산이 나온 바 있다. 난민이 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같은 시기 이스라엘은 자폭테러를 되풀이하는 하마스(HAMAS)를 빈 라덴 같은 테러리스트라고 부르고 아라파트정권을 테러리스트를 비호하는 탈레반정권으로 보는 논리를 펴며 미국의 작전을 본뜨려고 했다. 미국의 보복은 오래된 증오심을 북돋우면서 새로운 증오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테러리스트를 지원하는 국가는 괴멸시킬 수 있어도 테러리스트는 군사행동으로 괴멸시킬 수 없다. 오히려 군사행동이야말로 테러리스트 예비군을 낳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프간에 있었던 알 카에다(Al-Qaeda)의 기지에서는 유격대 전투원이 양성되었지만, 미국의 비행학교에서는 테러리스트가 훈련을 받았던 것이다. 증오가 광신과 결부되면 테러리스트가 보통사회의 한가운데에서 태어난다.

그래서 지금 우리들은 증오의 세계화를 두려워해야 한다. 테러리즘의 기반인 증오감을 해소하지 못하면 테러리즘의 극복은 불가능하다. 팔레스타인 문제의 타개와, 미국과 이슬람세계의 관계개선이 우선 이루어져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세계 각 지역에서 그 지역 내에 존재하는 증오의 구조를 해소하도록 노력해야겠다. 미국은 반테러리즘 전쟁을 세계화하고 아프리카에서부터 동남아시아로까지 확대하려고 하는데, 이것이 어떤 역사를 열게 될지 그 결과는 미지수다. 최악의 씨나리오는 인류의 멸망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슬람세계와의 관계를 변화시키도록 미국에 호소하지 않으면 안되겠지만, 그와 더불어 우리가 속한 지역인 동북아시아에 존재하는 증오에도 눈을 돌리고 그것을 극복하도록 힘을 기울여야 한다. 동북아시아에서 증오의 중핵을 이루고 있는 것이 남북한과 일본의 모순, 일본에 대한 남북한의 증오, 그리고 남한과 북한 사이의 모순과 상호간의 증오이다.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57%는 일본을 싫어하고 일본인의 56%는 북한이 싫다고 한다. 35년간의 식민지지배, 52년간의 내전·정전체제─남북한과 일본은 증오의 삼각관계 속에 놓여 있다. 이것을 해소하는 일이 1953년 이후 이 지역의 과제였는데, 월드컵 한·일공동개최를 눈앞에 둔 이 싯점에서 그것은 더욱 긴박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 글은 이 구조에 가장 책임이 있는 일본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또는 변화하지 않았는지, 현재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해보려고 한다. 일본이 1965년 이래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도 있고 요즘은 오히려 그전보다 나빠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는만큼, 상세히 검토해보고자 한다.

 

 

2. 일본과 남북한의 관계─1980년대까지

 

일본은 1951년 쌘프란씨스코평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패전국의 상태를 벗어났지만, 이것은 기본적으로 서방 여러 나라와의 강화(講和)로 동북아시아 국가들과의 전후 처리는 포함되지 않았다. 유일한 예외는 타이완으로 도망친 국민당정부와 맺은 일화평화조약(日華平和條約, 1952)이었지만, 이 조약의 내용은 쌘프란씨스코조약만도 못했다. 보수본류(保守本流)에 속한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정부는, 쌘프란씨스코조약에서 연합국에 대해 인정한 일본의 배상(賠償)지불 의무는 물론이고 그 조약에서 부과한 역무(役務)배상도 국민당정부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이 전쟁으로 가장 큰 피해를 끼친 중국에 대해서 본래 자기들이 배상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것이 전후 일본을 만든 사람들의 최초의 얼굴이었다.

동북아시아에서 역사의 청산을 문제삼게 된 것은 1965년의 조약에 이르는 일·한교섭과정에서였다. 한국측은 일·한교섭을 시작할 즈음 식민지지배에 대한 배상을 청구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히면서도 한국병합(倂合)조약은 처음부터 무효였다고 주장하며 청구권에 따른 지불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서 일본정부는 병합조약이 유효한 것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청구권에 의거한 지불은 청구근거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이행할 수 없다고 말했다. 대립의 세월이 계속된 끝에 한국이 청구권 요구를 하지 않는 대신 일본이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의 경제협력을 제공하는 것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구(舊)조약의 무효에 관한 조약 제2조는, 합의된 영문텍스트를 양쪽이 자기들의 주장에 맞게 적당히 해석함으로써 매듭지어졌다. 한국 국민들이 이 조약에 저항했지만 박정희(朴正熙)정권은 반대를 누르고 조약체결로 나아갔다.

그러나 한국 국민의 비판의 목소리가 너무도 강했기 때문에 시이나(椎名) 외상은 가(假)조인차 방한했을 때 공항에서 “양국의 오랜 역사에 불행한 기간이 있었던 것은 참으로 유감이며 깊이 반성한다”고 말했고, 또 가조인 후 이동원(李東元) 외무부장관과 함께 발표한 공동성명서에, 이장관이 “불행한 관계”에서 비롯된 “한국 국민의 대일감정에 대해서 설명”한 것에 대해 시이나 외상이 “(그런 점에) 유의할 것이며, 과거의 이런 관계를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깊이 반성한다고 말했다”는 문구가 들어갔다. ‘유감’이라는 말은 아쉽다는 뜻으로 사죄의 뜻은 없다. 또 무엇이 유감스럽고 무엇을 반성하는지도 분명치 않다. 실제로는, 병합이 조약에 따라 합의해 이루어진 것인만큼 사죄도 반성도 보상(補償)도 필요없다는 것이 일본정부의 정식입장이었으니 시이나의 발언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이 조약에 반대하는 혁신계의 대중운동이 일어났지만, 노동단체의 주장은 이 조약이 일·미·한의 군사동맹으로 발전해서 일본이 한반도의 전쟁에 휘말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구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반면 당시 일부 역사가들 중에는, 이 조약이 예전의 식민지지배를 합법화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서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간섭을 다시 초래하게 된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소수파의 의견은 뒤이어 일어난 베트남반전운동과 함께 퍼져나갔다. 미국의 전쟁에 가담하는 일본의 입장에 대한 반발이 계기가 돼서, 일본의 현재와 과거의 가해책임을 묻게 된 것이다. 1968년에 고조된 전공투(全共鬪)운동과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으로 대표되는 베트남반전시민운동, 그리고 신좌익 당파의 운동은 이런 점에서 공통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절정기에는 일본의 거의 모든 대학에서 학생들이 대학당국을 비판하는 스트라이크를 하고 있었는데, 선량한 청년과 시민은 다 베트남전쟁 반대시위에 참가한 것 같은 인상이었다.

그러나 전공투운동은 대학개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국주의 대학의 해체’를 외치다가 옥쇄했다. 신좌익운동은 1969년 초를 정점으로 해서 하강하기 시작했고 부분적으로 위험한 공전(空轉)을 시작했다. 70년에는 적군파(赤軍派)가 JAL 요도호를 공중납치해 북한으로 망명했고, 전공투운동의 참가자들은 급속히 사회와 화해하기 시작했다.

한편 일본정부는 타나까(田中) 수상, 오오히라(大平) 외상의 이색적인 보수본류 콤비가 1972년 닉슨(R.M. Nixon)의 중국방문을 기회로 삼아 일·중 국교수립을 추진했다. 뻬이징정부는 일화평화조약의 파기를 조건으로 내걸었기 때문에 배상청구를 부득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본은 “전쟁을 통해서 중국 국민에게 커다란 손해를 끼쳤던 것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깊이 반성한다”고 역사에 대한 반성을 처음으로 공식 표명했다. 전쟁이 끝나고 27년 만의 일이다. 중국혁명의 박력이 일본정부에 영향을 미쳤음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68년 이후의 운동이 일본사회를 흔든 결과도 여기에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미·중 화해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북한이었다. 김일성(金日成)은 “닉슨이 백기를 들고 뻬이징으로 간다”고 표현하고 1972년에 7·4남북공동성명을 냈다. 한국전쟁 이래 적대해온 남북관계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남북특사의 상호방문은, 북측에는 남한의 경제달성에 대한 초조감을 안겼고, 남한에는 유일사상체계가 헌법화된 북의 정치체제에 대한 대항의식을 낳아 유신쿠데타로 향하게 만들었다. 이때 한국에서는 야당지도자 김대중(金大中)씨가 망명을 결심해서 저항의 의지를 표명했다.

이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고 1973년 8월 김대중씨는 KCIA에 의해 토오꾜오에 있는 호텔에서 대낮에 납치되었다. 일본 국민은 이 사건에 충격을 받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김대중씨의 모습, 탄압 속에서도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한국인의 모습을 처음 봤다는 사실이다.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한 일본정부의 대응을 비판하는 운동은 베트남반전시민운동 관계자가 다수 참가했고, 74년의 민청학련(民靑學連)사건 이후에는 시인 김지하(金芝河) 등의 구원운동을 중심으로 해서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대중적 운동이 되었다. 일한연대연락회의와 ‘김지하 등을 구하는 모임’의 아오찌 신(靑地晨), 오다 마꼬또(小田實), 와다 하루끼 등이 사회당·공산당·공명당 3당의 수뇌와 의논해서 9월 19일 3만명의 대집회와 시위를 실현하기에 이르렀다. 이밖에 ‘한국문제 기독자 긴급회의’(나까지마 마사아끼中嶋正昭, 쇼오지 쯔또무東海林勤)의 활동도 지속적이고 활발한 것이었고, 잡지 『세까이(世界)』(야스에 료오스께安江良介)의 캠페인도 강력했다. 오오에 켄자부로오(大江健三郞), 쯔루미 슌스께(鶴見俊輔), 히다까 로꾸로오(日高六郞) 등 작가·지식인, 그리고 김달수(金達壽)·김석범(金石範)·이회성(李恢成) 등 재일조선인 지식인도 열심히 활동했다.

이런 운동 속에서 1975년 일한조약 10년에 즈음해서 일한연대회의는 일본과 조선의 역사를 다시 보고 일한조약의 문제점을 지적하려는 움직임을 명확히 보였다. 사할린에 연행되어 노동을 강요당하고, 전후 거기에 남겨진 조선인의 문제를 제기해서 보상을 요구하는 첫 재판도 타까기 켄이찌(高木健一) 변호사에 의해 이때 시작됐다.

같은 1975년에 베트남전쟁이 끝났다. 한국에서는 베트남 패전의 충격이 인민혁명당 관계자 8명의 처형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극에 달한 탄압정치에 대한 반발이 79년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저항으로 나타났고, 마침내 김재규(金載圭) KCIA부장에 의한 박정희 대통령 암살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듬해인 80년 5월 전두환(全斗煥) 장군의 쿠데타가 일어나 광주시민의 저항이 탄압되고 김대중씨에게 사형판결이 내려졌다. 이에 대한 구원운동은 한국문제와 관련해 일본에서 일어난 운동 중 최고로 고조되었다. 일한연대위원회, ‘한국문제 기독자 긴급회의’, ‘가톨릭 정의와 평화 협의회’는 긴밀히 제휴하면서 운동을 펼쳤고, 새로 태어난 시민서명운동 ‘김대중씨 등을 죽이지 마라’에는 다수의 젊은이가 참가했다. 기타 노동단체, 각지의 시민운동그룹 등도 전국적으로 열성적인 운동을 펼쳤다. 김대중씨의 운명에 대한 일본 국민의 동정이 높아졌고 오오에 켄자부로오, 시바 료오따로오(司馬遼太郞), 마쯔모또 세이)오(松本淸張) 등의 작가도 적극적으로 일했으며, 이런 목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