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아시아인에 의한 동북아 평화는 가능한가

 

동아시아 경제와 한국의 87년체제

교착과 혁신

 

이일영 李日榮

한신대 중국지역학과 교수, 경제학. 저서로 『중국의 농촌개혁과 경제발전』 『개방화 속의 동아시아: 산업과 정책』(공저) 『동북아시대의 한국경제 발전전략』(공저), 주요 논문으로 「새로운 한반도 경제체제의 구상」등이 있음. ilee@hanshin.ac.kr

 

*본고는 2005년 7월 15일 열린 창비―시민행동 공동심포지엄 ‘87년체제의 극복을 위하여’에서 발표한 글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1. 들어가며

 

필자는 아직도 가끔 나쁜 꿈을 꾼다. 악몽은 크게 두 종류이다. 하나는 시험과 관련된 것으로, 예를 들면 수학시험이 내일로 다가왔는데 공부한 것은 없고 벼락치기도 가능하지 않아 안절부절못한다. 또 하나는 폭력에 시달리는 것이다. 계속 누군가에게 쫓기다가 절벽에 다다르고 어느 순간 잡혀서 묶이고 갖은 방법으로 고통을 당한다. 그래도 이제는 찌르는 아픔과 치떨리는 분노에 사로잡히는 꿈은 크게 줄었다. 아마 1987년 이후의 민주화 덕일 것이다. 시험에 드는 꿈은 아직도 형태를 바꾸어 나타나는데, 넉넉지 못한 인품 탓인가 하면서도, 복잡한 현재와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의 뿌리를 생각해보기도 한다.

확실히 1987년 이후 한국사회는 크게 변화했다. 무엇보다도 헌정체제의 변화와 그에 따른 형식적 민주주의의 진전이 있었는데,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 87년‘체제’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민간부문이 크게 늘어났으며 국가의 역할은 축소되었다. 민주화운동과 함께 성장해온 노동운동과 농민운동도 일정하게 시민권을 확보함으로써 이전과 같은 저임금―저농산물가격 체제를 유지하기는 어려워졌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점은, 이러한 국내의 세력재편이 글로벌화의 진전, 동아시아 경제의 발전, 사회주의권의 붕괴라는 세계사적 변화와 중첩되어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국내와 같이 확연하게 1987년으로 경계짓기는 어렵지만, 세계경제에는 1980년대 후반 이후 매우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이러한 세계경제의 변화는, 국내에서 작동하고 있는 국가체제, 재벌체제, 노동체제, 농업체제와 교착하고 또 상충하고 있다. 경제‘체제’는, 제도·조직 요소를 핵심으로 하되, 재화 고유의 특성이나 기술 요소가 포함되기도 하고, 나아가 가치·규범 요소까지도 포괄하는, 안정적이고 꽉 짜인 개념이다. 이러한 ‘체제’ 개념을 엄격하게 사용하려 한다면, 1987년 이후의 한국경제는 ‘체제’라기보다는 ‘과도기’나 ‘이행기’로 표현하는 것이 덜 위험할 것이다.

그러나 국제환경과 국내체제가 잘 조응되지 않는 탈구(脫臼) 상태가 의외로 길어지고 있다. 또 변화의 내용에 생산기술, 생산조직 등 세계적 차원의 생산양식 문제가 포함되고 있으며, 지금까지의 운동방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대안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따라서 ‘문제형성’과 ‘문제해결’의 관점에서라면 ‘87년체제’라는 개념이 유용하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 글에서는 1987년 이후의 경제씨스템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내외적 계기와 모순을 살펴보고 새로운 전화의 방안을 모색한다. 동아시아 차원의 새로운 생산네트워크의 진전과 이에 비한 국내 씨스템의 지체, 그리고 이러한 교착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과제를 살펴볼 것이다. 구체적인 논의를 위해 자동차산업과 농업을 관찰의 사례로 택한다. 자동차산업은 전후방 연관효과가 높고 주요 재벌기업과 민주노총의 핵심사업을 포함하고 있으며, 농업은 경제발전의 초기와 완성기에 중요한 산업이다. 이것들은 87년체제를 형성한 동력을 담지하고 있으면서 87년체제를 넘어서기 위한 사회경제적 대안이 필요한 부문이다.

 

 

2. 87년 이전과 87년 이후의 개관

 

1) 87년 이전: 국가단위의 추격체제

분단 이후 남북한에 형성된 두 개의 경제체제는 매우 이질적인 것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 남북한 발전전략에는 상당한 정도의 유사성이 존재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남북한의 경제체제에 모두 선진국 또는 남북한 상대국을 따라잡겠다는 강력한 국가의지가 작동했다. 이러한 ‘추격·추월 전략’의 전제는 국가를 기본단위로 한다는 것, 경제발전의 중심을 공업화에 둔다는 것이고, 이를 뒷받침하는 씨스템은 가격을 왜곡하는 거시정책과 통제적인 관리체제이다. 즉 국가는 일정하게 이자율, 환율, 원자재가격, 농산물가격을 억제하고, 희소자원 분배에 개입한다. 종종 유치산업 보호를 위한 산업보호정책이 시행되고 무역장벽이 설치된다.1 국가 단위에서 공업화를 통한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국력 강화를 시도하고 자원의 집중적 동원과 관리를 행하는 것은 역사상 새삼스러운 사례가 아니다. 선진국들도 절대주의 국가를 통해 상대적으로 강력한 산업정책을 실시했던 시기가 있었고, 스딸린시대의 소련에서도 공업화를 위해 국가가 적극 개입했으며 억압적 정치체제를 구축했다.

한국에서 일국적이며 폭력적인 스딸린식의 추격발전 전략이 채택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성격과 관련이 있다.2 먼저 제2차 세계대전 후 확립된 브레튼우즈(Bretton Woods) 체제는 국가 단위의 정책적 자율성 공간을 일정하게 허용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자본통제와 고정환율제를 통해 각국 정부가 사회보장제도, 그리고 완전고용 및 성장과 같은 국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거시경제정책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전세계 무역을 자유화할 수 있도록 하는 체제였다. 선진국 내에서는 자유무역 옹호자들과 사민주의자들 간의 타협의 산물로 각국 정부에 자국 경제를 운용하는 데 상당한 자율성을 허용하는 체제가 등장했고,3 한국은 이에 편승하여 거시적 안정(물가 억압) 속에서 경제성장을 추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50년대 중반 이후에는 얄따(Yalta) 체제가 만든 분계선이 더욱 공고화되었다. 그때까지 미국은 자국의 영향권에 있는 개발도상국을 지원하는 수단으로 무역과 해외직접투자를 중시하였으나, 1956년부터 분위기가 일전되었다. 흐루시쵸프의 대외적 경제공세,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뿌뜨니끄의 성공적 발사, 소련의 제6차 5개년계획 등으로 ‘소련경제 위협론’이 제기되었고, 이로 인해 체제간 경쟁이 유발되었다. 개발도상국에서도 경제적 자유주의나 정치적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것보다는 개발지상주의적 국가가 등장하는 것을 용인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4

 

2) 87년 이후: 교착(交錯)과 교착(膠着)의 체제

국가주도의 추격발전모델이 크게 타격

  1. 남한이 수출시장을 목표로 대기업을 육성하면서 경공업에서 중공업 단계로 이행했다면, 북한은 처음부터 강력한 중공업 우선발전을 추진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국유화·집단화를 행했다. 물론 세계시장의 중요성과 미시 조직의 효율성 문제를 경시한 북한경제가 나중에 치러야 할 댓가는 엄청난 것이었다.
  2. 박정희시대에 경제성장과 독재체제가 서로 보완적이었던가 독립적이었던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이병천 「개발독재의 정치경제학과 한국의 경험」, 이병천 엮음 『개발독재와 박정희시대』, 창비 2003; 조석곤 「박정희신화와 박정희체제」, 『창작과비평』 2005년 여름호.) 필자는 특정한 국제환경 속에서 성장과 독재체제가 양립했으며, 1980년대 후반 이후 그러한 국제적 조건이 약화되었다고 본다.
  3. 데이비드 헬드 외 지음, 조효제 옮김 『전지구적 변환』, 창작과비평사 2002.
  4. 末廣昭 『ギャッチアップ型工業化論:アジア經濟の軌跡と展望』, 名古屋大學出版會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