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과 현장

 

동아시아 지역주의의 세 시기

16~21세기의 정치경제와 지정학

 

 

마크 쎌던 Mark Selden

미국 코넬대학 동아시아 프로그램 선임연구원, 웹저널 The Asia-Pacific Journal: Japan Focus코디네이터. 최근 저서로 War and State Terrorism: The United States, Japan, and the AsiaPacific in the Long Twentieth Century (공저), China, East Asia and the Global Economy: Regional and historical perspectives (공저) 등이 있음.

 

  • 이 글의 원제는 “East Asian Regionalism and its Enemies in Three Epochs: Political Economy and Geopolitics, 16th to 21st Centuries”이며, The Asia-Pacific Journal: Japan Focus에 2009년 2월 25일 게시된 원문을 저자가 간추려 보내준 축약본의 번역이다. 인용 주를 비롯한 이 글의 원문은 http://japanfocus.org/-Mark_Selden/3061에 게재되어 있다. ⓒ Mark Selden 2009 / 한국어판 ⓒ (주)창비

 

 

1. 동아시아 지역주의: 18세기

 

19세기 내내, 그리고 20세기 들어와서도 한동안 동서양 양측에서는 모두 역동적인 서구의 세계질서를 우위에 놓고 내향적이고 보수적이며 나약한 동아시아가 서구 자본주의와 군사적 우위 앞에 무너졌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그 귀결이 식민열강과 그 계승자들의 시각을 실체화시키는 유럽중심적인 세계관이었다. 상당수의 논문들에 끈질기게 퍼져 있는 본질주의적 전제는 서구의 우월성이 역사적 불변이어서 한번 정해진 이상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근년에 부상한 대안적 패러다임 중 하나는 중국이 경제적·지정학적으로 단지 동아시아 지역질서에서만 지배적인 중심이 아니라1 적어도 16세기에서 18세기, 그리고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서구열강이 총력을 다해 들어오는 19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전지구적 정치경제에서 주역으로서 두드러진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동아시아와 세계경제를 중국을 중심에 놓고 살피는 시각을 구체화한 작업이 중국학자들에게서가 아니라 일본과 미국의 연구자들로부터 먼저 나왔다는 점이다. 이 글에서 내가 제안하는 것은 19세기에 유럽식민주의자들에 의해 파괴되기 전까지는 동아시아가 세계의 하나의 중심이었다는 점과 관련하여 유럽중심적 시각과 중국중심적 시각 두가지 모두를 다시 생각해보고, 19세기 이후의 지역적 재구조화를 살피면서 유럽중심주의와 선을 긋는 대안적 시각이 오늘날 지닌 의미를 고찰해보자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특히 중국-일본-한국의 관계와 전지구적 시각에서 동아시아가 차지하는 위치를 염두에 두겠다.

우선 하마시따 타께시(濱下武志), R. 빈 웡(R. Bin Wong), 케너스 포머랜츠(Kenneth Pomeranz), 스기하라 카오루(杉原薰), 앤서니 레이드(Anthony Reid), 안드레 군더 프랑크(Andre Gunder Frank)의 저작을 참조해보면 유럽 자본주의가 동튼 16~18세기에 동아시아는 그 자체로 뚜렷한 특징을 지닌 활기찬 경제적·지정학적 지대의 중심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2 동아시아 질서의 두가지 요소가 어울려 뚜렷이 구별되는 지역적이며 전지구적인 특색을 만들어냈다.

첫째, 동아시아 세계의 정치경제와 지정학을 형성한 가장 중요한 연결고리 중 하나가 중국 중심의 조공무역 질서인바, 이것이 공식적인 국가적 유대를 통해 협상된 계약에 따라 이뤄지는 한편, 조공사절단의 주변부에서 수행된 비공식적인 교역에도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그 체계를 추동한 또다른 요소는 넓은 범위에서 이뤄진 합법 및 불법 교역으로, 이 중 상당부분이 중국제국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항구도시들을 이어주었다. 한국, 베트남, 류우뀨우(琉球)열도, 그리고 중앙·동남아시아의 수많은 왕국들이 중국과의 조공무역에 활발히 참여한 반면, 일본은 17~19세기에 조공사절단을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이 해적질로 규정한 연안무역 외에도 중국과 일본의 교역은 류우뀨우열도와 홋까이도오(北海道)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뤄졌을 뿐 아니라 나가사끼(長崎)를 통해 직접적으로도 계속되었다. 한마디로 청나라와 토꾸가와(德川)의 통치에 의해 국가간 교역이 규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공무역과 비공식적인 연결망을 통해 동아시아의 교역이 지속되면서 이 지역의 경제적 활력을 떠받쳐주었다.3

둘째, 16세기 이래 은(銀) 교환을 매개로 동아시아가 세계경제와 연결됨으로써 중국과 동아시아지역의 경제는 물론 동서 교역관계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여타 제품들 가운데에서 차, 비단, 도자기, 아편의 대금을 지불하기 위한 은의 이동은 마닐라를 주요 운송항으로 하여 유럽과 아메리카를 동아시아, 특히 중국과 결속시키는 데 결정적이었다. 실제로 아메리카에서 중국으로의 대규모 은 유입은 16세기에 시작되어 17세기 중반에 정점에 오르면서 세계 주요 지역들을 연결하고 아시아 내의 교역과 중국 경제를 변화시켰다. 하마시따, 포머랜츠, 레이드가 은을 중심으로 상술하는 이야기의 시작은 아편대금으로 인해 은이 빠져나가는 한편 아편전쟁에 패하면서 중국과 아시아가 서구열강이 정한 조건에 따라 억지로 개방하여 조약항을 내주고 그곳의 치외법권을 허용함으로써 중국이 주권을 상실한다는 등의 과정에 얽힌 숱한 재앙들이 아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전지구적 교역에서 중국이 주도하며 아시아 내의 상업이 번성하던 그 이전 시기에서 시작한다. 1450~1680년의 중국과 동남아시아 교역을 전지구적인 시각에서 다루는 레이드에 따르면, “이 시기 상업의 교역양상을 동남아시아 입장에서 보자면 인도로부터 옷감, 아메리카와 일본으로부터 은, 중국으로부터 동전, 비단, 도자기, 기타 제조품을 수입하고 그 대신 베트남과 캄보디아가 내온 후추, 향료, 방향목, 수지(樹脂), 도료, 별갑(鼈甲), 진주, 사슴가죽, 설탕을 수출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아시아의 다른 지역, 유럽, 아메리카로부터 엄

  1. 중국이 18세기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중심이었다는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주목해야 할 점은 그 이전 몽골제국의 통치 때와 마찬가지로 18세기 당시에도 대초원지대의 민족인 만주족이 중국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뚜렷한 특징이 청제국에 더해져서 이를테면 청제국이 국경지대의 민족들, 특히 몽골인, 티베트인, 위구르인들과 맺은 관계뿐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민족들과 맺은 관계에서도 그 특징이 잘 드러난다는 점이다.
  2. Takeshi Hamashita, ed. by M. Selden and L. Grove, China, East Asia and the Global Economy, Routledge 2008; R. Bin Wong, China Transformed, Cornell Univ. Press 1997; Kenneth Pomeranz, The Great Divergence, Princeton Univ. Press 2000; Sugihara Kaorued., Japan, China and the Growth of the Asian International Economy, 1850-1949, Oxford Univ. Press 2005; Anthony Reid, Southeast Asia in the Age of Commerce, 1450-1680, Yale Univ. Press 1988 and 1993; Andre Gunder Frank, ReORIENT, Univ. of California Press 1998.
  3. 청제국기인 18세기에 중국이 평화의 정점에 올라 상대적으로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된 이유가 만주족의 통치력 때문이라는 사실은 중국의 국가와 민족이 띠는 다민족적 성격, 그리고 중국이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와 맺는 관계는 물론 중앙아시아 및 대초원 지역과 맺는 전반적 관계에 관해 중요한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는데, 이 문제는 여기서 다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