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동아시아의 변화, 한국사회의 대응

 

동아시아 협력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

국민국가들의 협력인가 국민국가의 극복인가?

 

 

이남주 李南周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 정치학. 주요 논문으로 「북한 개혁의 ‘이륙’은 가능한가」(본지 112호) 「동북아시대 남북경협의 성격과 발전방향」(본지 120호) 등이 있음. lee87@mail.skhu.ac.kr

 

 

1. 동아시아 협력론의 부상과 문제점

 

1990년대 들어서 ‘동아시아’는 인문학은 물론이고 사회과학의 중요한 분석범주로 등장하였다. 특히 비판적 지식인들이 이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당시 급격한 내외의 환경변화에 맞추어 새로운 이념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일국적 시각과 세계체제적 시각의 매개항으로, 특히 전지구적 자본의 획일화 논리에 저항하는 거점으로 동아시아를 주목하게 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1 그러나 동아시아론이 한국사회의 당면한 실천과제와 연결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우선 냉전체제의 해체와 중국 대외개방의 가속화로 동아시아를 단절시켰던 대륙과 해양 사이의 장벽이 무너지고 역내의 경제·문화·정치 교류가 빠르게 증가하였다. 여기에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 사이에 다양한 협력사업이 진전되면서 한반도를 하나의 전략적 단위로 사고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고, 동북아에서 갖는 지정학·지경학적 잇점을 살리는 것이 21세기 한반도 발전전략의 핵심적 내용으로 떠올랐다.2

이에 따라 최근 동아시아 협력론은 많은 실천적·정책적 의제를 생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들이 과연 새로운 담론이 함축하고 있는 근본적 문제들을 얼마나 진지하게 다루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의문이 제기된다. 특히 비판적 지식인들도 2000년 남북정상회담부터 2003년 노무현정부의 출범에 이르는 급격한 변화과정에서 장기적인 발전방향 문제보다는 단기적인 정책과제에 지나치게 많은 관심을 빼앗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논의의 구체성을 획득하는 것은 바람직하나 그렇다고 논의의 이념적 기초에 대한 검토를 게을리할 경우 또다른 맹목성에 빠지기 쉬울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한국사회의 동아시아 협력론은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더욱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첫째, 어떤 동아시아 질서인가. 지금까지 동아시아 협력론은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를 전제로 하고 한반도의 발전전략을 논의하는 경우가 많으나 그 전제에 대한 검토는 불충분하다. 물론 동아시아 문제에 대한 주체적인 시각의 견지와 한반도 문제의 해결이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질서를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를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지역질서라는 것은 개별국가 차원만의 실천의 산물이 아니라 역내의 다양한 정치·문화·사회·경제적 주체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어떤 지역질서가 만들어지는가에 따라 개별국가의 발전과 변화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다. 따라서 지역질서를 종속변수가 아니라 독립변수로 고민할 필요가 있으며, 어떤 동아시아 질서가 바람직한가라는 규범적인 문제는 물론이고 어떤 동아시아 질서가 가능한가라는 실질적인 문제도 동시에 해명할 필요가 있다.

둘째, 동아시아 협력론이 제기하고 있는 실천과제의 장기적 영향이다. 노무현정부의 출범 이후 동북아중심국가 위원회, 동북아시대 위원회 등이 구성되고 로드맵이라는 형식으로 많은 정책의제를 생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의제들이 주로 국민소득이라는 기준에 따른 ‘잘살아보자’라는 지향 이외에 어떤 장기적인 정책비전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이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형성하기 위한 노력은 불충분하였다.3 이들 정책의제들이 현실화된다면 한국의 경제·사회구조를 크게 변화시킬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러한 변화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형성하지 않으면 그 구상은 모래성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물론 이미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 시도들이 있었으나 아직은 위의 문제들에 만족할 만한 답을 주었다고 보기는 어렵다.4 이 글은 동아시아 협력의 개별적인 정책의제보다는 기본구도에 촛점을 맞추어 기존의 동아시아 협력론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하여 한국사회의 동아시아 협력론이 더욱 과학적인 전망을 획득하도록 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특히 동아시아 질서에 대한 논의가 지나치게 이상적인 공동체적 논의에 경사하거나 아니면 현실주의에 발목을 잡히는 문제점을 극복하고, 나아가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의 발전이 한국사회에 어떤 새로운 과제를 던져주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데 촛점을 맞추고자 한다.

 

 

2.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에 대한 전망: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

 

왜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가 필요한가? 이러한 문제의 답은 냉전의 종식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동서냉전의 종식은 세계체제의 안정보다는 위기의 심화라고 할 수 있으며 새로운 ‘천하대란’으로 이어지고 있다.5 냉전시기 동아시아 국가들은 어느 한 이념을 대변하는 역외의 패권에 의존하여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불안한 안정을 누릴 수 있었고 이에 따른 나름의 질서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냉전의 종식은 이러한 불안한 안정과 질서도 같이 해체시켰으며, 동아시아 국가들은 갑자기 약육강식의 국제질서 속으로 내던져졌다. 소련에 의존하는 것은 불가능해졌고 그렇다고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이 자신의 안정을 보장해줄 수 있다는 믿음도 가지기 어렵게 되었다. 실제로 미국은 냉전시기의 조심스러움을 버리고 자신의 군사·경제적 이익을 노골적으로 추구하였다. MD 추진 및 북한 핵문제에 대한 일방주의적 태도, 인권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경제모델의 강요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미국의 이같은 정책들은 동아시아 국가들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으며 이에 대한 지역적 차원의 연대 필요성을 증가시켰다. 때마침 이루어진 유럽통합의 급진전과 북미자유무역협정 체결도 지역주의에 대한 관심을 증가시켰다.

특히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를 계기로 동아시아 차원의 협력은 급진전되기 시작하였다. 1997년 12월 “ASEAN+3(한·중·일)”이 비공식 정상회의를 개최한 이후 역내의 경제협력, 안보협력, 문화·사회협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1990년대 초반 ‘아시아적 가치’ 논쟁 등 주로 추상적인 차원

  1. 백영서 「중국에 ‘아시아’가 있는가?」, 『동아시아의 귀환』, 창작과비평사 2000.
  2. 이에 따라 한국에서의 동아시아 협력론은 동북아 협력에 촛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 이수훈(李洙勳)의 경우는 ‘동북아시대’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동북아’라는 개념이 동아시아나 아시아·태평양보다 더욱 분명한 가치지향성을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현재 참여정부의 동북아 구상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이수훈 『세계체제, 동북아, 한반도』, 아르케 2004, 134면). 반면 최원식(崔元植)은 동아시아론이 동북아 중심론으로 축소되는 것은 지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동아시아가 동북아보다는 더욱 다양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으로 보인다(최원식 「주변, 국가주의 극복의 실험적 거점―동아시아론 보유(補遺)」, 정문길 외 엮음 『주변에서 본 동아시아』, 문학과지성사 2004,313면). 백낙청(白樂晴)의 말처럼 동북아,동아시아 자체가 복합적이고 유동적인 개념이 될 수밖에 없고 어떤 의도와 목적인가가 분명하다면 유연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백낙청 「동북아와 한반도 평화체제는 가능한가?」, 한국인권재단 엮음 『한반도 평화는 가능한가?』, 아르케 2004,151~52면). 본고도 동북아와 동아시아라는 표현을 모두 사용하는데, 동아시아 질서 및 협력에 촛점을 맞추어 논의를 전개할 것이다.
  3. 강상중(姜尙中)은 일본 중의원 헌법조사회 발언에서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일본이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 하고, 일본의 경제구조를 개혁하고 미국을 대신하여 수입대국이 될 필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이를 위한 단기적 고통을 감내하여야 한다는 점을 솔직하게 주장하였다(강상중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을 향하여』, 뿌리와이파리 2002, 39~40면).
  4. 이와 관련한 논의로는 백낙청 외 『21세기의 한반도 구상』, 창비 2004; 한국인권재단 『한반도 평화는 가능한가?』, 아르케 2004; 이일영 엮음 『동북아시대의 한국경제 발전전략』, 한신대 출판부 2004; 최장집 「동아시아 공동체의 이념적 기초」, 『아세아 연구』 2004년 겨울호(통권 118호)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백낙청의 경우는 위기국면에 진입한 세계체제에 대한 동북아시아, 그리고 한반도의 창조적 대응의 가능성과 장기적 비전을 탐색하고 있으나 동아시아 질서 자체에 대한 논의를 적극적으로 전개하지는 않았다. 최장집(崔章集)의 경우도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를 민족주의에 대한 대립항이 아니라 국민국가들의 공존질서라는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으나 평화안보문제에 대해, 그것도 주로 한반도 및 한반도와 미국·일본의 관계에 촛점을 맞추고 있어 동아시아 질서의 전체구도에 대한 설명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논의에서는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에 대한 전망과 이런 전망이 한국사회의 변화에 던져주는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5. 백낙청, 앞의 글 14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