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학문의 주체성과 오늘의 대학

 

‘동양사학’의 탄생과 쇠퇴

동아시아에서의 학술제도의 전파와 변형

 

 

백영서 白永瑞

연세대 사학과 교수. 저서로 『동아시아의 귀환』 등이 있음. baik2385@yonsei.ac.kr

 

 

1. 서(序)

 

대학개혁은 우리 사회의 주요 개혁과제 중 하나이기에 논의가 무성하지만,(교육이 아닌) 학문의 관점에서 대학개혁을 따져보고 실천하려는 노력은 별로 없는 것 같다. 필자는 이에 대한 반성의 차원에서 동아시아 학문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거기에서 우리가 새로운 학문체계를 구상하는 데 도움이 될 역사적 자산을 찾아보고자 한다.

17세기 이후 서구에서 학술지, 학회 및 대학의 긴밀한 상호연관 속에 형성된 근대학문이 전문화되는 때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1848〜1914)였다. 유럽에서 학문의 분과화(分科化)는 근대적 인간의 주요 활동영역인 정치·경제·사회에 대응한 정치학·경제학·사회학으로 나타났고, 뒤이어 역사학·인류학·동양학의 분할이 추가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 분과화야말로 우리가 과학적 학문이라 일컫는 근대적 학문체계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일찍이 메이지(明治)시기의 일본인들은 이것을 ‘학과(學科)’라 불렀고, 이 말에 단순히 ‘여러 학문’이란 보통의 용법이 있음을 알게 되자 더한층 전문화된 새로운 학문이란 의미를 강조하려고 ‘과학(科學)’이란 조어를 만들어냈다.1 그들이 이해한 과학은 오늘날의 개별학·전문학이란 의미인데, 일본인이 근대과학을 독창적 방법이나 패러다임보다 제도로서 파악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국가권력이 주도적으로 근대를 추구하면서 서구 학문을 도입했기 때문에 먼저 제도를 도입해 근대적 지식의 생산과 유통을 가속화하는 데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유럽 모델을 일본에서 수용·변용한 이 ‘제도로서의 학문’은 다시 동아시아에 확산되고, 그 과정에서 개별 국민국가와 학문의 관계에 따라 변형을 겪게 되지만, 그 기본틀은 유지된 채 오늘까지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동아시아 근대학문의 형성과 변형의 전모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의 근대적 제도 안에서뿐만 아니라 그 바깥에서 이뤄진 지식의 생산과 유통과정까지도 포괄해야 한다.

이 글은 앞으로 진행될, ‘제도 안의 학문’과 ‘제도 밖의 학문’2이란 두 양상이 대립하면서 교차하는 동태적 과정이란 견지에서 동아시아 근대 역사학의 궤적에 관한 연구의 서설에 해당한다. 필자는 일본 제국대학에서 형성된 역사학 3분과(서양사·동양사·국사) 체계의 일부인 ‘동양사학’이 20세기 전반기 동아시아에서 어떻게 전파되고 변형되었는지를 주로 규명하려고 한다. 특히 동아시아 근대 역사학(을 포함한 인문사회과학)의 제도적 측면이 안고 있는 식민지성에 주목하고자 한다. 서구에서 19세기에 자리잡은 전문분과로서의 역사학과 비교할 때, 근대를 강요당한 동아시아에서는, 근대적 역사학 수립과정에서 ‘과학’을 제한적이고 분열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과학’이라는 서구적 권위에 기대어 그것을 각자의 이념적·정치적 입장에 따라 보편적인 이론으로 고집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서구의 일방적 통제 아래 전파된 근대 학술제도인 역사학은 동아시아 자신의 역사를 온전히 해명할 언어를 제대로 갖추지 못해 지식과 일반대중이 분리된 지적 식민지성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되었다. 그러므로 역사학이 현실과 부분적으로밖에 접촉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이 식민성이 일본이란 유사서구의 통제 아래 역사학을 수용한 식민지 조선과 타이완에서는 훨씬 더 심각했다는 지역 내부의 차이도 이 글에서는 중시될 것이다.

동아시아의 근대적 역사학, 특히 동양사학과 국민국가의 관계의 기본틀 및 식민지성을 규명함으로써 당면한 역사학의 위기를 넘어설 길을 찾고 더 나아가 새로운 학문체계를 구상하는 데 이 글이 다소나마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2. 일본 제국대학에서 창안된 ‘동양사학’과 민간사학

 

일본 사학사를 정리한 이에나가 사부로오(家永三郞)는 메이지유신(1868) 이후의 일본 역사학을 두 경향의 병행으로 파악했다. 하나는 “역사를 오로지 실천적 관심에 기반해 연구하려는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사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 자체에 온 힘을 기울여 엄밀한 사료조작이나 정밀한 사실천명에 뛰어난 고증학적 경향”이다.3

근대 일본에서 먼저 출현한 것은 전자의 계보에 속하는 ‘문명사’로서 메이지시대 초기에 저널리스트들이 이끈 계몽운동의 토대가 되었다. 문명발달 경로를 규명하려 한 이 조류는 메이지정부를 비판하고 인민 중심의 역사상을 제시함과 동시에, 역사학을 사회과학으로 규정하고 체계적·합리적 방법론을 내세운다는 특징이 있었다. 그 뒤를 이은 것이 1880년대에서 1900년대에 걸쳐 나타난 ‘민간사학’이다. 이것은 이미 설립된 제국대학의 관학에 대립하여 실증보다 역사서술에 비중을 두고 평민주의의 발달을 역사 속에서 드러내어 국민으로서의 공동성을 추구한다는 특징이 있었지만, 학문적 조직과 사료의 엄밀한 구사에서는 미숙했다. 그 맥을 이은 것은 맑스주의 역사학인데, 아카데미즘에 뒤지지 않는 실증성과 참신한 문제설정 및 왕성한 실천적 관심에 힘입어 1920년대부터 급속히 발달했다. 이 흐름은 카노 마사나오(鹿野政直)가 말하는 ‘민간학’의 일부인데,4 이 글에서 주목하는 ‘제도 밖의 학문’에 해당한다. 이에 대비되는 ‘제도 안의 학문’은 토오꾜오(東京)제국대학 사학과의 실증주의를 표방한 아카데미즘 사학이 그 원류이다. 이것이 대학 등 근대적 학술·교육제도의 확산과 더불어 전파되면서 주류로 자리잡는다.

일본에서 아카데미즘 사학은, 메이지정부가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국사편수사업기구를 설치한 것에서 출발하였다. 이 기구를 주도한 메이지 초기 역사학자들은 합리적 실증주의에 입각해 정사(正史)를 서술하고자 한 고증학 계통의 한학자 그룹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역사학이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역사기술체계인 ‘사관(史官)의 기록학’과 분명히 다른 것으로서 “최근 과학이 발달하여 분과(分科)하는 대세”에 따른 것임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근대 역사학이 국민국가 형성에 기여하는 데 그 의의가 있기에 대부분의 역사학자가 “가장 고심하는 것은 국사의 편찬이고 국사는 본래 애국충정으로 기술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5

이런 사정은 이 기구를 주도하다가 그것이 내각에서 제국대학으로 옮겨진(1888) 직후, 제국대학 사학과로 진출해 그 기틀을 다진 시게노 야스쯔구(重野安繹,1827~1910)가 사학회 기관지 『사학회잡지』 창간호에 게재한 글에서 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본회 설립의 일은 내가 종래 수사(修史)의 직을 봉(奉)하다가 제국대학으로 옮겨온 이후, 초빙교사 독일인 리스(L.Riess)와 만나 그로부터 학회를 설립하고 잡지를 발행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나 또한 그 필요성을 느껴 동료들에게 그 뜻을 전하고” 함께 설립에 나섰다고 한다. 그는 사학회를 만든 목적을 “종래 사국(史局)에서 채집한 자료에 의거하고 서양 역사연구의 방법을 참고하여 우리 국사의 사적(事蹟)을 고증하고 또한 그것을 편성하여 국가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6 요컨대 국가의 주도 아래 제국대학과 학회 및 학회지가 거의 동시에 만들어짐으로써 근대 역사학의 체제화 기반이 유럽에서와 달리 한꺼번에 이뤄졌던 것이다. 실증주의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독일의 역사학자 랑케(Leopold von Ranke,1795~1886)의 제자 리스가 말한 바 “역사연구의 표준을 높이 내세우고 순수한 하나의 과학”으로 만들며 역사서를 “공중의 완독(玩讀)”에 기여하고자 설립한 사학회(1889.11)와 사학회지(1889.12)가 근대 역사학의 형성에서 맡은 역할도 중요하지만, 이를 주도한 주체가 제국대학 사학과이므로 여기에 집중해 살펴보겠다.

일본에서 19세기 독일의 대학제도인 신학부·법학부·의학부·철학부로 이뤄진 표준적인 학부 모델을 이식하면서도 ‘이과(理科)’를 첨가하는 등 약간의 수정을 가한 것이 1886년 대학령(大學令)이었다. 이에 따라 제국대학에는 법과대학·의과대학·이과대학·공과대학과 더불어 문과대학이 설치되는데, 문과대학의 사학과는 1887년에 신설된다. 그리고 1889년 일본사 교육·연구를 목적으로 한 국사학과가 설치되고,1904년 문과대학이 개혁되면서 사학과 속에 국사학·지나(支那)사학·역사학(사실상 서양사학)의 세 분야가 있다가 1910년에 지나사학이 동양사학으로 개조되고 서양사학이 독립해 3분과제가 확립된다. 이로써 역사를 주자학적 ‘명교(名敎)도덕’에 종속시키기를 거부하고 서구 역사학의 방법론을 도입해 ‘지공지평(至公至平)’한 역사학을 확립하고자 한 아카데미즘 실증주의 역사학이 제도적으로 정착된 셈이다.

일본에서 창안한 독특한 학문제도인 3분과제는 일본 역사학의 특징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사를 세계사로부터 분리시킨 바탕이 이미 3분과제의 성립 싯점부터 있었던 것인데, 이것은 일본 중심적 역사인식의 소산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메이지 이래의 국가(근대천황제 국가)질서를 정통화하는 기능을 해왔다. 그 결과 외국사학은 사실상 국사학과의 써비스 기관과 같은 지위에 불과하다는 자조적 발언이 나올 정도였다. 이 점은 이 글의 주요 관심대상인 동양사학의 탄생과정에서도 드러난다. 동양사가 서구의 학문에 비해 경쟁력을 갖는 ‘일본의 독자적인 학문’으로 형성되는 과정은 서구에서 이미 체계화된 것을 직수입한 다른 학과와는 달랐다.

청일전쟁이 시작된 1894년, 외국사를 동양사와 서양사로 나누고 동양사의 비중을 높이자는 주장이 중등교육계에서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고등사범학교의 역사과목이 세 영역으로 분리되고, 곧 문부성도 이 의견을 채용해 전국 중등학교의 교과에 동양사를 첨가하도록 했다. 이것이 ‘동양사’라는

  1. 중국에서 명말 이래 싸이언스(science)의 번역어로 ‘격치(格致)’가 사용되었는데 1905년 과거제 폐지의 영향으로 일본에서 들여온 의미로서의 ‘과학’이 그것을 대체했다. 이로부터 과학에 혼재하던 ‘과거의 분과(科擧之分科)’란 본래 의미는 사라지고 중국상황에서 다양한 내포를 갖는 현대 술어가 되었다.
  2. ‘제도로서의 학문’이 대응하지 못한 사회적 수요를 어느정도 충족시켜준 제도 밖의 학술활동을 잠정적으로 ‘운동으로서의 학문’이라고 이름붙여볼까 생각중이다. 다소 낯선 용어인 ‘운동으로서의 학문’이란 근대적인 제도학문에 의해 배제되고 억압당한 동아시아의 지식―이것은 종종 ‘민간적·민속적 지식’이나 ‘저널리즘적 지식’으로 폄훼되었다―의 생산과 유통을 가리킨다. 그것의 중요한 특징은 지배적인 학문제도와 관행 및 (이것을 지탱해주는) 지배적 사회현실의 외부에서 그것의 폐쇄성을 비판하면서, 생활세계 내부에서 다수 민중을 향해 열린 학문을 수행하려는 지향을 갖는 것이다.
  3. 家永三郞 「日本近代史學の成立」, 『日本の近代史學』,東京:日本評論社 1957 참조.
  4. 카노는 민간학의 관점에서 일본 학술사를 재구성했다.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각주 11 참조.
  5. 坪井九馬三 「史學に就て」,『史學雜誌』 제5편 제1호(1894년 1월호),9면,13면.
  6. 重野安繹 「史學に從事する者は其心至公至平ならざるべからず」, 『史學會雜誌』 1889년 창간호,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