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동학 경전의 탄생
케리그마를 거부한 천안·목천판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김용옥 金容沃
호는 도올(檮杌). 철학자, 한의사, 고려대 정교수 역임. 최근 저서로 『도올주역강해』 『용담유사』 『동경대전』(전2권) 『노자가 옳았다』 『나는 예수입니다』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중용 인간의 맛』 등이 있음.
* 이 글은 2022년 11월 29일 ‘천안 목천판 동경대전·용담유사 간행 기념 국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필자의 기조강연문 「“동학 초창기 역사에 있어서 천안 목천 사람들의 긴장과 헌신”: 동학혁명의 획기적 계기를 만든 동학경전 목천 목활자본과 목판본」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나의 어린 기억에 남아 있는 천안과 목천
나 도올은 천안 사람이다. 천안읍 대흥동 231번지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자라났다. 휴전이 성립하기 전에 재빼기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는 제3소학교(나중에 천안중앙국민학교가 됨)에 들어갔다. 1959년 서울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하기까지 나는 순 천안토박이로 컸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천안삼거리는 삼남에서 과거 보러 올라가는 사람들이 쉬어가던 연못과 주막집, 그리고 능수버들을 연상케 하는 옛 모습을 지키고 있었다. 삼거리를 지나 진고개라는 꽤 큰 행길이 난 흑성산 옆자락의 고갯길을 넘어가면 목천(木川)에 이른다. 국민학교 꼬마들이 이 수십리 먼 길을 붕어 잡고 멱 감는다고 마구 쏴다녔다.
나는 그렇게 천안의 기를 흠뻑 마시며 컸다. 지금 독립기념관이 들어선 그 산이 흑성산인데, 우리 꼬마들은 토박이말로 ‘거무신’이라고 불렀다. ‘흑성(黑城)’이라는 한자표기로 보면 그것이 ‘검다’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볼 수 있겠지만, 당시 씨알농장을 운영하시던 함석헌 선생이 집회에서 하신 말씀에 의거하면, 거무신의 ‘거무’는 검다는 뜻이 아니고 ‘곰’을 의미한다. 거무신은 ‘곰신〔熊神〕’, 즉 신성한 경배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천안 사람들은 이 거무신의 외경스러운 기를 받으며 컸던 것이다. 우리 때만 해도 거무신에는 호랑이가 살았다. 내가 국민학교 4학년 때의 일인데 우리 동네 대흥동 석호네 집에 엄청 잘생긴 거대한 셰퍼드개가 있었는데 새벽에 거무신 호랑이가 내려와서 물고 사라졌다고 했다. 그 ‘쌔빠또’는 끝까지 저항하면서 용감히 싸웠는데 마당에 피가 낭자했다. 나는 그 낭자한 핏자국을 해 뜬 후에 일어나 보았다. 그 싸움 장면은 실제로 여러 사람들이 보았다고 했다.
진고개를 넘어 북쪽으로 올라가면 목천향교가 나오는데 개울 옆으로 송덕비 류의 고비(古碑)들이 주욱 늘어서 있고 주변의 소소(蕭蕭)한 광경은 매우 고색창연한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목천은 지금은 천안에 귀속되어 있지만, 옛날에는 천안 못지않은 넓은 면적의 별도의 고도(古都)였다. 북으로 성거산이 있고, 남으로 세성산이 있다. 1894년 10월 21일의 세성산전투는 동학혁명의 진로에 암운을 던진 아쉬운 전투였다. 만약 목천에 집결한 동학농민군 3천여명이 일본군·관군을 패퇴시켰더라면 우금치전투의 양상도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경사(京師)로 직향한다는 농민혁명군의 꿈이 이루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여튼 내가 보고 느끼며 자란 산하가 모두 피맺힌 조선의 운명, 아니 세계사의 찬란한 여명을 가져온 동학과 관련이 있는데도 나는 그런 것을 알지 못하고 컸다. 천안이라는 고을은 본시 천안군과 목천현, 직산현, 이 세 고을이 순치(脣齒)의 관계를 이루면서 상호 발전, 변천하여오다가 1914년 일본의 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 개편된 행정구역상 천안군으로 합군(合郡)된 것이다. 이 지역은 옛부터 조선대륙의 중요한 센터로서 신라·백제·고구려가 항상 각축을 벌이는 곳이었고, 조선시대에도 교통량이 가장 많은 곳에 속했다. 천안은 이별의 눈물이 뿌려지는 곳이기도 했지만 또 동시에 만남의 환희로 흥타령이 울려 퍼지는 곳이기도 했다.
나는 본시 머리가 영민치 못하기도 했지만, 학벌이니 문벌이니 족벌이니 지벌이니 동창이니 하여 패거리를 운운하는 인간세의 행태가 혐오스러워 일체 그러한 인간관계를 멀리하고 살아왔다. 그래서 단지 고향이라는 이유로 천안에 갈 일은 없었다. 그런데 천안의 경우는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너무도 처절하게 나의 어릴 적 낭만이 파괴되어버렸다. 가슴이 아파 한발자국도 고토를 밟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동학을 계기로 하여 고향을 다시 인식하게 되는 인연은 기묘하다면 참으로 기묘하다 할 것이다.
수운의 문제의식과 출판 사명: 수직적 종교사유와 수직적 권력구조의 상응성
동학은 경주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그 동학을 창도한 사람들의 열망의 원천이 충족되는 계기, 간망의 이상이 실현되는 계기는 나의 고향 천안 및 목천·병천 지역 사람들이 제공했다. 1883년 계미년 천안·목천 지역에서의 『동경대전(東經大全)』·『용담유사(龍潭諭詞)』의 집중적 발간이라는 이 사건을 계기로 동학은 비로소 오늘 우리가 말하는 동학이 될 수 있었고, 무극대도(無極大道,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가 사용한 동학의 본래 명칭)의 사명을 다할 수 있게 되었다. 동학은 하나의 종교로서 시작된 운동은 아니다. 그것은 종교임을 거부하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개혁운동이다. 수운은 ‘다시개벽’이라는 말을 썼는데 이 ‘개벽(開闢)’이라는 단어야말로 서양의 ‘종교’(religion)를 대신할 수 있는 우리식 표현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의 종교는 대체로 ‘초월적 절대자의 존재성’을 전제하고 그 존재에게 나의 운명을 맡기는 절대적 복속을 ‘신앙’(belief)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동학은 ‘무위이화(無爲而化)’를 전제로 한다. 그것은 하느님 자체가 세계와의 관계에서 조작적인 개입〔爲〕이 없이 스스로 그러한 변화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하느님과 인간은 세계생성의 동반자가 되는 것이다. 하느님은 인격적인 존재(Being)인 동시에 철저히 비인격적인 생성(Becoming)이다.
수운의 사상은 매우 심오하다. 논리로 다 분해하기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말하는 진리에 동참했기 때문에 동학은 생명력을 얻은 것이다. 수운은 동학에 대한 발상을 서학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수운에게 다가온 것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는 테제였다. 보국안민이란 외부로부터 우리 민족에 부과되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위협으로부터 어떻게 이 민족을 보전할까 하는 아슬아슬한 테제였다. 수운은 이 위협을 극복하는 길은 물리적인 대응이 아니라 우리에게 위협을 가하는 힘을 생성하고 있는 그 핵심적 구조의 허점을 파악하고 그 죄악을 개벽함으로써 우리 문명의 건강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정신혁명인 동시에, 우주적인 과업이었다. 보국의 ‘보’는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구극적으로 ‘우리 민중의 의식을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서양문명의 초월이었고, 기독교, 서학, 모든 절대적 존재를 전제로 하는 황제적 종교체제의 초극이었다. 수운은 모든 불연(不然, 비상식)은 기연(其然, 상식)으로 회귀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의 사상은 난해했고, 주변 사람들에게나 후대인들에게 제대로 이해되질 않았다. 그리고 그의 사상이 조선의 원래적 도덕풍토에서 나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영남의 유생들은 그를 ‘서학쟁이’로 휘몰았다. 수운은 마치 무함마드가 메카를 떠나 메디나로 거점을 옮기는 성천(聖遷, 헤지라Hegira)을 단행하듯이, 낯선 전라도 남원 땅으로 삶의 거점을 옮긴다. 수운은 그곳에서 홀로 고독을 씹으며 방대한 저작을 할 수 있었다. 수운의 저술이 다 남원 체류기간 동안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교훈가」 「도수사」 「권학가」 「동학론」 「수덕문」 「몽중노소문답가」 등 매우 핵심적인 저작이 남원에서 이루어졌다. 이 행위의 의미를 우리는 명료히 이해해야 한다.
수운은 자신의 대각과 설법의 내용이 주변 사람들에게 일시에 정확하게 전달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기 사상이 조선왕조체제의 근원적 부정 위에 서 있기 때문에, 왕조에 수용될 수 없다는 것도 확실히 깨달았다. 따라서 자신의 육신은, 모든 의로운 순절자들이 그러하듯이 죽임을 당함으로써 그 온전한 가치를 드러낼 수 있다고 믿게 된다. 대신 그의 사상은 그의 저작을 통하여 한 글자의 왜곡도 없이 후세에 전달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불태운다. 그래서 수운은 파접(罷接, 접주接主제도를 취소함)을 통하여 후계자 체제를 한 사람으로 일원화시키고 그에게 자기 원고를 넘기면서, 한 글자도 변형이 없는 상재(上梓)를 부탁한다.
수운에게 있어서 ‘도통의 전수’라는 것은 선종(禪宗)에서 말하는 바와 같은 추상적이고도 상징적인 의발의 전수가 아니고, 매우 구체적인 물리적 사명이다: “내 원고를 한 글자 오석(誤釋)이나 변형이 없이, 있는 그대로 인쇄하여 세상에 유통시켜라.” 이 사명을 받은 자가 경주 동촌 황오리(皇吾里)에서 태어난 해월(海月) 최경상(崔慶翔, 1827~98. 육군법원에서 교수형을 당해 72세의 나이로 사망함. 최시형時亨은 1875년부터 쓴 이름)이다.
4복음서나 바울의 서한이 없이는 오늘날의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었다. 성경이 없이 종교가 존속할 수 없는 것이다. 무함마드의 계시도 『꾸란』으로 남았기 때문에 이슬람이 존재할 수 있었다. 동학도 『용담유사』나 『동경대전』이 있기 때문에 그 생명력이 지금 여기서 굽이치고 있는 것이다.
동학은 인류종교사에서 케리그마가 없는 유일한 종교
그런데 동학 경전은 타 종교 경전과 견주어 말할 수 없는 유니크한 특징이 있다. 그것은 ‘케리그마’(Kerygma)의 필터를 거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케리그마’란 20세기 초 기독교 성서신학에서 생겨난 말이긴 하지만, 그것은 모든 종교 영역에 적용될 수 있는 유용한 개념이다. 케리그마는 문자 그대로는 ‘선포’(proclamation)라는 뜻인데, 초기 신봉자들(초대 교회)이 자기들의 교주에 대해 갈망하는 이미지를 선포하기 위하여 경전의 언어를 구성한다는 뜻이다. 예수의 경우, 그 케리그마는 ‘그리스도’ 즉 구세주(메시아),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포이다. 이 케리그마의 필터를 거치면 인간 예수,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는 사라지고, 케리그마의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미지, 즉 초대 교회의 갈망만 남는다. 다시 말해서 2천년 동안의 기독교의 역사는 역사적 예수를 말한 것이 아니라, 초대 교회에서 형성된 그리스도를 선포한 것이다. 사실 오늘날의 기독교라는 것은 이렇게 케리그마화된 예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수운은 기독교(천주교·서학)와의 대결에서 모든 신비나 이적이나 예언, 사람을 홀리게 만드는 ‘조화(造化, ‘신비’를 의미함)’를 거부하고 ‘성(誠)·경(敬)·신(信)’이라는 상식적 일상도덕의 가르침을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신비주의자들의 ‘홀림’의 위태로움을 잘 알고 있었고, 이들이 초기 교단을 형성하게 되면 그의 가르침은 그들의 케리그마에 의하여 왜곡되고 타락되고 신비화되리라는 것을 정확히 예견했다(「흥비가」). 모든 대각의 종교운동은 초기 집단을 노리는 사기꾼들에 의하여 왜곡되는 것이다.
또한 수운은 ‘지식의 허구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후계자로서 지식이 출중한 인물은 사도 바울과 같이 오히려 케리그마를 조직적으로 형성하여 동학의 진로를 바꿀 우려가 있었다. 그가 한문으로만 저술을 하지 않고 동시에 한글 가사를 지었다는 것도 민중에게 직접 개벽의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사명을 가졌기 때문이다. 다산이 단 한건의 한글 서한이나 시조 한수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 그의 형 약전이 서민을 위한 생활백과인 『자산어보』를 집필하면서도 물고기의 한글 이름 한 글자도 써넣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의 의식구조가 어디까지나 망해가는 조선왕조의 복구(목민牧民)에 머물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운의 문제의식과는 소양지판이었다.
해월은 지식인이 아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좀 어폐가 있다. 해월은 진리의 화신일 뿐, 세속적 학식으로 다져진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다. 한문으로 글을 지을 능력이 부족한 수준의 학식이었다 해도, 그의 관찰력과 통찰력, 이해력은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개념적 사유를 하지 않으나 일상적 언어의 구사는 학식을 소유한 자들이 미칠 수 없는 고경(高境)을 달렸다. 그는 무엇보다도 ‘순박(純樸)’한 인간이었고, 결단(Entscheidung)의 지사였고, 의리의 사나이였고, 고매한 인격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