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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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은 李多恩

숭실대 예술창작학부 4학년. 1995년생.

dob6819@naver.com

 

 

 

돼지의 딸

 

등장인물

유경 : 희자의 딸. 20대.

희자 : 유경의 엄마. 60대.

아이

유령

 

무대

산 끝자락과 닿아 있는 돈사.

한편은 돼지가 사는 사육장이고 다른 한편은 사람들이 사는 숙소이다.

 

 

1장

 

무언가 배웅하듯 무대 뒤쪽을 보고 있는 유경.

 

유경 오늘도 팔려가는구나. 저 돼지새끼들 우는 소리. 울어봤자 얻어맞고, 얻어맞아서 더 울고. 악순환. 그걸 왜 모를까? 돼지고 주인이고 멍청해. 멍청한 것도 하루 이틀 일이지. 지겨워. 이번에는 정말 끝장 볼 거야.

 

유경, 몸을 돌려 중앙으로 걷는다. 반대편에서 쇠갈퀴로 일을 하던 아이가 막아선다.

 

아이 누구세요?

유경 너야말로 누구니? 여긴 우리 집인데.

아이 아니에요. 여긴 ‘유경돈사’인걸요.

유경 내가 그 ‘유경’이야. 우리 집이 돈사지. 여기에 있으면 곧 냄새가 옮을걸. 장난칠 생각 말고 얼른 나가는 게 좋을 거야. 어디 가서 무시당하기 싫으면 말이야.

아이 들어오지 마세요.

유경 (무시하고 다가선다) 가까운 읍내까진 걸어서 두시간이나 걸리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하여간 애들은 뭐든지 할 수 있어서 무서워.

아이 (쇠갈퀴를 들이대며) 더 들어오면 안 돼요.

유경 이거 봐라? 너 그게 얼마나 위험한 줄 알아?

아이 더 위험한 건 그쪽이에요.

유경 내가 왜 위험하니.

아이 돼지들이 병에 걸린단 말이에요. 작년에도 돼지를 얼마나 묻었는지 아세요. 빨리 소독해요.

유경 아, 소독. 까먹었어. 정말로. 내가 오랜만이긴 한가보다. 미안해. (소독실에서 소독하는 시늉) 내가 집에 온 게 6년 만이거든. 대학 다니느라 말이야. 여긴 너무 시골이잖아. 너 산 타봤지. 내리막길 뛰는 건 쉬워도 오르막길 걷는 건 어렵잖아. 한번 시골로 내려가면 서울로 다시 올라오기가 너무 힘들어서 마음을 다잡으려고 안 내려왔거든. 근데 넌 정말 누구니?

아이 이 집 아이요.

유경 이 집 아이는 나라니까. 마지막으로 봤을 때 서로 작정하고 주먹질에 패대기치며 싸우긴 했다만. (사이) 희자는 어딨니?

아이 희자요?

유경 엄마 말이야.

 

희자가 아이 등 뒤 방향에서 걸어 나온다.

 

희자 다신 안 온다더니.

아이 엄마! 모르는 사람이 왔어요.

희자 (아이에게) 인사하렴. 내 딸이란다. (유경에게) 너도 인사해. 내 딸이야.

 

아이, 쇠갈퀴를 내려놓고 희자에게 다가간다. 두 사람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는 유경.

 

유경 야, 미쳤어?

희자 뭐가 문젠데.

유경 어디서 데려온 거야.

희자 내 딸이라니까.

유경 애인이라도 생겼나봐. 그런 줄도 모르고 괜히 왔네.

희자 이 돼지우리에 어떤 남자가 기어들어와. 네 애비처럼 기어나가면 또 몰라.

유경 그럼 뭐야.

희자 축사에 똥 덩어리가 꿈틀거려서 돼지새끼인 줄 알고 씻겼더니 사람새끼더라고.

유경 그래서.

희자 길렀어. 그게 6년째야.

유경 경찰에 신고는.

희자 나쁜 짓도 아니잖아. 애 기르는 거.

유경 나쁜 게 아니라 상식과 도덕과 법에 어긋난 거지.

희자 전에 텔레비전 보니까 법도 잘못됐다고 고치더라.

유경 섬노예 알아, 몰라. 납치 유괴 알아, 몰라. 아동착취 알아, 몰라.

희자 너도 이렇게 자랐잖아.

유경 얘하고 나하고 같아. 남이랑 자식이랑 같냐고.

희자 다르더라.

유경 그래, 다르지!

희자 쟤가 일을 더 잘해.

유경 뭐?

희자 봐. (아이에게) 돼지 밥 줬니.

아이 네.

희자 분변은 치웠니.

아이 케이지에 쌓인 거 긁어다가 수레 채워서 옮겨놨어요.

희자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아이 축사 구석에 거미가 집 지은 건 부지깽이로 다 부숴놨어요. 이따 돼지 이빨하고 꼬리 자를 도구들 미리 챙겨놨고요. 음, 그리고 또…… 아, 저 까먹은 거 있어요. 수놈 정액 채취 준비 아직 못했어요.

희자 그건 내가 하면 돼. 아침밥은 먹었니?

아이 아뇨, 아직요.

유경 밥도 안 먹이고 애한테 일을 시켰어.

아이 일하다보면 남 밥만 챙겨주고 자기 밥그릇은 못 챙기는 거랬어요.

유경 부려먹는 와중에 별걸 다 가르쳤다.

희자 이제부터 먹으면 되지. (유경에게) 너 줄 건 없다.

유경 누가 밥 먹으러 온 줄 알아? 난 이 집 음식 절대 안 먹어. 뜨끈한 음식 냄새 대신 퀴퀴한 돼지 냄새만 나고. 퇴비에서 자란 파리나 꼬이는 밥. 차라리 굶는 게 낫지.

희자 그럼 가서 굶어.

아이 전 가서 밥 차려놓을게요.

 

무대 밖으로 나가는 아이.

 

희자 아주 순하고 순박하고 착해. 어렸을 때 너 보는 것 같다. 정말 귀여웠는데. 그때 기억나니. 일하다가 문득 네가 없어져서 찾으면 꼭 돼지우리에 들어가 있었지. 막 기어다니기 시작할 무렵이었는데 어떻게 거기까지 간 걸까. 네발짐승같이 기어서 그런지 모돈도 널 깔아뭉개지 않고 오히려 젖 빠는 자리를 하나 내줬지. 그 때문에 원래 자기 자리를 뺏긴 새끼 돼지는 평생 살이 안 붙는 찔찔이가 되어버렸어. 평생이라고 해봤자 몇개월도 안 된다만. 그런 어설픈 놈들에게 사료를 주면 손해야, 손해. 손해가 누적되면 다 죽는 거야. 그렇게 돈사에 목매달고 똥 지린 놈들 많아. 그럼 혼자 남은 부인이 남편 시체 내리고 나서 남은 돼지들은 변변찮은 값에 팔고 떠나버리지. 수입 냉동 고기값 반푼도 안 된다. 살아 있는데도 값어치가 죽은 것보다 못해. 나는 내 시체 내려줄 사람 없으니 아주 지독하게 길렀다. 너도, 돼지도.

유경 그래, 아주 고생 많았지.

희자 네가 죽을 때가 되었나. 드디어 철이 들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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