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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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 金愛爛

1980년 인천 출생. 2002년 대산대학문학상을 수상하고 2003년 『창작과비평』에 소설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함. 소설집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가 있음. brokenname@empas.com

 

 

 

장편연재 1

두근두근 내 인생

 

 

프롤로그

 

아버지와 어머니는 열일곱에 나를 가졌다.

올해 나는 열일곱이 되었다.

내가 열여덟이 될지, 열아홉이 될 수 있을지 알 방법은 없다.

그런 건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건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뿐이다.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란다.

그리고 나는 무럭무럭 늙는다.

내겐 누군가의 한시간이 하루와 같고

다른 이의 한달이 일년쯤 된다.

나는 이제 아버지보다 늙어버렸다.

 

아버지는 자기가 여든살이 됐을 때의 얼굴을 내게서 본다.

나는 내가 서른넷이 됐을 때의 얼굴을 아버지에게서 본다.

오지 않은 미래와 겪지 못한 과거가 마주본다.

그리고 서로에게 묻는다.

열일곱은 부모가 되기에 적당한 나이인가 그렇지 않은가.

서른넷은 자식을 잃기에 적당한 나이인가 그렇지 않은가.

 

아버지가 묻는다.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나는 큰 소리로 대꾸한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가 되고 싶어요.

아버지가 묻는다. 더 나은 것이 많은데, 왜 당신이냐고.

나는 수줍어 조그맣게 답한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로 태어나, 다시 나를 낳은 뒤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싶어요.

아버지가 운다.

 

이것은 가장 어린 부모와 가장 늙은 자식의 이야기다.

 

*

 

바람이 불면, 내 속에 낱말카드가 조그맣게 회오리친다. 해풍에 오래 마른 생선처럼, 제 몸의 부피를 줄여가며 바깥의 둘레를 넓힌 말〔言〕들이다. 어릴 적 처음으로 발음한 사물의 이름을 그려본다. 이것은 눈〔雪〕. 저것은 밤〔夜〕. 저쪽에 나무. 밭 밑엔 땅. 당신은 당신…… 소리로 먼저 익히고 철자로 자꾸 베껴쓴 내 주위의 모든 것. 지금도 가끔, 내가 그런 것들의 이름을 안다는 게 놀랍다.

 

어렸을 땐 온종일 말을 줍고 다녔다. 엄마 이건 뭐야? 저건 뭐야? 종알대며 주위를 어지럽혔다. 각각의 이름은 맑고 가벼워 사물에 달싹 붙지 않았다. 나는 어제도 듣고 그제도 배운 것을 처음인 양 물어댔다. 손가락을 들어 무언가 가리키면, 식구들의 입에서 낯선 소리를 가진 활자가 툭툭 떨어졌다. 바람에 풍경(風磬)이 흔들리듯 내가 물어 무언가 움직이는 거였다. 그래서 나는 ‘이건 뭐야?’라는 말이 좋았다. 그들이 일러주는 사물의 이름보다 좋았다.

 

비는 비. 낮은 낮. 여름은 여름. 살면서 많은 말을 배웠다. 자주 쓰는 말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었다. 지상에 뿌리내린 것이 있고 식물의 종자처럼 가볍게 퍼져가는 말이 있었다. 여름을 여름이라 할 때, 나는 그것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럴 수 있다 믿어 자꾸 물었다. 땅이라니, 나무라니, 게다가 당신이라니…… 입속 바람을 따라 겹치고 흔들리는 이것. 저것. 그것. 내가 ‘그것’하고 발음하면 ‘그것……’하고 퍼지는 동심원의 넓이. 가끔은 그게 내 세계의 크기처럼 느껴졌다.

 

이제 나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말은 거의 다 안다. 중요한 건 그 말이 몸피를 줄여가며 만든 바깥의 넓이를 가늠하는 일일 것이다. 바람이라 칭할 때, 네개의 방위가 아닌 천개의 풍향을 상상하는 것. 배신이라 말할 때, 지는 해를 따라 길어지는 십자가의 그림자를 쫓아가보는 것. 당신이라 부를 때, 눈 덮인 크레바스처럼 깊이를 은닉한 평평함을 헤아려보는 것. 그러나 그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일 것이다. 바람은 자꾸 불고, 태어난 이래 나는 한번도 젊은 적이 없었으니까. 말들 역시 마찬가지일 테니까.

 

내가 세상과 최초로 말을 섞은 곳은 물 맑고 나무 많은 시골마을이었다. 강줄기가 여러개로 나뉘고, 휘돌아, 다시 감기는 그곳에서 나는 내 이름을 배우고 걸음마를 떼었다. 옹알이에서 단순한 문장을 만들 때까지 3년. 부모님이 외가에 신세를 진 기간만큼이다. 피부가 약한 아기였으니 대부분 그늘에서였을 거다. 필요한 건 대부분 직접 기르거나 만들어 쓰는 집안이었으니 생활과 가깝고 선명한 말들이었을 거다. 만날 티브이만 보고 자란 내 사촌은 태어나 처음 한 말이 ‘엘지(LG)’였다는데…… 나는 말이 더뎌 한동안 부모 속을 태웠다. 어머니는 내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근심하며 친척 언니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아버지는 애들은 말 못할 때가 가장 예쁜 거라며 묵묵히 일터에 나갔다. 인근에 들어선다는 대호(大湖)관광단지가 막 부지를 다지고 있었고, 아버지도 거기서 막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셈 밝은 외할아버지는 타지에서 밀려올 노동자를 위해 텃밭 앞에 일자형 건물을 지었다. 콘크리트 벽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외풍 심한 집이었다. 그 안에는 모두 네 가구가 들어갈 수 있었다. 그중 하나가 우리 가족의 방이었다. 아직 애티를 벗지 못한 십대 부부와 갓난아기 이렇게 세 식구였다. 부엌도 시원찮은데다 세 사람이 지내기에 터무니없이 좁은 방이었지만, 월세도 생활비도 내지 않는 터라 찍소리 않고 얌전히 지냈다. 아무 때고 크게 울던 나만 빼고, 조용조용, 모두 그랬다 한다.

 

외할머니는 슬하에 자식을 많이 두셨다. 아들 다섯에 딸 하나 도합 여섯명이다. 언젠가 ‘엄마,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랑 평생 사이가 안 좋았다면서 왜 그렇게 자식이 많아?’ 물은 적이 있다. 어머니는 ‘어…… 그게 가끔, 정말 가뭄에 콩 나듯 할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덜컥덜컥 애가 들어섰다더라’고 민망해하며 답해주었다. 우리 어머니는 그중 여섯째로 어릴 때 별명이 ‘시발공주’였다고 한다. 입이 건 사내들 틈에서 나고 자라, 예쁜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툭하면 상말을 내뱉었던 까닭이다. 조그마한 계집아이가 동네 곳곳을 누비며 깜찍하게 욕을 하고 다녔을 상상을 하면 지금도 친근하니 만만한 기분이 든다. 여전히 드센 성격이 남아 있긴 하지만. 어머니의 말씨가 풀 죽은 듯 순해진 건 세상이 ‘시발’로만 해결되는 게 아니란 걸 깨달은 순간부터인 듯하다. 일찌감치 애를 배어 퇴학을 당했을 때라든가, 우리 아빠가 다섯명의 외삼촌들에게 맞아죽을 뻔했을 때, 빚을 이고 몇번이나 이삿짐을 싸야 했을 때와 같은 경우 말이다. 사실 외할아버지는 처음부터 사위를 마음에 안 들어했다. 가장 큰 이유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의 새끼’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진짜 새끼’를 안고 들어왔다는 거였다. 두번째 이유는 가장인 주제에 생활력이 없다는 건데, 열일곱 학생에게 돈 벌 능력이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두 남자가 처음 만났을 때, 외할아버지는 다짜고짜 퉁명스레 물었다.

“그래, 너는 뭘 잘하니?”

어머니의 임신으로 말미암아 집안에 몰아닥친 온갖 울음과 실랑이의 폭풍우가 한바탕 지나간 후였다. 아버지는 무릎 꿇은 자세로 어쩔 줄 몰라하며 말했다.

“아버님, 저는 태권도를 잘합니다.”

외할아버지는 못마땅한 듯 끙 소리를 냈다. 아버지가 태권도 특기생으로 도에서 제일 큰 체육고등학교에 들어간 건 사실이지만, 그런 재주는 살아가는 데 별 쓸모가 없었다. 아버지는 그것도 모르고 외할아버지의 침묵이 초조해 이렇게 말했다.

“보여드릴까요?”

주먹을 불끈 쥔 게 누가 보면 장인을 때리려 한다고 오해할 만한 풍경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움찔하여 더욱 권위적으로 말했다.

“네 주먹에서는 쌀이 나오나보지?”

“그게, 졸업하면 작은 도장에라도……”

졸업할 가망이 없는 걸 알면서도 아버지는 덧붙였다.

“그리고 또 뭘 잘하나?”

아버지의 머리 위로 여러가지 생각이 지나갔다.

‘나는 <스트리트파이터>를 잘하는데……’

하지만 그런 걸 입 밖에 냈다간 장인에게 귀싸대기를 맞을지도 몰랐다.

‘나는 선생한테 대드는 걸 잘하는데……’

그렇지만 그것도 장인이 바라는 정답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그럼, 정말 나는 뭘 잘하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버님.”

자기를 빤히 노려보는 장인 앞에서 아버지는 결국 그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나는 포기를 잘하는구나!’

 

사위가 물러간 자리에서, 외할아버지는 혀를 차며 빈정댔다.

“잘하는 거라곤 일찍부터 새끼 치는 거밖에 없는 놈이더구나.”

나이 들어 지아비 어려운 줄 모르게 된 외할머니가 조그맣게 구시렁거렸다.

“그것도 재주는 재주지요.”

어머니는 깻잎머리를 한 채 아무 말도 않고 새치름히 앉아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딸의 행실보다 안목에 실망한 듯 먼 데를 보며 탄식했다.

“남자가 돈이 없으면 허세라도 있어야지. 이건 뭐 너무 숙맥 같아서……”

하지만 그건 외할아버지가 우리 아버지를 단단히 잘못 본 거였다. 아버지는 숙맥이 맞았지만 무모하고 모험심 강한 숙맥, 말하자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숙맥이었다. 그러니까 결혼식 날 주례하고 멱살 잡고 싸우고, 친구들과 노느라 자기 아내를 ‘질마재 신화’의 신부처럼 내버려뒀을 거다. 그러니까 친구 말만 믿고 여러 일에 손댔다 실패한 뒤, ‘우리 집 가훈’이란 숙제를 들고 온 내게 태연히 ‘붕우유신(朋友有信)’이라 일러줬을 거다. 벗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아버지가 표구까지 해 걸어놓은 문구였다. 친구들과 서울로 월드컵 경기를 보러 갔다가, 시청역 근처 글씨 쓰는 노인에게서 만들어온 거였다. 나는 가훈 전시회 때 교내에 ‘붕우유신’이 다섯개나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는데, 그게 다 아버지 친구들 거였다. 일찍부터 운동을 같이 해온 사내들의 우정이란 실로 엄청나게 끈끈한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종종 액자 속 네 글자를 두 자로 줄여 범박하게 빈정거렸다. ‘부자유친(父子有親)’을 ‘부자(富者) 친구와는 반드시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뜻쯤으로 알고 있는 여자의 반응으론 당연한 거였다.

 

외할아버지는 사위에게 학업을 마저 마치라고 했다. 체고는 잘릴 것이 빤하니 근처 어디 정원 미달의 고등학교에라도 들어가 졸업장을 따라는 거였다. 교장한테는 자기가 잘 말해보겠다고. 하지만 소문 빠른 동네에서 아버지를 받아주는 학교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 학생을 허락했다가는 학교의 기강과 품위가 흐려진다는 거였다. 배운 것 없어도 나름 동네유지라 자부해온 외할아버지의 긍지는 순식간에 무너져버렸다. 외할아버지는 할 수 없이 사위를 건설현장에 밀어넣었다. 남자는 모름지기 출근을 해야 한다면서. 틈틈이 검정고시를 준비하라는 훈수도 잊지 않았다.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아버지는 장인의 뜻에 따라 처가살이를 했다. 지방자치가 활성화됨에 따라 군에서는 ‘놀기 좋은 도시, 대호’라는 구호 아래, 전 고장의 유원지화를 꾀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사업의 하나가 물길을 크게 터 배를 타고 유람할 수 있는 천연놀이공원 같은 걸 만드는 거였다. 장기적으론 부모님의 고향을 포함한 몇개의 리(里)가 없어질 예정이었다. 아버지는 옆방 뜨내기 사내들과 함께 공사장에 나갔다. 그러고는 공사판에서 ‘한서방’이라 불리며 놀림과 귀염을 한몸에 받았다. ‘그걸’한 서방이라는 게 아니라 실제 성이 한가여서였다. 공사장 인부들은 아버지의 어깨를 툭툭 치며 ‘괜찮어, 괜찮어, 이 고장선 장가가면 다 으른이여’ 다독였고 ‘최가네는 공짜로 사위 생겼네’하며 낄낄거렸다. 아버지는 처음에 공사일에 만족했다. 구성지고 펄떡이는 아저씨들의 입담도 신선했고, 처가에 체면도 서고, 몸 속 끓는 에너지가 해소되는 게 개운해서였다. 운동 같은 거, 만날 매만 맞고 때려치우고 싶었는데 잘됐다 싶기도 했다. 거친 벌판에 나가 어른들과 대등한 일을 하니, 야산에 올라 가슴팍을 풀어헤치며 ‘이것이 진짜 세계다!’ 포효하고픈 심정도 들었다. 열악한 환경과 고된 노동에 지쳐 얼마 안 가 감쪽같이 사라질 긍지였지만 말이다.

 

부모님이 내 존재를 알았을 때, 내 몸은 이미 많이 자란 상태였다. 어머니는 학교 화장실에서 처음 그 사실을 알았다.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슬쩍 빠져나와, 제품 설명서를 몇번이나 읽어본 뒤 확인한 사실이었다. 암기력과 숫자 감각이 약한 어머니는 플라스틱 임신테스트기에 나오는 띠가 한 줄이 맞는지, 두 줄인 게 좋은지 몰라 한참 헷갈려 했다. 임신 여부보다 하나냐 둘이냐는 산수문제에 더 스트레스를 받는 얼굴을 하고서였다. 공부는 못해도 본인이 늘 똑똑하다고 자부해온 어머니는 살짝 충격을 받았다. 평소 생리가 불규칙한 편이라 이번에도 그러려니 했던 거다. 어머니는 꾸물꾸물 한 손으로 팬티를 올린 뒤, 밖에 나와 거울 앞에 섰다. 어머니는 오줌 묻은 손에 비누를 묻혀 꼼꼼하게 씻었다. 그러고는 자기 얼굴을 살펴보다, 이마에 난 여드름을 두 손으로 짰다.

 

아버지는 읍내 커피숍에서 그 소식을 접했다. 주 고객층이 중고등학생인, 시외버스터미널 근처의 한 까페에서였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몇번 미팅을 한 적이 있었다. 미팅에서 만난 농업고등학교의 폭주족이 여고까지 오토바이를 몰고 와, 운동장을 몇번이나 돌고 가는 바람에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그 녀석은 오토바이 앞바퀴를 번쩍 든 채 “최미라! 사랑한다!”를 세번 외친 뒤 거대한 흙먼지를 일으키며 부르릉- 사라졌다. 그 뒤, 전교의 ‘최미라’가 교무실로 불려가 차례로 문책을 당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미팅 코스는 보통 찻집에서 노래방으로 이어지는 게 정석이었다. 남학생들은 어머니의 얼굴에 처음 반하고, 노랫소리에 두번 반했다. 어머니가 볼 때, 농·공고 남자들은 인문계 애들보다 활달하고 돈을 잘 썼다. 하지만 인문계 아이들의 반듯함과 자존감은 그것대로 매력이 있었다. 어머니가 체고생을 만난 것은 아버지가 처음이었다. 부러 약속을 잡고 본 것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에게는 뭐랄까, 앞서 말한 두 학교의 특징을 반반씩 섞어놓은 구석이 있었다. 작은 재능이나마 한번이라도 인정을 받아본 사람의 자긍심. 그리고 그 재능이 ‘운동’이었던 이가 갖고 있는 미묘한 열등감과 순박함이 그것이었다.

 

까페 안은 비교적 한산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둘 다 사복 차림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왜 아까부터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했다. 지난번처럼 또 헤어지자고 하는 건 아닌지 초조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아버지는 아까부터 찻집이 영 불편했다. 여자들이 왜 까페 같은 데를 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최미라’는 부쩍 성숙해져 있었다. 어머니가 레모네이드를 마시며 입술에 침을 바를 때마다, 아버지도 덩달아 마른 입술을 핥아댔다. 잠시 후, 어머니는 결심한 듯 입을 뗐다.

“대수야 이리 와봐.”

“왜?”

“오라면 와봐.”

아버지는 상체를 바싹 기울였다. 어머니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아버지의 귀에 대고 뭐라 뭐라 속삭였다. 귓바퀴를 덮은 솜털이 바싹 서는 게 감미롭고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그걸 왜 인제서 말해?”

까페 안의 사람들이 일제히 아버지를 돌아봤다. 어머니는 신경 쓰지 않고 더 큰 소리로 대응했다.

“왜 화내? 씨이. 나는 세상에서 화내는 사람이 제일 싫어.”

최근 적성카드에 취미-타협, 특기-타협이라 적었다 교무실서 호되게 맞은 바 있는 아버지는 이번에도 여자친구에게 급 사과했다.

“어. 미안.”

그리고 두 사람은 17년 된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대책을 강구했다. 하지만 애초에 대책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했다. 주위에선 몇몇 청소년들이 거만하고 자족적인 표정으로 줄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아버지는 밀크셰이크가 담긴 길쭉한 유리잔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깔고 주절댔다.

“미라야, 나는……”

그러고는 뜬금없이 자신이 얼마나 모자란 사람인가 하는 얘기를 줄줄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자기는 절대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없다는 둥, 너무 가난하다는 둥, 사람들을 실망시킬까봐 두렵다는 둥, 생각해보니 집안에 암 병력도 있는 것 같다는 둥 논리도 두서도 없는 말이었다. 어머니는 잠자코 아버지의 말을 경청했다. 그러고는 마침내 입을 열어 부드럽게 대꾸했다.

“대수야.”

“응?”

“새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새똥으로 위장하는 곤충이 있대.”

“근데?”

“그게 꼭 너 같다.”

 

마을의 경기는 비싼 영양제를 맞은 환자처럼 일시적인 활기를 띠고 있었다. 답답하리만치 조용하던 시골 마을엔 굴삭기와 사다리차, 레미콘 트럭 따위가 흙먼지를 날리며 쉴새없이 드나들었다. 그 즈음, 어머니가 다니는 학교에서 각 반에 학용품 쎄트를 돌렸다. 비닐봉투에 든 문구쎄트로, 전교생에게 공짜로 나눠준 거였다. 볼펜이며 수정액, 색색의 포스트잇과 샤프심의 몸통에는 H건설업체의 로고가 산뜻하게 새겨져 있었다. 부모님의 고향을 중심으로 관광단지가 영향을 끼칠 만한 모든 학교에 배포된 모양이었다. 마을 어른들에게도 세제며 주방용품 따위가 전달됐다. 하지만 세상 모든 공짜가 그렇듯 그 거래에는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어느날 청소시간, 한 아이가 와 물었다.

“미라야 무슨 일 있니?”

이름은 한수미로 반장에다 공부까지 잘하는 친구였다.

“왜? 표 나?”

“응. 야자시간에 통 안 떠들길래. 나 사실 그것 땜에 좀 힘들었거든.”

어머니가 비질을 하다 말고 말했다.

“이런 솔직한 년.”

“이름 적기도 뭣하고 안 적기도 난처하다고.”

“수미야.”

“응?”

“이래서 너랑 나랑 안되는 거야.”

“뭐가?”

“담임을 버려. 너 담임이 너랑 끝까지 갈 것 같아? 남는 건 친구라고.”

한수미(지금은 아줌마지만 그냥 한수미로 부르겠다)가 얕은 조끼 주머니에 양 손을 집어넣으며 은근하게 말했다.

“야, 담임은 버리는 게 아니야.”

“그럼?”

“담임은 활용하는 거야.”

어머니가 주춤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이런 무서운 년.”

한수미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래서 고민이 뭔데?”

“됐어. 비밀이야.”

“나한테도?”

“그래, 이년아.”

“야, 나는 너한테 고민 다 얘기하잖아.”

“1등 하다 3등 해서 서럽다는 게 무슨 큰 비밀이냐?”

한수미가 정색하며 외쳤다.

“야, 네가 3등의 고독을 알아?”

어머니는 예의 비꼬는 말을 할 때, 그 특유의 부드러운 음성으로 답했다.

“수미야.”

“응?”

“꺼져.”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두 사람은 아버지의 어떤 벗들보다 ‘붕우유신’하는 사이였다. 초중고를 같이 다녔을 뿐 아니라, 도시락도 함께 먹고 미팅도 자주 나가는 단짝이었다. 사실 첫 경험 후 어머니는 한수미에게 속내를 털어놓으려 했었다. 하룻밤 새, 발끝이 1쎈티쯤 뜬 게 아무래도 비현실적인 기분이 들어서였다. 어머니는 교실 맨 뒷자리에 앉아, 책상머리에 고개를 박은 채 문제집을 풀고 있는 아이들을 굽어보며 생각했다.

‘쟤들은 내가 남자랑 잤다는 걸 알까?’

물에 뜬 물감처럼 죄책감과 우월감이 엉기고 섞여 이상한 무늬를 만들어낼 즈음의 일이었다. 며칠 뒤, 어머니는 쓰레기장 앞으로 한수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