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시평

 

두번 실종된 손창섭

 

정철훈 鄭喆熏

시인, 소설가. 국민일보 문학전문기자. 시집 『개 같은 신념』 『살고 싶은 아침』, 장편소설 『카인의 정원』 『인간의 악보』 등이 있음. chjung@kmib.co.kr

 

 

전후(戰後) 최고의 문제작가로 평가받는 손창섭(孫昌涉, 1922~ )이 일본에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은 올해 2월 중순이었다. 1973년 12월, 아내의 나라 일본으로 건너갔으니 도일(渡日) 36년 만이요, 국내 한 신문에 연재한 소설을 끝으로 사실상 절필에 들어간 지 31년 만의 일이다. 오늘날 손창섭 문학에 대한 열기는 어느정도 식었지만 그래도 그의 소설이 지닌 매력은 전후 총체적 임시수용소적 체제를 배경으로 한 병리학적 인간 굴절을 어떤 위선도 없이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할 것이다.

손창섭의 도일은 한국 현대문학사상 가장 극적인 증발에 해당된다. 그는 생몰 연대의 한쪽이 늘 비어 있던 미궁의 작가였다. 그렇기에 문단 안팎에 그를 둘러싼 뜬소문이 무성했다. 주일 한국대사관 앞에서 가끔 통곡을 하다 돌아간다느니 동서고금의 명언명구를 베껴 쓴 구도원(求道院)이라는 제목의 전단지를 만들어 나눠준다느니 하는 소문들이었다. 5년 전 국민일보 칼럼‘문학 오디쎄이’에 “손창섭의 생사를 아는 분 누구 없습니까”라고 공개 수소문했지만 어떤 제보도 없었다. 그러다 일본 주소를 확인한 것이 올해 1월말이었다. 한 지인의 연락처 메모가 단초였다. 2월 중순 토오꾜오 히가시꾸루메(東久留米) 시에 도착해 초인종을 눌렀을 때는 모든 게 너무 늦어버렸다. 손창섭은 지난해 9월 급성 폐기종 증세로 노인병원에 입원, 6인 병실에서 혼수상태를 오가며 말을 잃어버린 채 병마와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도일 은둔의 진실

 

손창섭이 왜 도일했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조금씩 달랐다. 혹자는 그가 창작활동에 너무 지쳐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로지 원고료 수입에 의지해 생활했는데, 고료가 넉넉지 않아 힘들어했다는 것이다. 혹자는 유신체제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김신조 사건 이후에 그가 발표한 소설이 「청사에 빛나리」예요. 계백장군이 가족을 몰살하는 장면이 나오죠. 1967년에 썼다가 68년에 발표한 「환관」과 김신조 사건 후에 쓰기 시작한 「청사에 빛나리」는 기조가 다른 작품임을 알 수 있어요. 그의 도일에는 당시 국내 정치상황에 대한 회의나 반감 같은 게 작용했을 겁니다. 그런 이유 없이 도일했다는 건 동기가 약하지요. 「청사에 빛나리」에서 손창섭의 작품이 달라집니다. 등장인물도 너무 근사하고 묘사도 근엄해지지요. 계백장군의 24시간 동안의 기록인데, 자 축 인 묘… 등 12지간의 시로 나눈 고전 비극 같은 작품이지요. 말하자면 소설가로서는 전향각서 같은 작품을 내놓은 것인데, 작품을 꼼꼼히 읽어보면 알 수 있어요. 도일의 열쇠는 「청사에 빛나리」에 있을 겁니다. 백제가 망하는 과정을 보면 박정희정권 당시의 정체성과 김신조 사건과의 연관성이 있을 겁니다.”(2009년 2월 3일 문학평론가 유종호 인터뷰)

 

손창섭의 일본행은 자신의 말이 없어 그 이유를 헤아릴 길이 없다. 다만 필자가 일본에서 만난 부인 우에노 치즈꼬(上野千鶴子) 여사에 따르면 그의 도일은 유종호(柳宗鎬)가 지적한 것과 달리 시국의 불안이라든가 정치적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이나 반감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내가 일본에 나가 살 결심을 하자 손선생은 나를 따라 건너왔을 뿐, 어떤 이념이나 정치적 이유는 없어요. 한국에 친척도 혈육도 없는걸요. 욕심이 없는 분이지요.”

우에노 여사의 대답은 너무 명료해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한국 정치상황에 대한 환멸 같은 게 작용했다면 먼저 일본으로 간 부인의 인보증으로 영주권을 받아내기까지 2년 동안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평양시절 제자의 과수원에서 신세를 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치적 도피가 이유라면 취업비자 혹은 여행비자로 얼마든지 떠날 수도 있었을 터다. 하지만 그는 일본 영주권을 기다리며 구리에 은거했다.

철저한 냉소와 인간 경멸의 상념이 녹아 있는 초기작에 비해 김신조 사건 이후에 발표한 「청사에 빛나리」는 작풍이 다른 게 사실이다. 유종호는 “이 작품에서 손창섭은 계백이라는 역사적 인물에 새로운 해석을 가하고 있다”며 “세습권력의 정당화에 봉사한 봉건적·왕조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미화되어온 황산벌의 결사대장은 아내 보미(寶美)부인의 입을 통해 오히려 졸장부로 드러난다”고 지적했다.

 

“이 썩어 문드러진 백제가 깨끗이 망해버리고 언젠가 새로운 백제가 탄생할지도 모르는 일이오. 한편 신라와 고구려가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삼국이 통일이 되는 날도 있을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것들이 자라서 신생 백제의 충신이나 삼국통일의 공신이 될지 뉘 압니까. 장군, 이 나라 이 백성들이 이 지경에 이르도록 내버려둔 사람들이 누구시오? 장군도 그중의 한분, 일찍이 나라를 건질 선책엔 목숨을 걸려 않으시고 망국의 위기에 맞닥뜨려서야 무고한 장정과 가족까지 희생시켜서 청사에 이름을 남기려 하시니 그러고도 떳떳하시오.”(「청사에 빛나리」 부분)

 

작품의 기조가 과거의 냉소 일변도에서 벗어나 무력으로써 국가를 건질 방책, 즉 군사적 측면만 강조하는 계백의 어리석음을 비판하고 있지만 그걸로 김신조 사건과 그의 도일을 연관짓기는 어색하다.

보기에 따라서 보미부인의 내면에 손창섭에게 밀어닥친 김신조 사건 이후 시대인식의 변화가 함축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무장공비의 타격을 받은 청와대의 위급과 맞물려 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직언을 해야 하는 신하됨의 도리가 계백의 처지로 되어 모서리로 내몰리는 상황을 소설을 통해 연상할 수 없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그걸 도일의 직접 원인으로 보기엔 무리가 따른다.

손창섭은 「잉여인간」(1958) 「신의 희작」(1961) 등의 문제작을 통해 전쟁으로 훼손된 현실과 개인사적 절망이 뒤엉킨 허무의 늪에서 어느정도 빠져나온 뒤 「청사에 빛나리」로 내부에 쌓여 있던 찌꺼기까지 토해버림으로써 자신의 삶을 틀어쥐고 있던 절망과 허무에서 풀려났던 것은 아닐까. 어떤 경계에 다다른 자는 서성거림없이 체제를 관통해버리기 마련인 것이다. 작가라면 의당 유신체제를 비판했을망정 그의 도일은 이미 유신 이전에 결심한 삶의 행위였던 것은 아닐까. 오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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