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뒤로 가는 소설들

 

 

심진경

문학평론가. 저서로 『여성, 문학을 가로지르다』 『한국문학과 섹슈얼리티』 등이 있음. sexology@hanmail.net

 

 

1. 프리모던인가 포스트모던인가

 

소설이 달라졌다고 한다. 둘러보니 그런 듯도 하다. ‘소설’이라는 레떼르가 붙지 않았다면 과연 이게 소설일까 싶은 작품들이 나오고 있다. 교과서에서는 인물·사건·배경을 소설의 3요소라 가르쳤지만, 지금 소설은 인물·사건·배경 없이 관념의 조각과 단상만 떠다녀도 자기가 소설이라고 우긴다. 거꾸로 인물·사건·배경 모두를 갖추었지만 소설 같지 않은 소설도 있다. 그리고 통념상 소설이라기보다 에쎄이나 꽁뜨, 재담(才談), 일기 등에 더 가까운 작품들이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나오고 있다. 그밖에도 흥미를 돋우는 온갖 잡다한 요소를 끌어들여, 읽을 때는 재미있을지 몰라도 다 읽고 나면 의외로 아무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소설도 부지기수다. 바야흐로 이런 식으로, 의미가 있건 없건 세간의 수다(數多)한 장르는 모두 소설로 향하고 있다. 아니, 소설은 모든 장르를 제 영역으로 끌어당기고 있다. 소설이 지금 위기라는데, 오히려 소설은 이처럼 자신의 영토를 더욱 넓혀나가고 소설과 소설 아닌 것의 경계를 허물면서 다채로운 모습으로 변신하고 있다.

그런데 돌아보면 이런 현상이 비단 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소설은 애초 다양한 (비)문학적 잡동사니들, 예컨대 편지·일기·고백록·법조문·정치팸플릿 등의 수사학과 형식을 모방하고 조롱하거나 뒤섞고 교차시키면서 스스로를 단일한 형식이나 내용에 귀속되지 않는 유연하고 유동적인 장르로 만들어왔다. 다른 문학장르와 달리 유독 소설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래서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근대를 대표하는 장르가 될 수 있었던 연원도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러니 소설이야말로 이 세계의 본성과 가장 흡사한, 그리하여 현실의 변화를 더욱 깊이있고 민감하게 반영할 수 있는 장르였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지금 다른 장르들과 몸을 섞으면서 소설과 소설 아닌 것의 경계를 흐려버리는 소위 ‘새로운’ 소설의 등장은 사실 그렇게 낯설거나 새로운 현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소설은 원래 ‘무규칙 이종’ 장르가 아니었던가. 즉 끊임없이 경계를 허물고 이동하고 뒤섞는 혼종성과 비규범성이야말로 오히려 소설장르의 독특한 성격으로 작용해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즈음 소설이 보여주는 변화의 이면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넘겨버릴 수만은 없는, 그와는 차원이 다른 무언가 중요한 문제가 존재한다. 그런 맥락에서 “현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최근 발간한 소설집에 ‘자정의 픽션’이라는 다소 감당하기 힘들어 보이는 제목을 붙인 박형서(朴馨瑞)의 얘기에 우선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자정’이란 카라따니 코오진이 그리워하는 ‘요란했던 근대’ 이후의 시간이다. 동시에 서사문학이라는 대가족 안에서 소설이 태동하던, 태아처럼 웅크린 채 자신의 미래에 대해 홀로 자문해보던 근대 이전의 저 먼 ‘새벽’을 의미하기도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정’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얕은 꿈을 꾸거나 혹은 잠을 이루지 못해 고단하게 중얼거리는 시간이다. 어느 쪽이든, 아침은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고 믿는다.1

 

문제는 두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박형서 자신을 포함한 지금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새로운 소설의 시대를 열게 될 것이라는 예측, 다른 하나는 그들이 지향하는 미래의 소설이 근대 이전의 유사소설과 근친적 관계라는 암시이다. 어쩌면 소설의 위기와 종언을 운운하는 바로 이때야말로 새로운 소설의 아침을 열 수 있는 시간이리라는 믿음은 그럴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 새로운 소설이 (근대)소설로 태동하기 이전의 다양한 허구물의 모양새를 닮았을 것이라는 주장은 쉽게 수긍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소설의 새로운 미래를 과거에서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은 비단 박형서만의 것이 아니다. 새로움의 근거를 근대 이전의 먼 과거에서 구하는 현상은 지금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서 의외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일례로 ‘새로운 소설’의 대표주자로 각광받는 김애란(金愛爛)과 한유주(韓裕周) 소설의 화자를 “근대적 서술자보다는 구술 연행적인 존재들에 가까운 이야기꾼과 음유시인”2으로 각각 규정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최근의 논의도 거기에 힘을 보태는 듯하다. 지금 일부 젊은 소설가와 비평가 들은 의식적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미래의 소설의 근거를 소설의 과거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들은 목하, 뒤로 가는 중이다.

여기서 우리가 따져보아야 하는 것은 왜 하필 소설의 새로운 변화가 과거의 양식과 공모하게 되는가이다. 문제는 지금 젊은 작가들의 소설이 얼마나 새로운지, 또 왜 새로운지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소설과 소설 아닌 것의 경계를 허물며 변태해가는 지금의 젊은 소설이 새로운 소설의 가능성으로 이어질지, 아니면 소설을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릴지 묻는 일이다. 소설이 과거로 역행하는 현상은 이 지점에서 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다시 말하자면, 왜 지금 그들에게 ‘새로운’ 소설은 ‘포스트모던 노블’(post-modern novel)이 아닌 ‘프리모던 스토리’(pre-modern story)여야 하는가?

 

 

2. 과거로, 탐색 없는 폐쇄적 탐색담

 

먼저 한유주가 있다.3 한유주의 등단작 「달로」는 ‘달로 간 사람의 이야기’이다. 창작집의 제목이기도 한 ‘달로’는 한유주 소설의 어떤 지향성을 나타내는데, 그런 점에서 ‘달로’라는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왜 달일까? 「달로」에서 달은 “사람들을 매혹시킨 가장 오래된 이야기”이자 “기억나지 않는 최초의 순간들”(26면)을 상징한다. ‘달로’라는 표현은 바로 이 태초의 말씀의 순간, 그 음성들, 옛날이야기로 돌아가려는 화자-작가의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소설에 따르면 세계의 모든 이야기는 이미 어디선가 들은 “지겨운 이야기들”(13면)이며, 인류의 역사는 “구부정한 나선”(15면)의 궤적을 그리며 최초의 순간들을 지루하게 반복할 뿐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슬픈 일들이 무수히 일어”(30면)나는 이 세계를 떠나 ‘달로’, 즉 “먼 옛날의 이야기”가 숨어들어간 세계의 뒷면을 향해 여행을 떠난다. 「달로」가 타락한 비극적 현재를 지우고 기원을 찾아 떠나는 서사시적 탐색담을 연상케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달로, 달로, 먼 옛날이야기로, 어느 왕들의 무덤은 무수한 바위를 깎아 만들어졌고, 그 안에는 끝이 없는 미로와 바닥이 없는 함정이 있다는, ……그런, 비정한 고대의 시간처럼, 달의 뒷면에는 어느 바다가 있고, 그곳에 발을 담그기 위해서는 비정한 긴긴 시간을 거꾸로 헤엄쳐서, ……, 그는 몸을 세워 일으켰고, 장대를 손에 쥐었다. (…) 그의 장대는 몽상을 걷고, 백일몽을 걷고, 환영을 걷고, 기억나지 않는 꿈들과 희미한 이야기들을 걷고, ……, 허공을 한 아름 휘돌다가, 땅으로 떨어진다.(28면)

 

소설에서 화자가 “비정한 긴긴 시간을 거꾸로 헤엄”치기, 즉 시간 거스르기를 통해 도달하는 곳은 “어느 악사의 하프가, 옛 영웅의 커다란 칼이, 반인반수의 등줄기가”(「죽음의 푸가」, 56면) 존재하는 신화와 전설의 세계다. 그러나 신화와 전설은 이미 그 빛을 잃었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별들의 움직임을 읽으면서 길을 찾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신들의 땅에서

  1. 박형서「작가의 말」,『 자정의 픽션』, 문학과지성사 2006, 281면.
  2. 허윤진「소노그램 아카이브 시리얼 넘버 6002」,『 세계의 문학』2006년 겨울호, 67면.
  3. 이 글에서 다루는 소설은 다음과 같다. 한유주『달로』, 문학과지성사 2006; 박형서『자정의 픽션』; 이기호『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문학동네 2006. 작품을 인용할 때는 본문에 면수를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