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디지털 성폭력, 분노를 넘어 분기점으로
김소라 金昭摞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소장. 저서 『모두를 위한 성평등 공부』(공저)가 있음.
stellatis@gmail.com
1. 누구를 향한, 어떤 분노인가
지난해 11월, 한겨레의 연속 기획보도로 해킹과 경찰 사칭, 아르바이트 제의 등으로 개인정보를 알아내고, 신상을 유포하겠다는 협박으로 성착취물의 촬영을 강요하며, 텔레그램을 통해 이를 유포해 수익을 얻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이 알려졌다. 그로부터 약 4개월이 지난 올해 3월 17일, 경찰은 성착취물을 제작·유통하는 텔레그램 대화방을 운영한 혐의로 조주빈을 검거했다. 이와 함께 100여개에 이르는 대화방 참여자를 단순 합산하면 약 26만명에 달하며, 조주빈이 운영한 대화방에 참여한 닉네임이 중복을 제외하고도 약 1만 5천개에 이른다는 사실 또한 보도되었다.1 뒤이어 피해자 유인 광고에서부터 개인정보 조회, 성착취물 제작, 대화방 홍보와 관리, 회원모집, 가상화폐 환전과 인출에 이르기까지 체계화된 범행 방식, 수많은 이들이 70~150만원이라는 고액을 지불하고 적극적으로 성착취 행위에 가담한 것으로 보이는 정황 등이 속속들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전사회적으로 분노가 폭발했다. ‘텔레그램 n번방 용의자의 신상을 공개하고 포토라인에 세워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나흘 만에 200만명이 넘는 이들이 동의했다. ‘n번방 가입자 전원의 신상을 공개하라’ ‘운영자와 회원 모두 처벌하라’는 청원도 각각 20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었다. 이같은 시민들의 거대한 분노 앞에 수사기관과 사법기관, 정부와 국회 모두 대책을 쏟아냈다. 경찰과 검찰은 앞다퉈 특별수사 태스크포스를 만들고, 성착취물 제작·유포·소지의 처벌 강화를 위한 수사 기준과 사건처리 기준을 마련했다. 대법원 양형위원회 또한 디지털 성범죄 사건에 대해 기존 판결보다 높은 양형 기준 설정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정부와 국회 역시 처벌 대상 행위의 확대, 법정형 상향을 통한 처벌 강화, 아동·청소년 피해자에 대한 보호 강화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대책을 잇달아 내놓았다.2
여성들이 디지털 성폭력 근절과 피해자 보호를 위해 오랫동안 요구해온 법적·제도적 보완책들이 시민들의 분노에 힘입어 짧은 시간 동안 숨 가쁘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과 함께 현실에 뒤처진 수사 관행, 피해자의 목소리보다 가해자의 변명에 귀 기울여온 사법 시스템, 제작-유포-참여-소비로 이어지는 성착취의 연속적 성격을 포착하지 못하는 정책적 한계 등이 드러난 데 따른 결과이기도 하다. 성인지적 관점이 부족하다는 시민들의 문제제기 속에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재판을 담당했던 서울중앙지법 오덕식 부장판사가 교체되었고, 법무부는 이례적으로 그간 “미온적 형사처벌과 대응으로 피해자들의 아픔을 보듬지 못했다”며 반성을 표했다. 여성단체들이 2013년부터 삭제를 시도했으나 법무부의 반대에 막혀 번번이 좌절되었던 ‘성매매 대상 아동·청소년 규정’3도 지난 4월 29일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사라졌다. 정책의 초점 또한 성착취물의 제작과 유포뿐 아니라 구매와 소지, 성착취물을 매개로 한 협박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이처럼 시민들의 분노 속에 법과 정책, 제도가 정비되는 것은 디지털 성폭력이 사회적 신뢰를 무너뜨리는 심각한 범죄행위라는 합의를 마련하고 이를 통해 사법기관의 인식 전환을 이끌어내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의미있는 일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회 전반에 넘실대는 이러한 관심과 분노가 의아하고 낯설기도 하다. 여성의 몸을 남성들의 유희 및 남성 연대의 유지를 위한 도구로 사용해온 역사는 그야말로 유구하기 때문이다. 최근 몇년으로 시야를 한정하더라도 ‘소라넷’ 폐쇄 운동,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이른바 혜화역 시위), 웹하드 카르텔, ‘버닝썬 사태’ 등 수많은 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대한 문제제기 역시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왔다.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은 디지털 기술 발달에 따른 정책의 일시적 공백 상태에서 발생한 신종범죄도, 예측할 수 없는 놀랍고 새로운 사건도 아니다. 따라서 이 사건을 계기로 현재를 진단하기 위해서는 그간 디지털 성폭력의 양상과 기반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우리 사회는 지금, 누구를 향해, 무엇 때문에 분노하는지를 되짚어봐야 한다.
2. 디지털 성폭력과 남성 연대의 변화: 홀로, 그리고 함께4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를 그림, 사진, 영상 등을 이용해 성적 이미지로 고착화하고 대상화한 것은 한국에서도 오래된 현상으로, 멀리는 1920~30년대로, 가깝게는 여성의 몸을 전면화한 영화들이 만들어진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일례로 70년대 후반에는 서울로 상경한 시골 여성이 도시에서 ‘순결’을 잃고 호스티스라 불리는 유흥업소 종업원으로 전전하는 모습을 그린 ‘호스티스 멜로드라마’가,5 80년대에는 전두환정부의 검열 완화와 함께 에로티시즘을 표방하는 ‘성애 영화’가 유행했다. 이후 80년대 내내 가슴 노출, 여성 육체의 파편화, 욕망으로 가득 찬 여성 얼굴의 극단적 클로즈업 등을 통해 여성의 몸을 남성의 시각적 환상을 충족시키기 위한 대상으로 전시한 영화들이 그 어떤 장르보다 많은 관객을 동원했다.6 1990년대에는 국내 제작사들이 제작비를 절감할 수 있는 비디오 산업으로 눈을 돌리면서 ‘에로 비디오’ 산업이 전성기를 맞았고, 이에 따라 소프트코어 포르노그래피7라 부를 수 있는 표현물이 한국사회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90년대 중반까지는 영화 제작사 같은 산업, 영화관이나 비디오 대여점 같은 유통업자, 그리고 소비자 간의 경계가 분명한 편이었다. 대부분의 사진, 소설, 영화, 비디오 등은 이윤 획득을 목적으로 상업적으로 생산되었고, 유통 단계를 거쳐서야 소비자의 손에 들어갈 수 있었다. 많은 성적 표현이 여성 몸의 파편화 및 이에 대한 관음증적 시선을 그 특징으로 했으나, 여성 일반을 직접적 착취의 대상으로 삼지는 않았고, 디지털 성폭력의 가능성도 본격적으로 가시화되지 않았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인터넷의 보급은 성적 표현이 생산·유통·소비되는 방식과 디지털 성폭력의 양상을 총체적으로 변화시켰다. 무제한 복사와 대용량 파일 유포가 가능한 인터넷의 보급, 캠코더와 디지털카메라 같은 휴대용 촬영기기의 확산으로 누구든 실제 성행위를 촬영·유포·소비할 수 있게 됨에 따라 디지털 성폭력은 거대한 물질적 기반을 갖게 되었다. 사실 이같은 기술적 변화가 디지털 성폭력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성 몸의 대상화, 여성의 성행위에 대한 관음증적 욕망, 성기 중심적 쾌락 등 기존의 남성 중심적 욕망이 용인되면서, 점차 실제가 아닌 허구적 성행위의 반복적 재현은 지루한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개인이 촬영물의 생산자인 동시에 유통업자와 소비자가 되었고, 이 과정에서 불법촬영과 그 유포 및 소비가 쉽게 이루어짐으로써 디지털 성폭력의 발생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 가운데 불법촬영물은 밀폐된 공간에서 ‘홀로’ 소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쌍방향적 매체인 인터넷에서 익명성에 기반해 불법촬영물의 공유·감상·비평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함께’ 소비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났다. 1990년대 후반 발생한 여성 연예인의 불법촬영물 유출과 그것의 광범위한 유통, 1999년 운영되기 시작한 ‘소라넷’은 이같은 디지털 성폭력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남성들은 여성을 불법촬영한 이미지와 동영상을 온라인으로 공유하고, 칭찬과 부러움, 평가와 같은 다른 남성들의 반응을 즐기는 가운데 쾌락을 획득했다. 이와 함께 성별화된 섹슈얼리티가 재생산되었다. 불법촬영을 통해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