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봉곤 金蓬坤

1985년 경남 진해 출생. 201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부문으로 등단. writeroom@naver.com

 

 

 

라스트 러브 송

 

 

형이랑 자는 꿈을 꿨어요.

내가 그 문자를 보낸 오후엔 비가 내렸고, 긴소매를 입기에 조금은 더운 계절의 끝이자 초입 무렵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쑥색 장우산을 집어들었고, 지하철을 타기 위해 비탈진 마을길을 걸어 내려가다 코너를 돌았을 때 문득, 트럭에 실린 포도들로부터 믿을 수 없을 만큼 달콤한 냄새가 날아들었다. 내게 이렇다 할 공감각 능력은 없었지만 포도의 색깔만큼 짙은 향기네, 느껴질 만큼. 밤이야? 착각할 만큼 강렬한.

우산에 내려앉는 빗소리, 고인 열기, 물웅덩이, 반사되다 일그러지는 낮 하늘. 나는 문득 밤을 보았지만, 다시 코너를 돌았을 땐 쪼다 같은 문자를 보냈다는 사실에 심장이 뛰었고, 같은 박자로 얼굴까지 화끈거렸다. 돌았나봐, 이제 와서 어쩌자고, 오늘 이상하게 덥지, 후회할 줄 알았으면 안 보냈을 거니? 양말은 괜찮겠어? 문자를 보내버렸다는 기억을 지우기 위해 제일 먼저 문자를 지웠고, 쓸데없는 말을 끊임없이 지어내 내게 던졌다. 열차가 승강장으로 들어오기 이분 전이었다. 나는 플랫폼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

나는 이제 달리는 사이의 풍경을 떠올려보려 한다. 무엇이 보여?

다 합쳐 삼만원쯤 될까, 겨우 종아리 높이의 좌판에 코팅된 네잎클로버—군데군데 노랗게 시든—를 늘어놓고 개당 천원에 파는 여자, 부서진 액정화면 위를 위태롭게 스크롤하는 손가락, 올해는 브림리스 볼캡이 유행인가? 환풍구 아래 물미를 바닥에 찧어 빗물을 털어내는 남자. 그런 것들이 보이고 그때의 내가 형의 모습을 어떻게 그렸는지는 전혀 떠오르지 않아, 나는 열차의 진동과 바람에 놀라 습관적으로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두시 이십삼분에 서는 열차를 타, 그가 내게 보낸 문자가 사십일분에 도착했으니 삼각지를 지났겠지, 나는 마키하라 노리유키의 노래를 들으며 사랑에 빠진 상냥한 남자가 되는 상상을 하고 있었겠지, 우산 손잡이에 턱을 괴고 앞에 선 남자의 가랑이를 힐끔거리며, 그에게서 더러운 냄새라도 났으면 바랐지만 무취에 당황하여 매력 없다 관심 없다 사실은 의미 없다 생각하며 눈앞의 남자처럼 당신도 영영 모르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겠지.

추행과 플러팅의 한끗 차 같은 건 생각하지도 않았어, 내가 지금처럼 형을 좋아할 줄 몰랐으니까. 좋아할 사람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장난, 우린 겨우 육개월 전 우연히 한번 만난 사이로, 여태 단 한번도 떠올리지도 않은 채 살아가다 오늘 꿈 음행의 동반자였을 뿐. 형은 내게 그 정도의 사람이었지, 하지만 슬슬 사과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초조해지기 시작했을 때

달링, 혹시 이거 섹스팅의 시작인가요? ㅋ

하고 답장이 온 거야. 어, 나를 기억한다고, 나를 까맣게 잊은 건 아니라는 사실에 기쁜 건 나중 일이고 나는 무례함을 용서받은 것만 같아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안심, 그제야 안도하며, 플래그가 잔뜩 붙은 프루스트의 책을 무릎 위에 꺼내놓으며, 순식간에 쾌적하게 바뀌어버리는 지하철의 공기와 소음, 고작 답장일 뿐인 일에 전혀 엉뚱한 회로로 돌진해 내 미래는 밝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 「얼씨구야」, 그때와 똑같은 환승 음악, 나는 씨발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고, 당신이 죽어 누워 있다는 병원으로 향하면서, 그러니까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후회해야 좋을지 생각할 때, 도돌이표를 만나 부딪혀 또다시 돌아가 시작하는 오후의 풍경을 나는 본다.

 

*

 

형은 활짝 웃으며 물론 날 기억한다고, 아주 잘 기억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난해하고 장황하고 못 알아듣겠는 발제는 처음이었거든요.”

해는 짧아져 그를 만났을 때에는 이미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었다. 아주 멀리, 짙고 넓게 퍼진 구름 사이로 맑게 갠 하늘의 작은 조각이 보였다. 그와 나는 젖은 의자를 들어올려 빗물을 털어냈다. 그도 나도 약속한 듯 인적이 없는 테라스로 나가 자리를 잡았고, 이 정도의 수고로움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저녁이 되자 마침 테라스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기에 딱 좋은 날씨가 되어 있었다.

나도 물론 그를 기억했다. 그를 마주하고 보니 더욱 그랬다. 빳빳하게 다림질된 흰 셔츠에 토시를 끼고 내 말을 받아 적던 남자. 저 남자는 분명 시대착오적인 패션을 의도적으로 구사하는 사람이거나 제정신이 아닌 사람일 거라고 확신했었으니까. 8층 테라스 너머 내려다보이는 캠퍼스 위로 추를 늘어뜨린 타워크레인이 천천히 그리고 우아하게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망한 포럼을 끝내고 신촌 거리를 향해 내려가던 때의 풍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봄이었고 벚꽃은 끝물이었다. 나는 새롭게 단장한 백양로에 많이 감탄하며 조금은 아쉬워하며 일행과 떨어져 걷고 있었다. 정기적으로 나가는 것을 완전하게 그만둔—하나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포스터 미감이었고, 또 하나의 이유는 거기서 만나 사귀던 애랑 깨졌기 때문이었다—게이 커뮤니티에서 이틀짜리 LGBT 포럼을 주최했고, 나는 문학 파트에서 발제를 맡기로 되어 있었다. 모임을 관두기 전 약속된 것이었고, 포스터, 그 망할 놈의 포스터가 이미 제작되어 있기 때문에라도 나는 그 발제를 강행해야만 했다. 다행히 내가 오는 것을 알고 미리 피했는지 활동가로 일하던 옛 남자친구는 보이지 않았다.

그날 나는 프루스트와 바르트, 기형도의 작품을 요약하며 퀴어 계보도를 그리고 시간이 되면 베케트와 이인성까지 뻗어나가는 프루스트의 위대함……까지 설파하려 했다. 하지만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고, 나의 욕심은 과했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프루스트의 풍성함과는 판이한 췌사만 가득 늘어놓고선 지난날의 연애처럼 망했다. 애초에 사랑 않는, 사랑 않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 그 텍스트들에 애정을 담아 전달할 리 만무했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그리고 그때의 내 심정의 색채—화창한 봄이었으니까 아이러니라도 있었겠지—와 가장 비슷했을 기형도 하나만을 다루었어도 이 정도로 참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원형강의실에 앉아 마이크를 쥔 지 십분도 지나지 않아 이 발제가 망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딴짓하는 사람, 지난 섹션의 발제가 끝나자 눈치를 보며 슬며시 일어나는 한 무더기,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건수를 찾는 사랑꾼 사이에서 유일하게 나와 눈을 마주치며 내 말을 받아 적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최대한 빨리 증발하고 싶었지만, 한시간을 그 사람의 토시에 의지해 그것만 뚫어져라 바라보며 위태롭고 시든 표정으로 꾸역꾸역 발제를 끝마쳤다.

“내가 그게 좋아서, 다 알아들어서 그랬겠어요?”

그때의 토시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꼭 같은 헐렁한 와이셔츠에 한쪽 팔에는 얇은 코트를 접어 걸치고 있었다.

“오늘은 좀 큰 토시를 끼셨네요. 한짝만.”

그가 잠시 생각하는 듯 고개를 천천히 젖히더니 크게 한번 웃었다. 그 웃음에 나는 그가 인디언 보조개를 가진 사람이구나, 알게 되었다. 주문한 차가 나왔을 때 기찻길 위로 잿빛 화물열차가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그는 나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는데 단 한번도 그를 생각하면서 음심을 품어본 적이 없었고, 음심은커녕 생각조차 품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정문 앞에서 만나 굴다리를 지날 때 그와 살짝 스치기만 해도 미칠 것 같았다. 아니, 처음부터 나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볼 수조차 없었다. 그건 내가 지난봄의 실패를 떠올렸기 때문은 아니었다. 꿈 때문이었을까? 그의 집요하진 않았지만 꼭 한번 만났으면 좋겠다는 암시에 미리감치 나는 사랑하는 것이 아닌 사랑받을 예감으로 가득 차 그를 보는 것일까? 그건 꿈이나 예감이 아니라 이제 곧 사실이 될 것이라는 걸 너무 잘 알겠고

“그때 연락처를 받아간 것도 다른 뜻이었나봐요?”

내가 묻자 그는 은테 안경 너머로 알아달라고, 알지 않느냐고 거의 눈빛으로 말했다.

“그랬었죠. 근데 동생이 저 같은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수소문해 들었어요.”

나는 나에게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싶어서 고개를 살짝 돌려 웃었다.

“그래서 연락이 없으셨군요?”

“그날 뒤풀이 끝나고 칼같이 사라져서 너무 아쉬웠어요.”

“전 그날 탈반할까 생각도 했었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