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라일락과 장미향기처럼 결합하는

진은영 시의 ‘감성’과 ‘정치’

 

김영희 金伶熙

1977년 경기 성남 출생. 고려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yhorizon@naver.com

 

 

사과와 예수

 

쎄잔, 뉴턴, 백설공주, 윌리엄 텔(「견습생 마법사」). 이들 이름 속에서 당신이 공통적으로 떠올리는 그것은 다름아닌 ‘사과’다.1 그렇다면 아담, 헤롯, 요한(「Summer Snow」). 이들 이름 속에서 당신이 단일하게 연상하는 사람은 바로 ‘예수’다. ‘사과의 역사책’에 기입된 대문자 역사와 ‘예수의 활약상’에 복무한 엘리뜨의 영혼은 사실 역사 속에서 무수한 개인을 마이너리티로 소외시켰다. 그 불우한 개인을 소수자라고, 그들의 “잘린 머리”(「Summer Snow」)와 “더듬거리는 혀”(「이전 詩들과 이번 詩 사이의 고요한 거리」)와 “긴 손가락”(「긴 손가락의 詩」)과 “갈라진 목소리”(「앤솔러지」)로 씌어진 시들을 ‘소수자의 시’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시인은 “사과의 역사책을 얼른 덮고,/빈 사과 궤짝을 타고” 대문자 역사로부터 도주를 감행하는 자다. 행여 상징계의 공포가 그를 위협한다 할지라도 시인은 “한 그루 말〔言〕의 복숭아나무를 심으리라”(「견습생 마법사」)라고 도도히 발언한다.

남근의 권위가 지배하는 사과의 역사는 엘리뜨의 시선으로 세계를 코드화했다. 그 코드화된 영토에서 예수는 백인, 남성, 어른의 역할모델로 활약했고 그 기준에 배치되는 유색인, 여성, 아이는 소수자로 전락했다. 상징계의 권위는 그렇게 탄생했고 견고해졌다. 이를 또한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거기서 연원한 영원한 진리마저 의심한다. 진은영(陳恩英)이 “진리는 낡아빠진, 그리고 감각적인 힘을 상실한 은유들”(「Summer Snow」)이라고 니체를 인용할 때, 이것은 일종의 시론(詩論)처럼 읽힌다. ‘사과의 역사책’과 ‘예수의 상징계’를 버리고 시인이 도달하고자 하는 세계가 그 속에 있다. 낡은 이성적 진리의 세계를 전복하여 살아있는 감각적 알레고리의 세계를 구현하는 것. 일찍이 시인이 「긴 손가락의 詩」에서 강조한 바는 이것이다. 몸의 중심에서 “가장 멀리 뻗어나와” 있는 손가락은 수목(樹木)형 체제를 외부로부터 분열시키는 하위요소다. ‘머리’가 아닌 ‘손가락’의 비교우위는 이성적 사유보다 감각적 운동을 중시하는 시인의 고유한 감성론이다.

진은영의 시가 미학적으로 새로운 것은 그녀의 낯선 언어가 우리의 상투적인 감각체계에 충격을 주기 때문이다. 불일치하는(dissensus) 이미지, 사물의 아우라는 의미작용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진은영의 시가 정치적으로 새로운 것은 그녀의 문학적 발명이 자본주의의 낡은 분배형태에 균열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현실과 접속하는 언어들, 붕괴된 세계를 증언하는 알레고리적 기호들은 다수자의 권력과 자본의 의미망에 포획되기를 거부함으로써 다른 삶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녀의 시에는 사과의 역사책과 예수의 상징계에 기입되기를 거부하는 ‘이미지’와 ‘메씨지’가 공존한다. ‘미적 언어의 기만’으로서의 감성론, ‘재현론’으로서의 정치학을 넘어 그녀가 발명중인 시의 ‘다른 미래’는 어떤 것인가? 그녀의 시에 펼쳐진 새로운 감성론과 정치학의 지도가 궁금하다. 그 세계에 입장하는 순간, 그녀의 “서툰 시 한 줄을 축으로 세계가 낯선 자전을 시작한다”(「앤솔러지」).

 

 

감성론 1. 이미지의 비(非)문법

 

각각 시집의 표제작인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과 「우리는 매일매일」에는 시에 대한 흥미로운 메타적 발언이 숨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시의 이름 뒤에 새겨진 ‘주소 불명’과 ‘열쇠 잃음’이라는 각인(刻印)이다. 그녀의 시는 시어의 ‘지시성’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그녀의 시에는 주소를 지우고, 열쇠를 방기하는 방식으로 애써 정형(定型)의 의미화를 거부한 흔적이 역력하다. 의미의 가독성을 경계하고 특정한 메씨지를 지닌 언표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시적 발화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소 불명’의 편지와 ‘열쇠 잃은’ 흑단상자가 도모하는 시적 전략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우리는 ‘불일치하는 이미지’와 그들이 수행하는 ‘이미지의 비문법’이라는 설명을 마련해볼 수 있다.

 

밤은 타로 카드 뒷장처럼 겹겹이 펼쳐지는지. 물위에 달리아 꽃잎들 맴도는지. 어쩌자고 벽이 열려 있는데 문에 자꾸 부딪히는지. 사과파이의 뜨거운 시럽이 흐르는지, 내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지. 유리공장에서 한번도 켜지지 않은 전구들이 부서지는지. 어쩌자고 젖은 빨래는 마르지 않는지. 파란 새 우는지, 널 사랑하는지, 검은 버찌나무 위의 가을로 날아가는지, 도대체 어쩌자고 내가 시를 쓰는지, 어쩌자고 종이를 태운 재들은 부드러운지

-「어쩌자고」 전문

 

겹겹의 타로 카드, 달리아 꽃잎들, 버찌나무 위의 가을이 그려내는 ‘정경들’. 벽에 부딪히는 문, 부서지는 전구들, 파란 새의 울음이 들려주는 ‘소리들’. 사과파이 시럽의 뜨거움, 젖은 빨래의 축축함, 태운 재의 부드러움이 전달하는 ‘감촉들’. 이미지들이 서로 접속되면서 시가 완성된다. 각각의 이미지는 독립적이며, 이들 단속적인 이미지 기표들을 한점에 묶어줄 만한 매듭은 존재하지 않는다. 의미는 그렇게 미끄러진다. 이들 불일치하는 이미지의 고유한 배치가 한편의 브리꼴라주(bricolage)로 전시된다. 우리의 감각이 기꺼이 그 접속 과정에 동참한다. 감각의 수용능력은 극대화된다. 그렇다면 시의 비밀은 감각의 브리꼴라주 속에 있었던가.

꼭 그렇지만은 않아 보인다. 이들 이미지에는 공통적으로 어떤 ‘처절함’이 있다. 어쩌자고 내가 “널 사랑하는지”, 어쩌자고 내가 “시를 쓰는지” 알 수 없다. 이는 “심장에 정확히 꽂힌 칼/콸콸 쏟아지며 거즈를 적시는 피처럼”(「詩」) 전적으로 ‘나’를 물들이지만, 정작 ‘나’는 어쩌자고 이런 치명적인 사태가 발생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사랑이 그렇고, 시가 그렇다. 그것은 ‘나’의 “심장에 정확히 꽂힌 칼”이며 그 날카로움에 ‘나’의 심장은 마비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칼은 “알 수 없는 곳에서”(「詩」) 주소 불명의 편지로 날아왔다는 점이다. 그것은 원인을 알 수 없어서 필연적이고, 이유를 설명할 수 없어서 가혹한 것이다. 우리가 “겹겹이 펼쳐지는” 감각의 브리꼴라주를 논리적인 언어로 풀어보기는 어렵지만, 그 불화(不和)하는 이미지들은 때론 이리도 절실한 메씨지를 우리에게 전달한다. 이미지의 배열 속에서 불현듯 드러나는 의미를 송신한다. “감각의 숫자들”(「Modification」)은 가끔씩 이렇게, ‘사랑’과 ‘시’에 관한 치명적인 의미 공식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것이다.

 

오늘 네가 아름답다면/죽은 여자 자라나는 머리카락 속에서 반짝이는 핀과 같고/눈먼 사람의 눈빛을 잡아끄는 그림 같고/앵두향기에 취해 안개 속을 떠들며 지나가는/모슬린 잠옷의 아이들 같고/우기의 사바나에 사는 소금기린 긴 목의 짠맛 같고

-「아름답다」 부분

 

‘A가 아름답다면 B와 같다’는 가정법이 의도하는 것은 결국 B의 아름다움이다. 그러므로 이 시의 관건은 ‘B와 같다’는 직유가 생산해내는 ‘아름다움’에 우리가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는가이다. 우선 “반짝이는” 직유의 문법으로 우리의 “눈빛을 잡아끄는” 독립적인 이미지, 그

  1. 이 글에서 다루는 시집은 진은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문학과지성사 2003), 『우리는 매일매일』(문학과지성사 2008)이다. 본문에서 인용할 때는 작품명만 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