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윤영 金倫永

1971년 서울 출생. 1998년 「비밀의 화원」으로 제1회 창비신인소설상 입선. 작품으로 「그때 그곳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나」 등이 있음. yoon2828@hitel.net

 

 

 

루이뷔똥

 

 

1. 마드무아젤 송

 

뉴욕 세계무역쎈터 건물이 무너지고 있던 바로 그 시간, 지구 반대편에 있는 빠리에선 세미가 사기를 당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그때 막 깨닫는 중이었다.

세미가 앉아 있던 곳은 샹젤리제 거리 맞은편에 있는 까페 뒤마쎄였다. 늦은 점심을 기다리며 멍하니 앉아 있는 그녀에게 까페오레와 크루아쌍을 갖다준 웨이터 뽈이 지나가듯 한마디를 했다.

“들었어? 뉴욕이 불바다가 됐대.”

그 말은 자동차 클랙슨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고 세미는 어차피 큰 관심도 없었다. 식은 커피를 꿀꺽 삼키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하긴 했다. 뉴욕이라…… 나도 4년 전에 거기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그동안 참 많이도 돌아다녀봤구나, 그런 감회가 새삼 들었다. 뉴욕, 런던, 로마, 쮜리히, 프랑크푸르트, 뮌헨, 빠리 그리고 서울. 그 대도시들의 인상은 거의 비슷했다. 차선이 바뀌고 택시 모양이 바뀌고 경찰 복장이 바뀌고 브렉퍼스트의 메뉴가 조금씩 바뀔 뿐, 구하고자 하는 건 어디서든 다 구할 수 있었다. 돈만 있으면 말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것도 있긴 했다. 어느 나라, 어느 도시도 빠리에서만큼 루이뷔똥이 흘러넘치진 않는다.

여느때 이 시간이었다면 세미는 점심을 이미 먹고 개선문 앞이나 라데팡스, 오페라, 쌩 미셸 거리 등에서 이스트팩이나 쟌스포츠, 가짜 프라다 가방을 멘 누런 얼굴들을 열심히 물색하고 있었을 것이다. 거기서 별 재미를 못 보면 할 수 없이 이 샹젤리제 거리로 돌아오겠지만 요즘은 너무 많은 경쟁자들과 경찰들과 추적반이 뒤섞여 있어 가급적 이 거리는 피하고 있다. 내키면 아침 일찍 샤를르 드골 공항이나 리옹역이나 오스떼를리츠역으로 원정을 나가기도 했다. 처음 프랑스 땅에 발을 디딘 배낭여행객들은 세미가 한국말을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쉽게 경계심을 풀었다. 단지 가까운 메트로의 위치를 가르쳐주거나 열 장 묶음 까르네를 대신 사주거나 흔하디흔한 메트로 맵을 한장 쥐여주기만 해도 그들 대부분은 오후에 샹젤리제 거리의 맥도널드 앞으로 나오곤 했다. 그들이 꼭 신의있는 젊은이라서만은 아니었다. 말로만 듣던 루이뷔똥 알바가 어떤 건지 궁금하기도 한 한편, 잘하면 몇시간 만에 7〜8백 프랑이라는 거금을 벌 수도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서일 것이다.

세미가 처음 이 일을 시작한 일년 전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대단한 불법이라도 되는 듯 쉬쉬했고 마지못해 따라온 여행객들도 큰 모험이라도 하는 듯 비장해했지만 지금 그런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자기도 하고 싶다며 자원해서 따라오는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사례비를 받기도 전에 어디다 쓸까부터 고민하는 학생들도 꽤 있었다. 심지어 자기가 가진 골드카드를 쓰겠다는 대담한 족속도 있었다. 루이뷔똥은 한 매장에서 한 사람당 두 개씩밖에 팔지 않고 그것도 여권 조회를 하기 때문에 손님이 애걸해야 겨우 물건을 내주는 도도한 영업방침으로 유명했다. 그 덕에 루이뷔똥을 대신 사다주는 이 특이한 아르바이트가 성행하게 된 것이다.

교포들의 눈은 좀더 미묘했다. 빠리대사관 영사과나 외환은행 광고판에는 점잖게 나라 이미지를 걱정하는 글들이 즐비했고 한때 대사관에선 루이뷔똥 아르바이트를 금하는 통지문을 민박집에 죄다 보냈다고 한다. 유학생들은 여름을 기다려 민박을 쳤고 사철 민박업을 하는 교포들은 상당수 루이뷔똥업자들과 관련이 있었다. 제 발로 찾아오는 학생들은 그런 민박집에서 유인한 아이들이었다. 빠리에 있는 한인민박 백여 군데 중 알바를 안 시키는 집이 오히려 얼마 안될 거라고들 했다. 거부감을 느끼는 교포들도 많지만 커미션이 만만치 않다는 것은 이 바닥에서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판수는 세미가 아는 한국 사람 중 가장 과격한 반대론자였다.

“길 가는 사람에게 호객행위를 하다니 창녀와 다를 게 없잖아?” 하며 삐갈 거리 창녀랑 비교까지 해가며 야비하게 이죽거렸다. 그런 그가 보기 싫어 세미는 불어로 욕을 했다. 판수는 그걸 못 알아들었다. 한국을 떠난 지 육년이 넘었다지만 그는 불어가 유창하지 못했다. 가이아나나 코소보 등지에 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세미는 정말로 그가 외인부대 출신인지 가끔 의심스러웠다. 남자들의 무용담이라는 게 다 비슷비슷하게 들려서이기도 하지만, 그는 군대가 아닌 감옥에 있다 나온 사람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의 전우였다는 아랍계 장정 둘이 세미와 판수가 사는 집에 놀러 왔을 때, 판수를 까뽀랄 므슈 리라고 반갑게 부르는 걸 보고서야 세미는 비로소 그런가보다 했다. 한명은 희디흰 께삐블랑에 각종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집채만한 더플백을 메고 있었고 두 사람 다 걸음걸이가 판수와 비슷했다. 그들과 함께 판수는 잘하지도 못하는 영어·불어와 다른 외국어를 섞어가며 밤새도록 싸구려 와인을 마시면서 떠들어대곤 했다. 가끔은 호기롭게 리도쇼를 보러 간다며 밤에 나서기도 했다. 그들의 국적은 기억나지 않지만 늘상 ‘퍽 큐 아메리카’를 입에 달고 다녔고 덩달아 판수도 미국을 욕하곤 했다.

판수가 욕하는 나라는 미국만이 아니었다. 오년을 꼬박 몸바쳐서야 겨우 시민권을 얻은 프랑스도 그에겐 고까운 나라였다.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진 물어본 적 없지만 김대중이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과 악수하는 뉴스가 나올 때, 세미는 판수에게 약간 놀랐다. 그는 시금털털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보기 싫군. 둘 다 콱 망해버려라.”

그가 한국 사람을 꺼린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북한 사람들까지 싫어하는지는 몰랐다. 루이뷔똥을 넘겨줄 때마다 연락해오는 영변댁의 전화에 판수가 질색하긴 했다. 그 아줌마는 북한 사람이 아니라 중국 동포라고 얘기했건만 똑같은 빨갱이 나라에다 한 핏줄이나 마찬가지니 그게 그거라고 그는 우겼다. 판수가 북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프랑스 외인부대가 받아주지 않는 나라는 제대로 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판수에게 호오(好惡)의 기준은 그렇게 단순했다. 본 적도 없는 영변댁을 그렇게 싫어하는 이유는, 그 여자의 목소리에선 왠지 구린내가 난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세미에게 영변댁 여권을 꼭 확인해보라고 했다. 분명히 중국에서 한국인 여권을 갈취하거나 위조해 빠리에 왔을 거라며 대사관에 알아보라고까지 했다. 그리고 아무 대꾸도 안하는 세미에게 판수는 이렇게 으르렁거렸다.

“너같이 편하게 산 여자는 진짜 세상이 어떤지 몰라.”

영변댁을 처음 만난 날을 세미는 잊을 수가 없다.

입천장이 까질 정도로 딱딱한 장봉 쌘드위치나 베트남 국수에 질릴 때면 세미는 13구에 있는 차이나타운에 들러 볶음밥을 사먹곤 했다. 하필이면 그날, 늘 보던 맘씨 좋은 주인 대신 무뚝뚝한 한 노인이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계산이 뭐가 잘못됐는지 그는 계속 중국어로 툴툴거렸고 불어도 영어도 할 줄 모르는 그이가 답답해 세미가 한숨을 쉬자 노인은 화를 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튀어나온 중년여자 한명이 재치있게 통역을 해주었고 단돈 2프랑이 모자라서 화를 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게를 나와서도 ‘메르씨’를 연발하는 세미에게 그 여인은 이렇게 또박또박 대답했다. “괜찮아요. 거기도 한국 사람 맞죠?”

영변댁의 억양은 강하지 않았지만 차림새는 조선족다웠다. 이년 전까지 중국 심양에서 살았지만 할아버지의 고향이 평안북도 영변(寧邊)이기에 자기를 영변댁이라고 부른다며, 아가씨도 김소월의 시에 나오는 영변을 아느냐고 물었다. 김소월이라니, 너무도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 이름에 세미가 주춤거리는 사이, 영변댁은 한번 놀러 오라며 연락처를 쥐여주었다. 먼 친척 할머니가 빠리 외곽에서 민박집을 운영하는데 영변댁은 거기서 일을 돕고 있다고 했다. 민박집 이름은 ‘통일민박’이었다. 영변댁은 김치찌개라도 새로 끓이면 세미를 불렀고 점차 세미는 영변댁이 해주는 칼칼하고 구수한 육개장이나 청국장 맛에 익숙해졌다. 영변댁은 가끔 세미에게 은행심부름을 부탁했고 뭘 믿고 이런 걸 시키느냐고 세미가 물으면, 자기는 사람 보는 눈이 있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영변댁은 민박집 밥을 해주는 틈틈이 가방을 수집했는데, 사실 그것이 영변댁의 주업이었다.

그렇게 해서 일은 시작되었다. 영변댁이 들고 온 현금뭉치와 아멕스 수표뭉치를 처음 받던 날, 너무 떨려서 도저히 못하겠다며 도리질을 치는 세미에게 영변댁이 물었다.

“미스 송은 언제까지 그 짐승 같은 남자랑 살 거야? 빨리 돈 벌어서 꼬르동 블뢰(Cordon Bleu)에서 요리를 배우겠다고 하지 않았어? 이걸로 여름 한철이면 5만 프랑은 벌 텐데 왜 주저하지?”

판수를 짐승 같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다만 말이 너무 안 통한다고 느낀 적이 많았을 뿐이다. 권위있는 요리학교인 꼬르동 블뢰에 다니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많았다. 환상적인 몽블랑 케이크나 꾸스꾸스, 훈제연어 따르따르, 푸아그라, 에스까르고 등등을 척척 만들어보고 싶었다. 왜 하필 요리를 배우고 싶냐고 묻는다면 특별한 답은 없다. 그냥 하고 싶을 뿐이다. 유학생들에게 불어교습을 하는 것만으로는 생활이 힘들었고 더이상 샤넬이나 크리스띠앙 디오르 매장에서 일하는 것은 지겨웠다. 서울 집에다 부탁하는 건 더 끔찍했다. 다니던 멀쩡한 직장 때려치우고 빠리로 날아온 세미는 거의 내놓은 자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하고 싶다가도 누가 강요하면 움츠러드는 것이 세미의 천성이었다. 학교 다닐 때도 그랬다.

세미야 이 수업 끝나고 잠깐 보자, 학회모임이 있으니 꼭 와라, 오늘 서총련 집회 있는 것 알지? 전학대회가 있으니 빠지면 안된다……

세미의 대학생활은 사람들을 피해다니다 끝났다. 학년이 높아지면서 동기들을 피해다녔고 나중에는 목소리 큰 후배들을 피해다녔다. 졸업하고 나선 동창회나 동문회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된 게 아닌가, 세미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좌파떨거지들이 없는 곳을 찾으려고 떠난 것은 분명 아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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