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최은미 崔銀美

1978년 강원 인제 출생. 200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너무 아름다운 꿈』, 『목련정전(目連正傳)』, 장편소설 『아홉번째 파도』, 중편소설 『어제는 봄』 등이 있음.

alfmrlal@naver.com

 

 

 

장편연재 1

마주

 

 

나는 다른 사람의 신발에 발을 넣어본 적이 있다.

그때 난 겨울이 2월의 마지막 날에 끝난다고 믿었다.

2월 28일. 가끔은 2월 29일.

아무리 춥거나 눈이 와도 2월이 지나면 그건 겨울이 아니지.

겨울이 아닌 거야.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얼음 위를 걸어본 적이 있다.

오직 겨울에만 볼 수 있다고 니가 말했다.

헤엄을 치거나 배를 타고서는 갈 수 없는 어떤 바위 아래를, 물이 얼면 갈 수 있다고 했다. 얼음 위를 걸어서.

나는 너의 신발에 발을 넣어본 것을 숨긴 채, 너를 따라 언 강 위로 올라갔다.

 

나는 김이 서린 욕실 거울 위에 글자를 써본 적이 있다.

나는 아주 오래 샤워했다.

해변에서 놀다 들어오거나 언 강 위를 걷고 온 날,

샤워기의 뜨거운 물을 맞고 서서 오줌을 쌌다.

김이 사라지면 내 글자도 숨고, 다시 김이 서리면 내 글자도 살아난다.

나는 니가 봤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쓴 것을.

 

아주 오래전에,

나는 272년의 형량을 받은 적이 있다.

그게 언제쯤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서 나는 내 형기가 끝난 건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

여름마다 선풍기 창살을 세어보긴 한다.

백 하고도 스물한개.

나는 한번도 잘못 센 적이 없다.

닭 튀기는 소리를 빗소리로 착각한 적은 있다.

‘절대 뒤집지 마시오’라고 쓰인 택배를 뒤집은 적이 있고,

닥치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한줄로 서서 흔들리는 다리를 건넜다.

다리 아래로는 호수가 있었고, 다리를 다 건넌 곳에는 사과주를 만드는 농장이 있었다.

우리는 먹고 마셨다.

니가 옆에 와 앉았을 때 나는 혀가 풀렸다.

 

반은 어둡고 반은 밝은 달이 남쪽 하늘에 뜰 때,

긴 바늘이 6에 갈 때,

 

나는 답장을 써본 적이 있다.

보내본 적도 있다.

 

기다린 적은 없다.

 

*

 

지금부터 내가 하는 모든 말은 나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

 

나는 포토라인 앞에 선 적이 있다.

평일이고 대낮이었다. 눈앞에서 플래시가 터지고 마이크를 든 사람들이 나를 에워쌌다. 나는 말린 장미색 원피스를 입었다(상견례 때 샀던 옷이다). 머리카락은 목 뒤에서 하나로 묶었고 아이라인은 그리지 않았다. 마스크는 에티본 스탠다드핏 중형 블랙.

나는 커다란 건물의 회전문을 막 밀고 나온 참이다.

마치 좀 전까지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는 듯, 누군가 마이크를 내밀며 묻는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또다른 사람도 묻는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죠?”

나는 눈을 내리뜨고 잠시 생각을 해본다. 얘기를 이어가야 하는 건가? 어떤 얘기인 거지? 그래서 어떻게 된 걸까? 대답을 않는 사이 누군가 외치듯 묻는다.

“당신은 피를 뽑지 않았습니까?”

피. 물론 나는 피를 뽑았다. 내가 회전문을 밀고 나온 저 커다란 건물은 병원이다. 들어가는 길이 아니라 나오는 길이라는 게 중요하다. 나는 성실히 임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건물 안으로 사라질 수 없다. 카메라를 헤치고 걸어 나가 차를 타야 하는 것이다.

“한마디만 해주시죠.”

마이크들이 서로 어깨를 밀치며 다가온다. 나는 정말로 한마디만 던져주고 저 마이크 원을 뚫기로 한다. 그래서 고개를 들고 솔직하게 말했다.

“피 검사 결과 제게는,”

“……”

“잠복결핵균이 있었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키보드 소리가 귀를 때리기 시작했다. 야외 포토라인인데도 이상하게 그 소리가 들렸다. 수십대의 노트북이 잠복결핵균을 받아 치는 소리가. 곧바로 질문이 쏟아졌다.

“어떻게 잠복결핵균이 있을 수가 있죠?”

“지금까지 숨기고 살았나요?”

“하시는 일이 뭐죠?”

“혹시 헬리코박터균도 있는 거 아닙니까?”

나는 억울한 얼굴로 질문자를 본다.

“헬리코박터균은 없거든요?”

“그건 왜 없죠?”

“칠일 동안이나 약을 먹고 다 죽여버렸는걸요?”

“그럼 또 뭐가 있나요?”

또 뭐가 있을까.

“치질?”

“치질이 있습니까? 어디까지 진행됐죠? 3기? 4기?”

나는 이번에도 억울한 얼굴로 말한다.

“전 2기예요.”

치질 2기를 받아 치는 소리.

“딱 하나만 더 말씀해주시죠. 최근에 또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나요? 불면이나 불안, 중독 증세는 없습니까?”

나는 조금 자포자기한 심정이 된 채로 그들에게 말해준다. 내 증세를. 솔직하게.

“전 사실 스마트폰 중독이에요.”

몇몇이 격앙된 목소리로 외친다.

“어떻게 스마트폰 중독일 수가 있죠?”

“부끄럽지 않습니까?”

“하시는 일이 뭐죠?”

병원 앞 포토라인을 회상하다보면 이 모든 게 다 잠복결핵균에서 시작된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날 나는 내 묵비권을 걷어차고 내 변호사를 실망시켰다. 어쩌면 말린 장미색 원피스 때문일 수도 있다. 그 포토라인에서 내가 입었던 옷은 거의 전생과도 같은 시절, 이십대의 어느 불편한 날에 입었던 옷인 것이다.

“치료를 받기로 결정했나요?”

누군가 물었다.

“스마트폰 중독 말인가요?”

“잠복결핵 말입니다.”

“사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조언을 듣고 싶은 표정이 되어 질문자들을 바라봤다.

“당연히 치료를 받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누군가 말했다.

“반년 동안 약만 먹으면 되는 걸로 아는데요?”

다른 누군가도 말했다.

“지금이야 균이 잠복 상태지만 활동성으로 바뀌면 다른 사람을 감염시킬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의사는 뭐라고 하던가요?”

나는 그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골똘한 표정으로 말했다.

“의사야 아무래도 약을 권하죠. 하지만 사정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왜죠?”

“사실 저 어렸을 때요,”

나는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동네에 어떤 아주머니가 계셨어요. 엄마랑 친한 분이었죠.”

“엄마요?”

“아, 제 친정엄마요.”

“친정엄마라니, 결혼을 하신 겁니까?”

“설마 아이도 있나요?”

“일단 얘기부터 좀 들어봅시다.”

누군가 가지를 쳐냈다.

“계속하시죠.”

나는 계속했다.

“동네에 어떤 아주머니가 계셨는데요, 우리 할머니보다는 젊고 우리 엄마보다는 나이가 든 분이었죠. 저는 그분을 만조 아줌마라고 불렀어요. 그 아주머니가 꽤 건강한 분이었는데요, 어느 날 결핵약을 먹고부터 눈앞이 잘 안 보이기 시작한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죠?”

“결핵약 부작용으로 시력 손상이 왔단 말인가요?”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나는 침을 한번 삼켰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면요, 그 아주머니께서, 전 사실 그 아주머니를 좋아했거든요. 근데 그분이 눈이 잘 안 보이니까 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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