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 특별기고
만물 혹은 만인
『만인보』를 마치면서
고은 高銀
시인. 대표작으로 연작시 『만인보』(전30권), 서사시 『백두산』(전7권), 시선집 『어느 바람』, 시집 『허공』 『남과 북』 『내일의 노래』 등이 있다.
이 미련의 삶에 웬만큼 머물고 있다. 만인보 25년의 천후(天候)에 감사한다. 두고 보자면 만인보(萬人譜)의 다른 이름은 만물보(萬物譜)일 것이다.
이렇게 느껴오는 바와 달리 한밤중의 나로서는 그동안의 철모르는 행로를 돌이켜보자마자 차마 뜬 눈 감기도 감은 눈 뜨기도 무엇하다. 먼 길 날아가는 철새가 기류지에서 보내는 한동안의 날개 접힌 휴식이 곧 이어질 밤낮 가릴 수 없는 대양 상공 어디에도 없는 휴식을 다 내다보고 있는 것이라면, 나 또한 그동안의 종적을 그냥 곁눈질하고 말 노릇도 아니기는 아니다. 지나온 길 꼭 시베리아 오세아니아 사이 철샛길 같다.
어린시절 술꾼 할아버지가, 간하고 쓸개하고 아프니 서문 밖 의원한테 가서 그리 말하고 약 지어오너라 하던 그 택도 없는 자진(自診)이나 별반 다를 것 없이 나 역시 그동안 목에 묶여 있던 사슬도 모르고 달밤을 짖어대다가 정작 그 사슬이 풀려서야 지난 25년의 세월네월을 뒤늦게 깨달음으로써, 내 심장이 내 대뇌 언저리보다 먼저 나서서 만취의 밤잠을 쫓아내어 두근반세근반 불면으로 먼동이 트는 일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내 심장이 자주 머리에 앞서 내 손으로 보내는 신명의 전갈이 헐하디헐한 내 시의 날들을 쌓아올렸다 싶다. 울안의 개에게는 사슬이고 울 밖의 말에게는 길마였던가.
아버지는 할아버지 그대로 농부였다. 그것은 할머니 그대로 어머니가 농부의 아낙이었던 것하고 다를 까닭이 없다. 이십대 이전까지의 나도 농촌의 아이로 모 심고 김을 맸다. 새를 보고 소와 종송아지 풀을 뜯겼다. 농부에게는 다섯 바람 열의 비〔五風十雨〕가 간절히 빌어마지않는 하늘의 은혜였다. 닷새마다 바람 불어주고 열흘마다 비가 와주는 것은 해마다 그 은혜에 목마른 농부의 삶을 곧 하늘과 땅의 삶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천·지·인 삼재(三才)라 함은 이런 데서 저절로 생겨난 뜻일 터이다. 회의문자(會意文字)인 농(農) 자는 머리〔〕와 두 손〔臼〕과 별의 운행〔辰〕의 천지변화가 어우러지는 일을 나타내고 있다. 농부는 자신이 부쳐먹는 곳에서 재너머 다른 마을도 사돈마을인 양 거의 발걸음의 내외를 하는 일생으로 살기 십상이다. 하늘과 내통하건만 정작 지상에서는 이렇듯이 한곳의 뿌리이다. 농(農)은 정(定)이다.
그러므로 농업은 농사의 고착을 벗어나지 않으니 노자의 세상살이 그 무위대로 출입 없는 부자유를 자재(自在)로 삼는다. 별건곤이란 제 마을 밖이 아니리라.
아버지는 이른아침 새소리로 하루의 날씨를 짐작한다. 저녁나절 영락없이 아닌 비가 내렸다. 할머니의 허리가 덜 아프면 이튿날 푸른 하늘이 틀림없이 컸다. 우레 천둥에 앞서 쥐와 새들이 미리 숨는 이치나 사람의 이치나 하나도 어긋날 바 아니므로 자연부락이란 숫제 자연의 부락이기도 하다. 이런 두메에서 씨 뿌리면 일월성신과 비와 이슬 그리고 저녁 산내림 바람이 내려와 뿌리 씨앗을 싹틔워 어느새 출무성히 길러내는 곡식이 내남적없이 늠름했다. 그러므로 농사란 하늘의 농사라는 뜻으로 농자(農者)에 앞서 농(農)이 천하의 으뜸일 터.
오랜 산파(散播)농사와 달리 조선후기 이래의 이앙농사이므로 오늘날 기계영농의 욕망과는 전혀 다른 자연에 더 기우는 노릇이 삶의 전부였다. 근대는 아직 근대 이전이었다. 아마도 이런 조상 대대의 농업이 내 서사의 근원으로 자리잡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만인보의 세월에도 무리없이 적용될 것이다. 시인생활 50여년을 부끄러움 무릅쓰고 고개 주억거려보건대 어디서 건너온 산업혁명의 공장작업 따위는 영 동떨어진 재래농경의 삶이었다면 거기 형식으로서의 근대시와 생태로서의 전근대가 서로 부대끼며 중신에미가 오락가락하는 사이 눈도 코도 모르고 가시버시가 되고 마는 옛날 혼례하고 어슷비슷했다.
나는 고향의 논밭을 떠났으나 내 마음속의 논밭에서 변변치 못한 소출로 사는 이농(離農)으로서의 귀농(歸農)이라는 모순에 익숙하다. 온세상의 사대(四大) 지수화풍을 일상으로 사는 농업이야말로 내 삶의 원리였다. 저 1960년대 무작정 상경한 농투성이가 서울 변두리 다락집에서 밤낮 따위와는 아무 상관없는 도시빈민의 생존에 급급하는 중에도 비가 오지 않으면 고향의 논밭 걱정이고 비가 너무 와도 고향의 가을걷이 걱정으로 상심하는 수작에 나도 끼어들지 않는 바 아니었다. 무더운 여름밤 무교동의 냉방 술집에서 흑맥주 2000CC짜리 술잔을 앞에 두고 문득 뜸북새 우는 무논이 취중에 떠오르는 것은 또 무엇이던가.
어린시절 방과후 집에 오자마자 책보를 풀어놓기가 무섭게 김매는 날 애벌두벌 김을 매는 데 힘을 보태고 쇠죽을 끓여야 하는 이른아침 애농부의 하루하루가 어느새 스무살에 가까이 가고 있었다. 저 만주벌판에서 말 탄 독립군이 말의 배때기에도 붙었다가 꼬랑지에도 붙었다가 하며 일본군을 혼내주고 있다는 아득한 소문에 땀을 쥐는 머슴방과는 달리 식민지의 삶은 그 살아지는 나날에 부합하는 천연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농업은 오늘에도 기억이 아니라 본성으로 박혀 있는 것이 틀림없다. 농업이 열매 따기와 달리 자연 이용이라는 문명임에 틀림없으나 자연의 일부를 대상으로 삼는 행위이므로 결국 인간의 행위가 자연의 행위 안에 속해 있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내 시 쓰기도 이런 농업을 넘어서는 일이 아니다. 붓다가 자신을 ‘마음의 밭을 가는 자’라고 하거나, 어느 음악작품 「시인과 농부」가 말해주는 시농일치(詩農一致)는 작위적이지 않다. 적어도 시는 상품이나 공장 제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는 워낙 반시장적이다.
해방의 소년이었다. 분단의 청년이었다. 이런 시적 배경을 지나면서 다른 어떤 길도 갈 길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한 무자각적인 시의 농부로 살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