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이정 金夷貞

경북 안동 출생.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

소설집 『도둑게』 『그 남자의 방』 『네 눈물을 믿지 마』, 장편소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물속의 사막』 『유령의 시간』 등이 있음.

yijeong326@hanmail.net

 

 

 

만유당

 

 

영감댁과 참봉댁 사이 텅 빈 골목을 빠져나오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시멘트블록 담이다. 흙벽돌을 쌓아 얌전히 기와까지 올린 골목 양쪽의 고가의 담을 지나 느닷없이 맞닥뜨린 시멘트블록 담은 기괴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자경은 순간 외면이라도 하듯 지나온 골목 사이로 마주한 두채의 고가를 돌아본다.

영감댁이라 불리던 시절, 둘째가 분가하면서 형제끼리 집 안에서 서로를 건너다볼 수 있도록 지었다는 참봉댁은 안채가 남향인데 사랑채는 영감댁을 마주 보는 서향이다. 나지막한 담 너머로 사랑채 누마루가 난간까지 훤히 보인다. 형제는 각자의 사랑채에서 마주 보며 자신들의 선택에 흡족해했겠지만, 어차피 아침이면 모두 두루마기까지 차려입고 집집마다 문안을 다니던 시절인데 굳이 건축양식까지 바꿔가며 집 안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싶은 유난한 우애가 이해되지 않는다. 몇년 전, 무너진 흙담을 새로 쌓고 얹은 참봉댁의 기와가 흠 하나 없이 검게 빛난다. 지은 지 이백년이 넘었지만 오랫동안 폐가처럼 버려져 있던 참봉댁은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뒤에야 동네 어느 집보다 번듯하고 위풍당당한 기세를 과시하고 있다. 솟을대문을 지나면 푸른 잔디가 깔린 마당이 고가의 오래된 나무색과 대비돼 잔디는 더 정결한 연두로 보였고 흙갈색 기둥은 퇴적된 시간의 훈장처럼 빛났다.

그러나 참봉댁의 위엄을 드높이는 것은 무엇보다 집 앞에 세워진 어록비이다. ‘조선독립을 목적하고……’ 그 집에서 태어나 독립운동을 한 참봉댁 장손이 1922년 모스끄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하여 남긴 말이었다. 방명록에 썼던 문장의 뒷부분인 ‘공산주의를 희망함’은 비석 뒷면에 작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서훈으로도 당당히 드러낼 수 없는 그늘이다. 그나마도 오랫동안 인정받지 못했던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에게 훈장이 수여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참봉댁은 이제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독립운동가의 생가로 자리매김했다.

주차를 해놓은 마을회관 앞에서 아무리 느리게 걸어도 골목을 벗어나기까진 채 오분도 걸리지 않는다. 자경은 결국 눈앞의 시멘트블록 담을 마주 보고 만다. 일곱층으로 쌓은 시멘트블록이 기역 자로 꺾여 쓰러져가는 한옥을 건설현장 가림막처럼 두르고 있다. 동네의 제일 뒤에 숨어 있긴 하지만 오래된 한옥마을에 시멘트블록으로 둘러친 담벼락은 누가 봐도 흉물스럽기 짝이 없다.

“아니, 누가 도대체 이런 미친 짓을 했나.”

답사를 온 사람들 몇이 지나가다 비명을 지르듯 내뱉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한 동네서 독립운동가가 스물네명이나 나온 걸 기념해 세운 광복공원 덕에 답사를 오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고 있었다. 사람들은 한가롭게 고가의 골목길을 걷다가 불쑥 튀어나오는 시멘트블록 담을 마주할 때마다 거의 비슷한 반응을 보였는데, 자경 역시 다르지 않았다. 아니, 시멘트의 물기조차 다 마르지 않은 담장을 처음 본 순간 분노가 먼저 치밀었다. 차라리 담이 없는 게 낫지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오랫동안 버려진 한옥 마당은 해마다 개망초와 질경이 밭이 돼버렸다. 봄이면 삐죽 올라오는 연둣빛 개망초는 여름이 되기도 전에 한자나 자라서 마당을 빼곡히 메웠다. 흰 꽃들이 가득 핀 마당으로 붉은 노을이 쏟아지는 저녁, 한적한 들판에라도 온 듯 탄성을 터트린 적도 있지만 무너져 내리는 서까래와 한 프레임에 잡히는 무성한 개망초밭은 폐가의 서글픔만 강조할 뿐이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은 급속도로 무너져갔다. 행랑채 왼쪽 서까래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십년 전 폭우 이후였다. 자경과 엄마가 서울로 가고 난 뒤 이십년 넘게 살던 순옥이네마저 떠난 후론 수세식 화장실도 안 돼 있는 빈집에 들어와 살 사람을 구하기 어려웠다. 생활의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곳에 올 사람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집을 비워둔 채 엄마가 일년에 서너번 들르는 게 관리의 전부였다. 전자제품 조립공장 공원으로, 수제 한과와 이바지떡을 만들며 단칸 셋방을 전전하면서도 엄마는 이 집을 팔지 않았다. 시골집이 큰돈은 안 되지만 그래도 단칸방 신세는 면할 수 있었을 텐데 엄마는 절대 이 집은 팔 수 없다며 기를 쓰고 지켜냈다. 공장의 2교대 근무를 위해 새벽 골목에 발소리를 죽이며 나가는 엄마를 보며 자경은 왜 이 집을 놓지 못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빈집은 노인의 척추처럼 매일 조금씩 내려앉았다.

“아이고, 어쩌다 이 집 하나 덜렁 남았는지 모르겠다.”

언젠가 자경과 함께 온 엄마는 검은 때만 더께를 더하는 집의 마룻장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적막강산이구나.”

한때 북적이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가고 허리가 굽어가는 노파와 나이 든 딸만 남은 것일까. 엄마는 기왓장이 깨지고 서까래가 썩어 반쯤 허물어진 행랑채 처마를 바라보며 눈시울까지 붉어졌다. 임시방편으로 덮어놓은 비료포대가 폐가의 분위기를 한층 험하게 만들었다.

“이 집을 지을 때만 해도 참 북적북적했느니라.”

대한제국 시절, 법관양성소를 나와 검사가 되었다는 자경의 외증조할아버지가 지은 집이었다. 틀니가 맞지 않아 말이 어눌하던 외증조할머니는 가끔 그날을 회상하곤 했다.

“이 집 짓고 집들이날 집안의 남녀노소 모두 둘러앉아 논 적이 있었느니라. 어른들이 전부 다 모이라 해 이 대청에 어른, 아이 할 거 없이 둘러앉았는데 큰집 아지뱀이 난데없이 노래를 한자락씩 하자고 하시잖나. 다들 어리둥절했지. 우리가 언제 노래를 해본 적이 있나, 아는 노래가 있나. 너 할배 사 형제분들이 다 계실 땐데 이분들이 먼저 시조창을 한 대목씩 하시더라. 너 할배는 어디서 배웠는지 신식창가를 하더구나. 며느리들은 부끄러워 안 할라캤는데 그날따라 한명도 빠지면 안 된다고 아지뱀이 그러시잖나. 어렵디어려운 시삼촌과 시숙들 앞에서 노래가 안 되면 화전가라도 한마디씩 다 했다. 나도 그때 노들강변을 안 불렀나. 시집오기 전 침모한테서 배운 긴데 소리가 나쁘지 않았는지 너 할배가 당신 몰래 어딜 그리 놀러 다녔냐고 놀맀잖나. 그런 자리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때 내 나이 겨우 서른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이 집도 나도 제일 좋던 시절이랬다.”

영감댁의 네 형제 중 셋째였던 외증조할아버지는 결혼하면서 본가의 바로 뒷집으로 분가했는데, 십년 후 이 집을 새로 지어 만유당이라 불렀다. 유유자적한 삶을 꿈꾸었던 그는 그러나 나라가 망하자 격랑의 시간 속으로 뛰어들었다. 독립운동을 위해 그가 상해와 만주, 연해주를 거쳐 이르꾸쯔끄까지 오가는 동안 그와 함께 집안까지 격랑에 휩쓸렸다. 미처 담을 쌓을 새도 없이 주인이 떠난 집은 적막강산이 돼버렸다.

 

삼년 만에 온 집은 많이 달라져 있다. 대문도 없이 덩그러니 둘러친 시멘트 담을 지나 사랑채로 들어선다. 흙이 허물어져 한쪽으로 기우뚱했던 죽담에 시멘트를 바르고 계단까지 반듯하게 만들어놓았다. 시멘트 죽담의 모서리가 날렵하게 꺾여 있다. 한복에 하이힐을 신은 꼴인 사랑채를 자경은 외눈박이처럼 쏘아본다. 어울리지 않는 부조화가 묘한 수치심을 몰고 온다.

그가 왔다는 소식은 지구 자전이 잠시 멈추는 일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사십오년이나 넘게 부재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더 놀라운 것은 그가 떠나왔다는 곳이었다.

“기가 꽉 막히더라. 어떻게 거기서 왔다는 건지, 아니 거기를 갔다는 게 더 믿을 수가 없더라. 무슨 운명이 이렇게 끝이 안 나는지 모르겠다.”

그가 왔다는 소식을 전해 준 건 정보기관이었다. 엄마는 자경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정보기관에 가서 그를 만나고 와서야 자경을 불렀다. 평소 겁 많은 엄마는 이상한 데선 담대하기 짝이 없었다.

“야야, 너 아부지가 왔단다.”

자경은 엄마가 전한 소식보다 엄마의 입에서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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