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말에서 글에 이르는 길

『한국어, 그 파란의 역사와 생명력』을 읽고서

 

 

염무웅 廉武雄

문학평론가, 국립한국문학관 관장, 영남대 명예교수. 저서 『살아 있는 과거』 『문학과 시대현실』 『모래 위의 시간』 『한국문학의 반성』 『민중시대의 문학』 등이 있음.

 

 

1

 

우리 말/글의 지나온 역사와 오늘의 문제점들에 관해 네분이 주고받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여기에 다양한 참고자료를 양념처럼 곁들인 『한국어, 그 파란의 역사와 생명력』(창비 2020, 이하 『한국어』)은 모처럼 정신없이 빠져들어 몰입의 행복을 누리게 만든 흥미진진한 저작이다. 반세기 넘도록 잡지 편집자이자 문학평론가/영문학자로 일해온 백낙청 선생과 한문학자이면서 고전과 근대 한국문학에 두루 조예가 깊은 임형택 교수가 한쪽에 앉고 방언학 전공의 국어학자 정승철 교수와 어휘의미론을 전공하면서 사전편찬 작업에도 참여한 국어학자 최경봉 교수가 다른 쪽에 앉아 있어, 마치 국어학 전공과 비전공의 대좌 같은 인상을 풍기지만, 읽다보면 네분 사이에 전개되는 학문과 식견의 주고받음이 높낮이 없이 너무도 잘 어우러져 때로는 한 사람의 연속되는 강의를 듣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이하 경칭 생략) 읽는 동안 많이 배우고 대부분 동의하면서 약간씩 이의를 느낀 정도라, 『한국어』의 논지를 따라가면서 내 생각을 조금씩 보태기로 한다.

책을 펼치면 첫머리에 나오는 “(한국어 문제가) 오랫동안 저에게는 일종의 숙원사업이었”(백낙청의 말, 13면; 이하 ‘백 13’ 방식으로 통일)다는 말부터 나에게는 의표를 찌르는 언급이다. 백낙청·임형택 두분과 마찬가지로 거의 평생을 읽기와 쓰기에 매달려 살았고 백낙청과 마찬가지로 남의 글을 읽고 검토하는 일에도 종사해오면서 나 역시 수시로 운명처럼 한국어라는 문제에 부딪혀왔고 말과 글의 오묘한 관계에 생각이 미치곤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좌담 참석자들이 풀어내는 이러저러한 화제가 흥미롭지 않은 게 없지만, 특히 동업자의 입장에서는 “우리 문학적 글쓰기가 어떻게 지금과 같은 양상이 됐는지”라는 문제의식에 입각하여 “우리말 우리글 쓰기를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기회”(임 15)로 삼자는 임형택의 제안에 깊이 공감이 간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한국어 문제는 말하기와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님도 분명하다. 국민생활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서의 정치가 정치가나 정치학자들만의 소관사항일 수 없듯이, 한국어 문제 역시 잠재적으로는 모든 국어 사용자, 즉 온 국민이 나름으로 관심을 갖고 발언할 권리를 가진 사안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말과 글을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전공분야에서 발언할 수 있고, 사회의 각 분야에서 이를 쓰는 대중들이 당사자의 문제로 함께 이야기할 수 있”(최 18)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한국어』는 문필가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그냥 유익하다기보다 필수교양이 될 만한 여러 생각거리들을 다룬 책이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자명한 것으로 매일 매순간 사용하고 있는 우리 말/글은 당연한 얘기지만 원래부터 이러했던 고정체가 아니라 오랜 변화 과정을 거쳐 오늘의 상태에 이르게 되고 지금도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역사적 형성물이다. 물론 변화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국어학 전공자들의 학문에 기대어 그들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령, “10세기 이전의 신라어를 ‘고대국어’라” 하는바 그것이 “경주 중심의 언어일 텐데 된소리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는 점이 이 시기의 두드러진 특징”(정 22)이었다는 설명을 읽을 때, 내게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긴다.

오랫동안 한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던 신라의 수도가 고려 건국과 더불어 중부지역으로 이동하여 지금까지 천년 넘도록 이어져오고 있는데, 그렇다면 고대국어와 중세국어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단절 또는 연속성이 있는가. 다시 말해 고대국어는 경주 중심의 신라어이고 중세국어는 고구려·백제·신라 언어들의 혼융에 기반을 둔 중부지역 언어일 텐데, 그렇다면 고려 건국에 따른 중심언어의 이동에는 국어사적 검토를 요하는 중요한 문제들이 발생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니까 가령 향가는 신라인들의 작품이지만 향가가 수록된 『삼국유사』는 고려 후기의 저작이므로 지금 우리 앞에 놓인 향가의 텍스트는 고대국어와 중세국어 중 어느 쪽에 귀속되는가. 어쩌면 향찰이라는 불완전한 표기수단만 가지고서는 그런 점을 판별해낼 수 없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

국어학(사)에 워낙 문외한이라 이런 의문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아니면 국어학계에서는 이미 상식이자 정설로 되어 있는 것을 내가 모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아무튼 이 책에 참고로 제시된 도식 ‘국어사의 시대구분과 흐름’(23면)을 보아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한국어의 시대구분은 언어 자체의 내적 변화들을 반영하면서도 그와 더불어 왕조의 교체나 전란 같은 정치적 상황변동에 더 종속되는 측면이 있다고 여겨지는데, 이에 대한 포괄적인 이론적 설명도 필요할 것 같다.

우리는 초등학교 입학부터 중고등학교 졸업까지 12년간이나 ‘국어’를 가장 중요한 과목의 하나로 배운다. 하지만 그 교육의 효과가 일상의 언어생활에서 실제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대다수 한국인은 거의 반성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 국어의 네 범주인 듣기·말하기·읽기·쓰기 가운데 일상생활에서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음성언어인 앞의 두가지이지만, 학교교육에서 규범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은 주로 뒤의 문자언어 부분일 것이다. 이 책 『한국어』에서 논의되는 것도 주로 문자언어라고 할 터인데, 따라서 말을 어떤 표기수단에 의해 그리고 어떤 규범에 따라 글로 나타낼 것인가가 핵심적인 주제로 될 수밖에 없다. 차후 다른 전문가와 관심 가진 분들에 의해 ‘읽고 쓰는 한국어’뿐만 아니라 ‘말하고 듣는 한국어’의 실상과 문제점에 대해서도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2

 

한국어의 전개 과정에 무엇보다 심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끊임없는 외래어의 유입이 아닌가 한다. 통일신라 시대에 한자어가 대량 유입되었다 하지만 그보다 이전부터도 이웃의 강대국인 중국으로부터 선진학문·외래종교와 함께 많은 한자어들이 다양한 경로로 들어왔을 것이다. 13세기 중엽부터 백여년에 걸친 원 간섭기에는 몽골어도 적잖이 유입되었다고 하지만, 그 영향의 강도는 한자어에 비할 수 없을 것이며 그나마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고유어 속에 거의 용해됐을 것으로 짐작한다. 어쨌든 한자어와 한자 개념은 역사시대 내내 지속적으로 유입되고 특히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아 억불숭유 정책을 폈던 조선시대에 와서는 한자/한문이 한반도의 언어세계에서 배타적으로 권력화되었을 것이다. 19세기 말 그리고 20세기 초의 애국계몽기부터 식민지시기까지는 일본어, 그리고 해방 후에는 주로 영어(북한에서는 주로 러시아어)의 대량유입으로 새로운 양상이 전개되고 있는바, 특히 영어의 영향은 21세기 들어 더욱 가속화되는 느낌이다.

이 현상은 우리 말/글의 역사와 현실을 이해하는 데에 두말할 나위 없이 결정적인 사실이다. 말만 있고 말을 나타낼 글이 없던 시대로부터 불완전하나마 한자를 이용한 향찰·이두 등의 방식으로 우리말을 표현한 고대국어 시대로 진입한 것은 우리 어문생활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진전이었다고 볼 만하다. 그러나 향찰이라는 것은 워낙 불편하고 불완전한 방식이었으므로 생각과 느낌을 섬세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는 향가와 같은 시의 언어에서나 제한적으로 이용되고, 학자나 스님들의 학문적 언어에서는 전적으로 한문이 쓰였을 것이다. 어쨌든 이 시대에는 소수의 지배계급과 지식인들만이 문자생활을 향유했을 것이고 절대다수 인민은 문자 바깥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훈민정음 즉 한글의 창제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는 데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동안 많은 분들이 문자로서의 한글의 과학성과 한글 창제사업을 주도한 세종 임금의 위민(爲民)정신에 대해 찬양해왔는데, 한글의 혜택 속에 사는 사람으로서 자랑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하지만 한글 창제의 역사적 배경을 좀더 냉정하게 따져보는 것은 편협한 감정상의 애국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일찍이 강만길 교수는 「한글 창제의 역사적 의미」(『창작과비평』 1977년 여름호)라는 글에서 한글 창제의 역사적 배경으로 14세기 몽골 침입과 원나라의 고려 간섭을 주목한 바 있다. 외세의 침입 앞에 지배계급의 무능이 드러나고 백성들이 점점 현실에 눈을 뜨게 됨에 따라 새로 출범한 조선왕조의 지배권력은 이제 “백성들을 문자생활권 안으로 넣어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 그러니까 훈민정음은 단순히 통치자의 시혜가 아니라 “백성세계가 스스로의 자의식을 높여감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전리품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 그의 논지였다.

『한국어』에서 임형택 역시 13~14세기의 세계사적 변화를 주목하지만, 변화를 읽는 관점은 상당히 다르다. “원나라는 광대한 지역의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통합해 그야말로 대제국을 형성하였고 그에 따라 역사상 전에 없던 문명이 소용돌이”치게 되었던바, 고려 말의 문인과 지식인들은 “문명전환의 약동하는 기운을 직접 체감하게” 됨으로써 이전 시대와 완연히 구별되는 새로운 “문명의식과 동인의식(東人意識)을 각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왕조 건국의 주역인 이 사대부계급의 각성된 의식으로부터 “피어난 꽃이 훈민정음”이라고 임형택은 해석한다.(임 41~42)

강만길은 외세의 침략을 당하여 솟아오른 민중역량의 성장을 강조한 셈이고 임형택은 조선 건국의 주체세력인 사대부계급의 이념적 각성에 무게를 둔 셈이다. 조선 초기의 문화적 업적을 낳은 배경으로서 시대의 문명사적 전환에 주목한 흥미로운 해석들이다. 하지만 몽골 침략이 유럽에서 중세적 질서의 붕괴에 단초를 제공한 충격이었음에 비하면 동아시아에서 그리고 조선 땅에서 그와 같은 의미의 근본적인 역사적 전환의 계기로 작용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동아시아에서 명(明)과 조선의 건국은 어떤 뜻에서 중세적 질서의 재정비였기 때문이다. 역사적 배경이야 어찌 됐든 한글의 창제 자체는 ‘중국과 다를뿐더러’ 한자로는 원천적으로 표기할 수 없는 우리말을 거의 ‘말하는 그대로’ 문자화할 수 있는 위대한 가능성의 현실화였다.

 

 

3

 

조선 초기의 일부 신진사류들이 세종의 뜻을 좇아 훈민정음의 창제에 참여했지만, 알려져 있다시피 기득권 사대부들 대부분은 훈민정음 반포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 까닭은 그러나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반대론의 대표로 알려진 최만리(崔萬理)의 상소문을 보더라도 그는 새로 만들어진 문자의 ‘신묘함’에 감탄하면서도 그것이 기존 중화중심적 문물제도로부터의 이탈이라는 위험임을 직감했던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한번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로 가는 모험이자 “소위 세계사적으로는 중세공동문어”(백 43) 체제에서 벗어나는 혁명이었다. 이와 같은 기득권 지배세력의 반대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또다른 사회정치적 요인이 있었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근대 이전의 어문생활은 한문이 주(主)이고 언문이 종(從)인 “이중문어체계”(최 46)였다. 이 책에서는 덜 주목받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임진·병자 양란의 외세침략을 계기로 자발적 의병운동이 일어나듯 양반 부녀자들 속에서뿐 아니라 일반 민간인들 사이에서도 언문사용이 확산되고 비록 익명으로나마 다수의 언문소설이 창작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차후의 근대적 글쓰기 실현을 위한 매우 중요한 준비였다.

알다시피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패권체제가 붕괴되는 시기에 이르러 드디어 우리의 어문생활에도 혁명적 전환이 일어났다. 갑오경장시 정부가 공포한 “법률 칙령은 모두 국문으로 본을 삼고 한문번역을 붙이며 국한문을 혼용함”이라는 규정은 “중국 중심의 어문생활에서 탈피한 자국의 독자적인 어문생활”(임 42)의 개시를 의미했다. 하지만 이 규정은 사실상 거의 지켜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임형택의 말처럼 독자적인 어문생활이란 한자/한문을 “안 쓰면 그만인 그런” 단순 차원을 넘어 “지극히 어렵고 복잡한 문제가 수반되”(임 43)는 역사적 과업이다.

그런데 한국·일본·베트남 등 한자문화권이 중세 공동어문체계에서 벗어나 근대적 어문생활로 진입하는 데는 서양과 달리 복잡할 수밖에 없는 독특한 이유가 있다. 백낙청의 지적처럼 “서양에서는 일부 그리스 문자라든가 슬라브계 문자” 같은 변종이 있어도 “문자와 공동언어의 문제가 동시에 제기된 건 아니”기 때문에 “공동문어를 포기하더라도 공동으로 쓰던 문자로 자국 고유의 언어를 표기하면 됐”지만, 동아시아에서는 “한자가 중국어를 모르는 사람도 쓸 수 있는 표의문자다보니 근대로 전환하면서 한문세계에서는 벗어나더라도 한자는 어떻게 할지의 문제가 남았”는데,(백 43) 이것이야말로 한자어휘의 절대적 비중을 고려하면 한글로 글쓰기의 핵심적 난관의 하나이다. 어떤 점에서 한국은 한자 혼용이 정착된 일본이나 한자 대신 로마자를 채택한 베트남의 경우에 비할 때 가장 독창적인 자기 문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도리어 가장 힘든 길을 걷는 중이라 할 수도 있다. 물론 그 험로를 성공적으로 걸을 때 얻게 될 문명적 소득도 비할 바 없이 더 클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4

 

근대 초기에 국문체와 국한문체의 이중적 문어체계가 성립됐다는 데는 이론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전래의 한문체도 일부 계층에서는 여전히 엄존하고 있었으므로 아마 한동안은 삼중체계였을 것이고, 식민지시기에 들어와 학교교육과 대중매체를 통해 일본어가 지배자의 언어로 보급되고 다수의 일본인 이주자들이 한국인과 섞여 살게 되면서(1920년 17만이 1940년경 70만 정도로 증가했다고 한다) 우리의 언어현실에는 또다른 문제가 발생했을 것이다. 아무튼 국문체 『독립신문』(1896)보다 2년 늦은 “『황성신문』이 국한문혼용체로 발행되고 이어 잡지나 교과서 등 속속 발간되는 계몽적 출판물들도 국한문혼용체”(임 50~51)였던 점, 심지어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H. B. Hulbert)가 지은 한글본 세계지리서 『사민필지(士民必知)』(1889)는 몇해 뒤 거꾸로 한역(漢譯)되기도 했던 점을 보면, 애국계몽기의 과도적 현상답게, 임형택의 지적처럼 독자들이 아직 순수 국문체를 따라주지 못했거나 국문체에 대한 한문세대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거나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3·1운동 이후 1920년대를 지나는 동안 국문체/한글체는 되돌릴 수 없는 대세로 되었다.

내 생각에 1920년을 전후한 글쓰기 문체전환에 있어 결정적인 발전의 하나는 “20년대 이전과 이후의 국한혼용문은 질적으로 많이 다”르다는 것, “20년대 후부터는 국한문이라 하더라도 문체상 순국문과 거의 차이가 없고 단지 국문 문장의 한자어에 한자를 쓸지 말지가 문제”(최 47)로 되었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다시 말해 19세기 말 그리고 20세기 초 애국계몽기의 국한문체와 3·1운동 이후의 국한문체는 외관상 비슷해 보여도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 점을 가장 간명하게 보여주는 실례가 이 책에도 인용된, 『개벽』 16호(1921)에 실린 「투고하시는 이에게」이다.

 

文體는 꼭 말글로 써주셔야 되겟습니다. 비록 國漢文을 석거 쓴다 할지라도 漢文에 朝鮮文으로써 吐를 다는 式을 取하지 말고 純然한 말글로써 씀이 조켓습니다. 例를 들어 말하면 「一葉落而天下知秋」라 하면 「一葉이 落하야 天下가 秋됨을 知한다」 함과 가티 쓰지를 말고 「한 닙이 떨어짐을 보와 天下가 가을됨을 알겟다」라고 씀과 가틈이외다.(83면)

 

한자를 배우지 않은 세대에게는 이 ‘권고문’이 물론 읽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이 오늘의 독자에 순탄하게 다가오지 않는 데는 한자가 섞여 있다는 것 이외에 다른 두가지 방해요소가 더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는 ‘석거 쓴다’ ‘조켓습니다’ ‘가틈이외다’ 등의 표현이 ‘섞어 쓴다’ ‘좋겠습니다’ ‘같음이외다’ 같은 표기법에 길들여진 오늘의 시각에는 낯설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둘째, ‘가을됨을 알겟다’가 ‘ 秋됨을 知한다’에 비해 한걸음 나아간 문체임은 분명하지만, 그렇게 나아간 문체를 권유하는 문장 자체도 오늘의 독자로서는 맞춤법에 어긋나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로 매우 어색하다는 점이다. 가령 오늘의 독자라면 당연히 ‘吐를 다는 式을 取하지 말고’ 대신에 ‘토를 다는 식으로 하지 말고’와 같이 써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이렇게 따져보면 위의 권고문 안에는 소박하나마 근대적 글쓰기의 완성을 위한 ‘3대 과업’의 문제점이 압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과업이란 어떤 것인가.

첫째는 국문 표기방식을 일정한 원칙에 따라 제도화하는 일이다. “한글이 창제 후 200~300년까지는 한글표기체계가 엄정하지 않아요. 언제부터인지 민간의 표기는 제각각이 되었던 겁니다.”(임 55) 그러다가 갑오경장으로 공문서를 국문 중심으로 작성하게 되고 언론계·종교계(특히 기독교)·학교 등에서 한글사용이 확대됨에 따라 “근대적 국가의 국민이 쓰는 글이라면 당연히 일정한 원칙과 기준이 제정되어야”(같은 곳) 한다는 자각이 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07년 정부기구 아래 국문연구소가 설립되어 이 일을 맡았다. 우리 말/글의 역사에서 한글 창제에 버금가는 위대한 사업이 합리적 표기법의 제정과 문법의 체계화라고 할 터인데, 그 첫 단계를 맡은 것이 이 국문연구소였다. “(국문연구소는) 상설기관은 아니었지만 설립 이후 주시경(周時經), 지석영(池錫永), 이능화(李能和)처럼 국문에 관심이 깊은 사람들이 모여 연구를 하고 국문표기의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그때의 연구내용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국어규범의 토대가 되었죠.”(최 53)

이로부터 몇단계를 거쳐 조선어학회는 “본음(本音)과 원체(原體)를 밝혀서 표기해야 의미전달이 명확해진다는”(최 66) 주시경의 주장을 계승하여 형태주의 철자법을 관철시킨 「한글마춤법통일안」을 1933년에 발표한다. 이 통일안은 ‘소리 나는 대로’ 적는다는 원칙에서 보면 상당히 까다로운 문법적 원리에 입각해 있어, 일반인들로서는 익히기 쉽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에나 그후에나 여러차례 논란의 대상이 되고 1950년대에는 사회적 분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통일안 발표 직후에 이미 대부분의 문인들은 이 안을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신문·잡지 등 출판물도 이 안을 따르기 시작한 데다 해방 후 학교문법으로 수용됨으로써 이제는 움직일 수 없는 어문원칙으로 정착되었다. 그럼에도 학생들 리포트나 문인들의 원고를 받아볼 때마다 맞춤법을 바르게 지키기 어려웠음을 절감한다. 더구나 띄어쓰기는 각인각색이다. 그러나 이런 얼마간의 혼란은 어느 나라의 어문생활에나 으레 따르는 법이고, 어쩌면 그것이 언어의 활동성을 입증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여하튼 “국어표기법이 더 정교해지고 다소 어려워지는 것은 불가피하고 또 필요한 일이라고 봐요. 주시경 선생의 형태주의 맞춤법은 아주 옳은 방향이었다고 생각합니다”(백 73)라는 의견에 대부분 공감할 것이다.

둘째는 읽기에 자연스러운 국어문장의 개척이라는 과업, 즉 입말에 가까운 글말의 정착이다. 물론 “언문일치의 문장이 반드시 구어를 그대로 구현한 것은 아니”고 “구어를 문어화할 때도 문어의 특징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최 90) 사실 우리는 고대, 중세는 물론이고 백년 전, 이백년 전의 우리 선조들이 일상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언어를 말했는지 알지 못한다. 언문소설, 서간문 및 「한중록」 등 조선 후기의 문헌에 문자화된 국어가 얼마나 실제의 발화된 구어를 반영하는지도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문어체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서 ‘…했다’체 종결어미가 20세기 초에 보편화된 것은 확실하지만, 그 내력에 관해서는 깊은 연구가 없다. 『혈의루』(1906)에 쓰인 이인직의 신소설 문장은 음독·훈독을 하는 일본어 문장을 본뜬 괴기한 형태인데, 이 문체가 이인직 이외에도 쓰인 적이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김영민 교수는 이를 ‘부속국문체’라 부르는데, 이것이 널리 인정된 명칭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문학제도 및 민족어의 형성과 한국 근대문학(1890~1945)』, 소명출판 2012 참조)

정승철은 “최근에 『매일신보』에 실린 「무정」 원문을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근대 문체라고 얘기되는 것의 상당수가 그에 의해서 시작된 게 아닐까 생각”한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정 84) 근대 소설문장의 전개에 남긴 이광수의 선구자적 공헌을 인정하는 데는 나도 이의가 없지만, 『바로잡은 ‘무정’』(김철 교주校註, 문학동네 2003)에 따르면 「무정」은 1917년 신문에 연재되고 나서 작가 자신의 교열을 거친 단행본이 이듬해에 나왔고 그 뒤 해방 전에만도 여덟차례나 출판사를 바꾸어 간행되었던바, 그때마다 작가 또는 출판사의 손질이 가해졌다고 한다. 그러니 근대 소설문체의 발전에 끼친 이광수의 업적을 따지는 작업은 그 자체도 만만치 않지만, 동시대 다른 작가들과의 상호영향 및 출판업자의 상업주의까지 살피는 복잡함이 거기 더해진다. 염상섭의 문제작 「만세전」은 1922년 「묘지」라는 제목으로 연재되다가 중단되고 1924년 개작을 거쳐 지금의 제목으로 완성되었고 해방 직후 다시 개작되었다.(이재선 「일제의 검열과 ‘만세전’의 개작」, 『문학사상』 1979년 11월호 참조) 그런데 이광수나 염상섭이나 둘 다 열네댓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거기서 중학과 대학을 다니면서 문학을 익혔다. 그런가 하면 정지용은 일본 유학 중에 쓴 시 「카페 프란스」를 유명한 시잡지 『근대풍경』(1926.12)에 일본어로 개작 발표하여 유망신인으로 떠올랐는데, 이 무렵 그는 우리말로 먼저 썼다가 일본어로 옮기기도 하고 반대로도 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정지용은 자신의 시적 인식과 언어적 감각에 가장 적합한 문체를 발견하기 위해 한국어와 일본어 사이에서 치열한 고투를 벌였고 최종적 선택이 어린 시절부터 익숙한 모국어였던 것이다. 일본에 유학했건 국내에서 공부했건 일제강점기 문학수업을 일본어 작품으로 시작한 대다수 문인들에게 자연스러운 우리말 문장을 쓰는 것은 첩첩산중의 험로를 뚫는 지난한 투쟁이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셋째는 외래어의 표기 문제이다. 한자어도 출발은 외래지만, 오랜 세월 동안 우리말에 섞여 동화되었으므로 따로 취급된다. 다만, 한자의 처리 문제는 한글전용(론)과 한자혼용(론) 간의 대립으로 논쟁이 이어지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대부분의 대중매체와 출판물들이 한글전용에 가까워지면서 병용(倂用)으로 기울고 있다. “민족주의가 아닌 민주주의적인 원칙에서 병용이 더 적당하다는 생각”(백 105) 때문에도 그렇지만, 그 방식이 현실의 필요에 가장 잘 부응하기 때문에 대세를 이루었을 것이다. 다만, 일상의 어문생활에서와 달리 학교교육에서는 일정한 수준까지 한자를 가르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우리가 영어교육에 들이는 공력과 비용을 생각하면 한자혼용을 않고도 초등학교 때부터 한자를 가르치는 건 별것 아니에요”(백 107)라는 주장에 이의를 달기 어렵지 않은가.

그러나 한자어 이외에 근대전환기 이후 들어온 서양발 외래어의 표기는 간단치 않은 문제이다. 현행 표기법의 기원은 1940년 조선어학회가 발표한 ‘외래어표기법통일안’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는데, “외래어를 한글로 표기함에는 원어의 철자나 어법적 형태의 어떠함을 묻지 아니하고 모두 표음주의로 하되, 현재 사용하는 한글의 자모와 자형만으로 적는다”는 것과 “표음은 원어의 발음을 정확히 표시한 만국음성기호를 표준으로 하여, 만국음성기호와 한글과의 대조표에 의하여 적음을 원칙으로 한다”는 통일안 총칙에서의 규정은 80년이 지난 지금도 유지되는 원칙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의 문장에서 보아왔고 여전히 겪고 있듯이 혼란은 원칙대로 정리되지 않고 있다.

대표적인 논란의 하나는 동일한 음성기호(t, p 등)가 프랑스어나 이태리어 등 라틴계와 러시아어 등 슬라브계에서는 된소리(ㄸ, ㅃ 등)로, 영어나 독일어 같은 게르만계에서는 거센소리(ㅌ, ㅍ 등)로 다르게 발음되는데, 우리 표기법에서는 양자를 구별할 수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괄해서 영어식을 따른다는 것이다. ‘빠리/파리’, ‘이딸리아/이탈리아’가 흔히 예시되지만 후자의 경우 ‘이태리’도 못지않게 자주 쓰인다. 이와는 경우가 다르지만, 알프스에서 발원하여 여러 나라를 흘러 지나가기 때문에 각 나라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강 다뉴브(영어) 또는 도나우(독일어), 독일식 이름 아우슈비츠로 악명이 높은 폴란드의 오시비엥침, 본명 베네찌아보다 더 유명한 영어명 베니스 등과 같은 예는 수없이 많을 것이다. 이 혼돈의 양상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어긋난 현실을 수용하고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한국인의 발음능력과 한글의 강점을 발휘하여 고쳐나갈 것인가, 이것이다. 물론 원칙은 “현재 사용하는 한글의 자모와 자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원어의 발음을 정확히 표시”하는 최초의 규정을 지키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 지구상에는 영어 발음과 프랑스어 발음의 차이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차이들이 존재하고 한 나라 안에서도 인종적·계급적·지역적·문화적 차이에 따라 달리 발음되는 수가 많은데, 그 모두를 원음에 충실하게 한글로 나타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더욱이 북한이나 중국 조선족(연변지역)의 외래어 표기는 또다른 길을 밟아왔다. 가령, 남쪽의 ‘헝가리’를 북에서는 ‘마쟈르’로, 중국 조선족은 ‘웽그리아’(연변사회과학원언어연구소 『조선어소사전』, 2005), 중국 한족은 ‘시옹아리(匈牙利)’로 읽고, 우리 귀에 익은 중국의 ‘시 진핑’이 북한 방송에서는 여전히 ‘습근평’으로 말해진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갖가지 외래어·외국어들이 범람하고 있고 그것들의 표기 문제를 둘러싼 여러 방면에서의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힘을 가진 것은 각급 학교에서의 교육권과 각종 시험에서의 출제권·채점권을 장악한 국가이지만, 언어사용에 있어서는 국가가 대중을 이길 수 없다. 다른 분야에서도 그렇듯이 결국 대중의 선택이 역사의 선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