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형수

김형수 金炯洙

1959년 전남 함평 출생. 1985년 『민중시 2』로 시 등단, 1996년 『문학동네』로 소설 등단. 장편소설 『나의 트로트 시대』, 소설집 『이발소에 두고 온 시』 등이 있음. millemi@hanmail.net

 

 

 

맘 켕기는 날

 

 

1

 

어린 시절, 모교에 아주 우람한 노인네가 살았다. 내가 입학할 때 환갑을 맞은 느티나무. 혈통이 좋은지 거대한 장사의 골격을 하고 있어서 여섯명이 팔을 이어도 허리를 잴 수 없었다. 몸통에서 분수를 뿜듯이 솟구쳐 올린 수천개의 가지들에는 저마다 만국기 같은 이파리들을 매달아서 여름이면 하늘이 한점도 보이지 않았다. 땡볕이 나면 그 밑에서 애향단(愛鄕團) 조회를 하고 비가 오면 전교생이 모여 운동회를 할 정도. 가을 어떤 때는 사나흘 내리 낙엽을 퍼부어서 그 아래 서 있으면 하늘이 쌓는 무덤에 묻히는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시골학교 운동장이 그렇듯이 평소에는 텅 비는 날이 많았다. 언제나 그곳에 옷을 벗어두고 맨손체조를 한 후 어디론가 달리고는 했던 퇴역 마라톤 선수와 그 풍만한 젖가슴에 둥지를 튼 잿빛 왜가리만 이따금 부스럭거릴 뿐. 느티나무는 동네 조무래기들이 노는 것을 반겼을 것이다. 고요한 중생 두마리만 데리고 살기에는 너무 심심했을 테니까. 우리는 그렇게 믿었고, 퇴역 마라톤 선수도 우리가 싸우는 소리를 듣느라 잎사귀들이 쫑긋쫑긋 푸르다고 했다. 한번은 세상의 끝은 어디인가 하는 일로 말싸움이 났는데, 결말이 어떻게 났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세상의 끝이 있다는 데는 다들 동의해서, 이후 그에 대한 상상으로 또다른 다툼이 꼬리를 잇고는 했다. 너무나 멀어서 살아생전에는 닿지 못할 곳. 아득하고 낯설고 무서워서 사랑도 희망도 연민도 미치지 못하는 곳. 거기에 죽어서라도 가보고 싶다고 우기는 녀석도 있었지만, 나는 아니다. 오히려, 살아서 못 가는 곳을 죽어서 왜 가? 해서 분위기를 역전시킨 기억이 생생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의 한때에 그런 게 있었던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왜 오랫동안 잊고 살았을까? 그걸 유실한 건 언제쯤일까? 서른살을 기념하는 동창회 때 가보니 느티나무는 사지가 잘린 불구가 되고, 운동장이며 화단 언덕들은 난쟁이 나라의 그것처럼 조막만했다. 소인국에서 품었던 광활한 세계가 거인이 되면 사라진다는 것은 얼마나 역설적인가? 나는 그렇게 바보처럼, 세상 어딘가에 끝이 있으리라 믿었던 사실조차 까마득히 잊었다가 김대중인지 노무현인지, 에라 모르겠다만, 그런 누가 대통령을 하던 어느 때, 아주 우연한 곳에서 퍼뜩 그 사실을 떠올리게 되었다. 당시에 모처럼 시집을 내서 반응이 제법 좋았던 탓에 출판사라는 직장 따위에 연연하지 않았으니,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자리였다. 굳이 둘러대자면 배고플 때 받아준 직장에 대한 의리 같은 게 아니었을까? 하여튼 나는 사장님의 지시로 출장을 갔고, 거기서 맞은 첫 만찬 석상에 앉았을 때 누가 나를 발견한 인사를 이렇게 했다.

젊은 선생, 볼에 색시가 사는 걸 보니 시 좀 쓰겠습네다.

그러고는 위아래를 훑어서 명찰 하단의 생년월일을 보았던지,

하긴, 스물 넘어서 쓴 것도 시겠습네까?

놀라라. 오래전에 부서진 순정과도 같은 아련한 문학적 신파가 풍기는 사투리를 들어본 게 얼마만이던가? 나는 불의의 일격을 맞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순간에, 저 목소리는 아주 오래전에 내가 떠나온 곳에서 들리는 것이고, 그곳은 어린 시절의 느티나무 밑에서 상상했던 세상의 끝이라는 사실이 바람처럼 안겨왔다. 흔쾌히 맞지 않을 수 없었다.

옳아요. 세상의 끝을 잃어버린 사람도 시인인가요?

 

2

 

노파심에서 한가지 밝혀둬야겠다.

그 무렵이면 나도 신체 여기저기에 적잖은 연륜을 내장하고 있었다. 아랫배가 튀어나오거나 하체가 가늘어지는 따위. 허나 얼굴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세상에는 붉은 볼을 가진 사내가 없지 않지만, 나는 유독 심했다. 어려서부터 여럿이 있는 자리에서 방귀냄새만 풍겨도 혐의를 도맡아 썼다. 날 때부터 사교성이 부족한 유전자를 가졌든지, 아니면 타인의 눈길을 견디지 못할 만큼 면역성이 떨어지는 원인이 따로 있었든지……

물론 그게 나쁜 건 아니다. 진화론을 쓴 찰스 다윈은 인간의 얼굴이 붉어지는 이유를 수줍음의 감정에서 찾았다. 버제스도 『얼굴이 붉어지는 메커니즘과 생리학』에서 “인간이 자신의 도덕적 감정을 양볼에 표현하는 능력은 조물주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고, 나도 가끔 ‘타인에 대한 경배의 흔적’이라고 항변한다. 물론 지금은 다르다. 사람의 얼굴을 붉게 하는 것은 ‘켕기는 맘’이랄까? 정의하자면, 탈이 날까 마음이 불안한 상태? 아니, 가슴을 졸이게 하는 내면의 빛 한덩어리가 심장 근처에서 생명의 바깥으로 굴러떨어지려는 상태,쯤이라 해야 좋겠다.

어쨌든 나는 그 때문에 난처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대표적으로, 인도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입원해 계셔서 곧장 병문안을 갔던 일이 있었다. 참 유별난 장소였다. 사내에게 산부인과란 이교도의 사원처럼 생경한 곳. 문을 열자 호기심 어린 눈빛들이 콕콕콕 쪼아대는데 내 몸이 리트머스 용지가 되는 느낌이었다. 볼이 붉어지다 못해 폭발할 지경이더니, 나중에는 신열이 끓었다. 인도에서 한달 이상을 빈민굴에서 뒹굴었으니 몰골도 흉측할 텐데 거듭 콜록거리기까지 하는 바람에 어머니가 나를 끌어다가 의사 앞에 앉혔다. 그때 청진기를 든 의사가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이 흥분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쯥, 괴질이에요. 말라리아는 법정 전염병인데 어떡하나?

그건 발견된 병원에서 즉각 격리수용해야 하는 중대 보균자라 했다. 그 길로 나는 여자친구와 만나기로 한 약속도 어그러뜨린 채 무려 엿새하고도 꼬박 한나절을 산부인과에 억류되었다.

이제부터 전하려는 이야기도 그에 못지않은 가십거리에 속한다.

 

3

 

그해 초여름에서 이듬해 봄까지, 나는 도합 다섯차례를 북쪽에 다녀왔다. 출장치고는 독특해서 술좌석에서 내일 떠난다, 혹은 오늘 다녀왔다, 하면 깜짝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그렇게나 멀리? 나는 딱히 해줄 말이 없어서 그냥 얼버무릴 뿐이다. 명색은 해주인쇄단지 실무단 간사였지만, 남북협상단이 몇번째 만날 때 내가 합류했는지, 실무단을 그만둔 후에도 회담이 더 있었으며 향후에라도 사업이 성사될 여지가 있는지 그런 것은 모른다. 근자에 남북 왕래가 완전히 끊겼다고 들었지만 조국을 근심하거나 민족을 위할 만한 사명감도 내게는 없다. 오히려 그런 모자람 때문에 소소한 촌극들이 생기지 않았겠는지. 하지만 지금도 알 수 없는 것은, 나의 어디에 그렇게 흥미를 유발하는 요소가 있었던가 하는 점이다. 나는 끼자마자 남북 모두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

 

초여름

 

북쪽을 연상할 때 남쪽 사람들이 갖는 대표적인 오류 중 하나는 그곳을 지리적으로 판단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도 그랬다. 출발하는 날, 개성까지 가려면 고생스럽겠구나, 하면서 마포대교에서 형과 헤어졌는데, 북쪽으로 건너기 위해 휴대전화를 맡길 때 통화해보니 형은 겨우 잠실을 지나고 있었다. 그렇게 지척에서 남과 북이 매일같이 으르렁거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둘은 너무나 달랐다. 한쪽은 씨네마스코프에 한쪽은 흑백영화라, 비무장지대를 넘을 때 경계가 어디인지 새들도 금방 알아볼 만큼 표시가 난다. 북쪽은 나뭇가지 하나 성한 게 없었다. 산천초목까지 영양실조를 겪는 지독한 가난이라니.

넉넉히 3킬로면 족할 진공지대를 지나면 곧 북쪽이 시작되는데, 이는 문화충격을 해소할 만한 거리가 되지 못했다. 남북이 하는 일은 작은 사안에도 까다로운 규율을 지키지 않으면 110볼트의 가전제품을 220볼트에 연결했을 때처럼 망가지고 만다. 까닭에 실무단을 이끄는 대북전문가 이승재 선생도 거듭 강조하고는 했다.

내가 2년 전에 안내했던 단체에서 말요, 기적처럼 협상이 완료되는 순간 한놈이 외친 거야. 너무 기쁜 나머지, 대한민국 만세! 북쪽에서 뭐란 줄 알아요? 뭐, 어드래? 우리 민족끼리 잘하자 해놓구선 기껏 흡수통일이라 이거디? 순식간에 합의서가 휴지가 됐어요.

사정이 이러한 때문인지 이선생은 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식당 복무원(종업원) 이야기를 많이 했다. 얼마든지 수긍이 가는 일이다. 북측 CIQ(출입사무소)에서 검색대를 통과하고 십분도 안되는 거리에 개성공단 현대막사가 있다. 남쪽 차는 그곳에서 멈추고 북쪽 차로 옮겨서 느긋이 오분을 더 가면 선죽관이라는 식당이 나온다. 그 짧은 시간을 견디는 것은 그러나 얼마나 어색하고 긴장되는지. 이선생은 숱한 경험 끝에 그 시간을 여자 얘기로 때우는 게 가장 현명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북쪽 처녀들? 훈련된 언어로 주체사상이나 쪼르르 외우는 그런 이미지는 번지수가 한참 달라요. 우리와 접촉하는 게 대개 대졸들인데, 남쪽보다 북쪽이 학사 동거가 많단 말예요. 군복무가 칠년씩이라 동급생이란 게 다 오빠들이거든. 쉬운 말로 취업 전 가난뱅이가 결혼을 어떻게 해. 사회 진출할 때까지 예비부부로 버티는 거지. 물론 그러다 헤어지는 일도 부지기수고.

이렇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곳에 대해 내가 유일하게 생명감을 느낄 만한 것이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예쁘다는 서순아하고 김연정 이야기가 나오면 실무단은 모두 두 패로 나뉘었다. 나도 서순아 이름을 그렇게 해서 외웠다. 실물을 보니 과연.

첫날, 문 앞에서 여종업원 하나가 반갑게 맞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