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평 │ 시

 

환상과 실재

 

 

박형준 朴瑩浚

시인. 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춤』 등이 있음. agbai@korea.com

 

 

 

로트레아몽(Lautréamont)의 시집 『말도로르의 노래』(Les Chants de Maldoror)에는 ‘재봉틀과 우산’을 결합시키는 대목이 나오는데, 문학청년 시절에는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던 이 구절이 지금은 왠지 고전적으로 들린다. 어쨌든 서로 거리가 멀면 멀수록 충돌 효과가 커지는 동떨어진 대상들의 새로운 메타포의 효과가 내 머릿속에서는 최상의 모더니티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순간적인 착시 같은 것이었는데, 영화에서처럼 소리들이 일시에 소거되며 휴대폰에 대고 무어라 소리치거나 소곤대는 사람들의 입 모양, 귀 모양, 액정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눈, 빠르게 무언가 꾹꾹 눌러가는 손가락들이 어안렌즈 속의 세계처럼 과잉 왜곡되어 클로즈업된 채 전철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모두 모국어로 말하고 있었고 모국어로 문자를 송신하고 있었지만 나는 순식간에 이방인의 느낌 속에 빠져들고 말았다. 나만이 아니라 전철 안의 모두가 서로에게 이방인인 느낌 같은 것이었다.

―김선우 산문집 『김선우의 사물들』(눌와 2005)222면

 

외국에 체류하다 돌아온 시인은 고국을 비워둔 단 일년이란 시간도 놀라웠나보다. 모국어가 아닌 말이 주는 긴장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모국어에 대한 갈망을 채우려는 노력도 잠시, 전철 풍경은 일거에 그 향수를 걷어가버린다. 시인은 서두부터 프루스뜨(M. Proust)가 마들렌느 과자를 적셔먹듯, 휴대폰을 커피 한잔과 함께 먹어치웠으면 좋겠다고 도발적으로 말한다. 차에 적신 과자 한조각의 맛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여정이 되었듯, 커피에 적신 휴대폰에서 “어린 시절 종이컵 두 개를 실로 연결하여 만들었던 전화기”(같은 책, 225면)를 떠올리는 상상력이 돋보인다. 저편의 말을 헤아리기 위해서는 쫑긋거림과 숨결을 감지해야 하는 침묵의 언어가 필요하고 ‘낮은 무릎’으로 세상을 봐야 한다는 전언이 인상적이다. 밤이 되면 창틀에서 내려와 책상에 켜놓은 촛불을 보는 고양이와 그 고양이 눈을 응시하는 시인의 이야기는 얼마나 한없이 우리를 몽상의 세계로 이끄는가. 거기서는 여성도 남성도 식물도 동물도 모두 침묵의 아늑한 거처에 몸을 맡긴 채 서로의 눈 속에 타는 영혼을 깊이 빨아들이고 있다.

 

시인 김혜겸이 서상(書床)을 하나 선물로 가지고 왔다 헐어낸 고가에서 나온 구멍 숭숭 뚫린 널빤지를 정성스레 다듬고 네 귀에 나무못을 박고 가운데 서랍을 단 것이었다 도예가 이동욱이 만든 것이라고 했다 마루의 서쪽 벽면이 어울릴 것 같아 그 아래 두고 모시천을 깔고 작은 사발을 가만히 올려놓았다 흰 그늘 같은 것이 흐르는 듯했다 다음날 아침에 보니 어디로 갔는지 사발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검붉은 기가 도는 갈색 꽃병을 올려놓았다 그것 역시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시집을 한 권 올려놓았다 시집도 행방을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서상(書床)은 저 홀로 제시간에 흘러가는 어둠을 보고 싶은 듯했다 그리고 여러 날들이 지나갔다 우수도 지나가고 청명도 지나갔다 한식이 내일모레라는 날 나는 시를 쓰려고 이층 서재에서 파지를 수십 장 버리다가 작파하고 한밤에 층계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려갔다 나는 마루로 내려갔다 놀랍게도 마루에는 물과 같은 시간이 넘실거리면서 가고 있었다 서상(書床)은 시간 위에 둥둥 떠가고 있었다

―최하림 「서상(書床)」(『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 랜덤하우스 중앙 2005) 전문

 

현대시에서 환상과 이미지는 우리들의 현실보다 더 실제적이다. 시인들은 이제 붉은 혈액을 수혈받는 대신 환상과 이미지를 링거액처럼 공급받기를 더 좋아한다. 이민하의 시집 『환상수족(幻想手足)』(열림원 2005) 해설에서 김수이(金壽伊)가 “환상계로 통하는 문은 발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발명’해야 할 대상”이라고 한 것은, 현대시에서의 환상의 의미에 대한 탁월한 지적이다. 서정시가 일상적으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기억과 현실을 결합할 수 있는 정지된, 그래서 영속화된 이미지를 ‘발견’하는 데 주력한다면, 젊은 시인들의 시에 나타나는 환상계란 매일 밤 새로운 이야기를 꾸며내야만 목숨을 보장받는 아라비안나이트의 세헤라자데의 운명과 비슷하다. 그래서 서정시가 꿈꾸는 기억과 근원에로의 회귀가 ‘정지의 미’를 꿈꾸는 데 비해, 환상시란 애당초 본질이 존재하지 않으며 미래만이 계속되는, 그 미래조차도 영토화가 되려는 순간 ‘발명해야 할 대상’인 가능성의 영역으로 미끄러지는 차연(差延)의 세계이다.

환상적 요소를 시에 적극 도입한 이민하의 시집에서 「나비잠」의 화자는 밤마다 화자를 대상화시킨 ‘몸뚱이’에 투입되는 ‘바람의 링거액’을 체크한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몸뚱이를 간호하던 화자 자신도 몸뚱이와 마찬가지로 벽을 부여잡은 채 고치처럼 눕는다. 우리들이 몸담고 있는 현실은 이제 우리의 몸과 정신을 치유해주고 이상을 제시해주기에는 너무 늙어버렸다. 가령 80년대 이성복이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그날」,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고 말한 것은 그 시효를 다했다. 이제 젊은 시인들은 그러한 명령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아프지 않다’는 이 말에는 현실에서 아픈 것을 발견하고자 하는 치열한 역설적 표현이 들어 있고 그러한 각성이 시인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망가진 현실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가족과 기억으로 돌아가게

저자의 다른 글 더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