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황현진 黃玄進
1979년 경북 선산 출생. 2011년 문학동네작가상으로 등단.
소설집 『해피 엔딩 말고 다행한 엔딩』, 장편소설 『죽을 만큼 아프진 않아』 『두 번 사는 사람들』 『호재』, 중편소설 『달의 의지』 『부산 이후부터』 등이 있음.
flyto-u@daum.net
망조
엄마가 병들었다.
의사의 진단에 따르면 폐에 지름 5센티미터 크기의 종양이 있고, 이미 림프샘으로 전이되어 양쪽 겨드랑이까지 다 퍼진 상태였다. 어디까지나 사진으로 봤을 때 그러한 것이고, 이런 경우 막상 몸을 열어보면 훨씬 더 많이 있다고도 했다. 거기까지 듣고 나서야 나는 의사의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받아 적지 못한 게 후회됐다.
엄마는 연신 피식피식 웃는 소리를 냈다. 보란 듯이 한쪽 팔을 높이 들어 올려 겨드랑이 언저리를 찬찬히 더듬었다. 결코 의사의 말을 믿지 않겠다는 속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잰 체하는 듯 보여서 나도 모르게 의사의 눈치를 살폈다. 의사는 그런 엄마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크기는 작지만 개수가 많은 편입니다”라고 덧붙였다. 굳이 만져볼 것까진 없다는 투였다. 불쾌한 심기가 역력해 보여서 얼결에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내가 어쩌다가 아무 때나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발하게 되었는지, 어쩌자고 감사하지 않은 마음을 거꾸로 말하는 버릇을 가져버렸는지, 그간에는 전혀 알아채질 못했다. 솔직히 내 나름대로는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정도로는 살고 있다, 생각했다.
엄마는 단박에 상처받았다.
나는 어떻게든 만회해보려고 뒤늦게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졌다.
“고작 일년 만에 이럴 수도 있습니까?”
최대한 정중하게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었다. 아, 아디다스. 대단히 중요한 걸 기억해낸 사람처럼 나는 혼자 중얼중얼했다. 불가능은 없다, 결의에 찬 목소리로 떠들어대던 광고의 슬로건을 폐암의 병기를 따지는 의사의 입에서 다시 들을 줄이야. 게다가 그는 우리를 위로하거나 격려할 마음이 전혀 없는 듯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한때 모두의 정신을 고취시켰던 그 문장을 병기의 경과를 설명하는 데 바칠 리가 없었다.
임파서블 이즈 나씽, 십여년 전 아디다스의 그 광고 문구가 온갖 지면과 매체를 도배하고 도처에서 들려오던 때, 아버지가 죽었다. 엄마와 나는 쫓겨나듯 마산의 중심가에서 변두리로 이사했다. 몇년 후, 마산시는 인근의 창원과 진해와 통합되었다. 셋이 함께 살던 동네는 창원 변두리의 구도심 취급을 받으며 서서히 쇠락했다. 엄마는 모두가 함께 망해가고 있다며 안도했다. 이만한 평화가 없다고도 했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업을 핑계로 서울에 가겠다 고집부릴 때도 엄마는 기꺼이 혼자 남고자 했다. 도시의 쇠락과 자신의 노화를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연이자 운명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엄마는 도로명 주소를 알려달라는 이런저런 요청이 있을 때마다 일부러 폐지된 주소로 답하고, 자신이 창원 아닌 마산 사람임을 자랑하듯 강조하면서 도시 전체를 제집처럼 아꼈다.
“이미 혈관을 타고 몸속을 몇바퀴나 돌았을 겁니다.”
의사는 모니터에 띄운 폐 사진의 말단을 볼펜으로 톡톡 치며 말을 이었다. 장기 곳곳에 침투했을지 모를 암세포의 기세가 앞으로 얼마나 더 대단할지 제대로 알아두라는 뜻 같기도 했다. 몸의 오장육부가 손안에 있다고 믿는 엄마는 붉은 기가 도는 손바닥을 쫙 펼쳐 보였다. 의사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쓱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아무것도 없다니요, 선생님. 이 손에 사람의 전부가 들어 있는데요.”
엄마가 손뼉을 짝짝 치며 코웃음을 쳤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엄마는 대체로 건강했다. 겨울마다 감기를 호되게 앓긴 했지만, 몸이 크게 축난 적도 없고 병원 신세를 진 적도 없었다. 일년 전 건강검진에서도 주의하거나 치료가 필요한 문제랄 게 전혀 없었다. 평균에 가까운 정상 수준, 검진을 담당했던 의사의 말로는 분명 그러하다 했다.
“제 몸은 제가 잘 압니다. 그만큼 아프지는 않았습니다.”
“원래 이 병은 징후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 앞에서 지나치게 담담하게 구는 사람들을 숱하게 봤지만 이렇게까지 무정한 얘기는 처음이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던 의사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의사에게 밉보여선 안 될 것 같아 참은 건데 한편으로는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엄마를 위로하는 건 차치하고, 벌써 아픈 엄마를 돌봐야 하는 내 처지가 불쌍하고 서러웠다. 내가 먼저 위로받고 격려받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제때 위로받지 못한 설움이 나에게 아무 때나 아무에게나 고맙습니다, 고개 숙이게 만든 건지도 몰랐다.
기미랄까, 징조랄까. 이러다 망한다 싶은 예감과 이미 망했다는 불안에 휩싸여 갈팡질팡한 사람은 언제나 나였다. 이만하면 정상, 엄마가 건강검진의 결과를 뭉뚱그리며 알려왔던 일년 전 그맘때, 나는 직장을 잃었다. 웹디자인 전문회사였는데, 어느날 갑자기 전직원이 해고를 당했다. 투자자의 변심이 파산의 이유였다. 꾸준한 흑자에도 불구하고 수익률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고, 고로 장기적으로 투자할 만한 가치가 떨어진다는 게 투자자의 판단이었다.
그달에 전직원의 월급이 절반으로 삭감되었다. 그뒤 사장은 두달을 못 버티고 조만간 사무실을 정리하겠다고 했다. 버릴 건 버리고 가져갈 만한 것은 가져가라고도 했다. 다른 직원들이 태블릿과 PC를 트렁크에 실을 동안 나는 냉장고에 남아 있던 간식과 음료들을 조금씩 가방에 넣었다. 사장이 하라는 대로, 버릴 건 버리고 가져갈 만한 것은 죄다 챙겼다.
사장은 좋은 사람이었다. 자신의 인맥과 정보를 총동원해가며 직원들의 이직 자리를 수소문하고 다녔다. 자기도 빈털터리 신세이면서 직원들의 안위를 먼저 챙기는 모습은 뜻밖이었다. 그것 말고도 놀랄 일은 많았다. 투자자 한 사람의 마음에 따라 사업체의 경영과 존폐가 좌지우지되는 것도 충격적이었지만, 내가 가장 놀란 것은 사장이 생각했던 만큼의 부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투자자의 통장에서 사장의 통장을 거쳐, 다시 법인통장에서 내게로 이체되어온 월급의 경로를 알고 나니 뒤통수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사장이 딱하기도 했지만, 그간 괜히 사장의 온갖 뒤치다꺼리를 자처했다는 생각에 괜스레 미운 마음도 생겼다.
“해주씨 같은 사람이 일할 자리는 얼마든지 있어요. 요즘 세상은 참 이상해요. 능력있고 재능있는 사람들이 더 힘들게 살아요.”
공교롭게도 당장 이직 가능한 빈자리는 죄다 비서나 총무 직종뿐이었다. 그 자리에 마땅한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었다. 어떤 회사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무조건 가겠다고 했다. 무조건이라는 말이 맘에 걸렸는지 사장은 내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능력있고 재능있는 다른 직원들을 챙겨주지 못한 게 투자자의 변심보다 더 쓰라린 열패감을 안겨준 듯했다.
“고맙습니다, 사장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서운했다. ‘해주씨 같은 사람’이 대체 어떤 사람인지 따져 묻지 않은 것만으로도 도리는 다한 셈이었다. 끝끝내 나 혼자 먼저 가게 되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그래서 안 했다.
사무실의 가전과 가구들을 모조리 당근마켓에 내다 팔 무렵, 나는 이직했다. 이미 망했다 싶은 불안은 용케 떨쳐냈지만 이러다간 곧 망한다는 예후랄까 예감은 어딜 가도 따라왔다. 말하자면, 망조였다.
디지털콘텐츠퍼블리싱, 명함에 적힌 바로는 그런 일을 하는 회사였다. 첫 출근 날에 대표는 나를 업무지원팀에 새로 온 나해주씨라고 소개했다. 누가 나와 같은 팀일까, 기대하며 직원들의 표정을 살폈지만 남달리 반색하는 얼굴을 찾아볼 순 없었다. 업무지원팀의 구성원은 나 한 사람뿐이었다. 나를 뺀 모두가 경영기획팀에 속했다.
해주씨, 부탁 좀 할게.
누구라도 그리 말하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복합기 앞에 섰다. 쏟아져 나오는 문서를 모아 잡은 뒤 펀치로 구멍을 뚫어 오링을 끼웠다. 깐깐하게 구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링 제본을 해서 주고, 털털한 사람에게는 스테이플러로 찍어주기만 했다. 그 문서들을 파쇄하는 것도 내 몫이었다. 직원들의 휴가와 조퇴를 관리하고, 그들이 가져온 영수증을 스캔하고 숫자들을 엑셀에 저장하는 것도 내 일이었다. 그것 말고도 내가 할 일은 많았다. 대표의 책상으로 걸려 오는 전화를 대신 받아야 했고, 직원들의 출퇴근 시간을 일일이 수기로 기록해두어야 했다. 이전 직장에서는 절대 하지 않던 일이었다. 때때로 나는 혼자 사무실에 남겨졌는데, 그 또한 이전 직장에서는 없던 일이었다.
여기 직원들은 자주 자리를 비웠다. 작당이라도 한 듯이 나만 빼고 우르르 동시에 나간 적은 없지만, 한두명씩 나가다보면 어느새 나 혼자 덩그러니 있는 일이 잦았다. 그리 오래는 아니었다. 모두가 정해진 시간 안에 돌아왔다. 누구라도 두시간 넘게 자리를 비우면 외출로 간주하고 남은 연가일수에서 그만큼의 시간을 제하기 때문이었다. 누가 자리를 얼마 동안이나 비웠는지 그 시간을 재고 외출과 외근을 구분해서 근무기록지에 기재하는 사람도 나였다. 내가 사무실을 절대 비울 수 없는 이유이자 내가 종종 혼자 남겨지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모두가 제자리에 없으면 공교로운 기분이 들었다.
‘사무실에 혼자 남은 사람은 나인데, 왜 내가 무단으로 외출한 사람 같을까.’
묘하게 기분이 나빴는데, 그런 티를 내기도 뭣해서 그저 공교롭다 생각할 따름이었다.
실은 부끄러운 마음도 적진 않았다. 시간을 재고 있다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나는 온종일 다른 직원들을 힐끔거렸다. 정작 나를 곁눈질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나의 출입을 기록하지 않았으며, 나의 근무시간을 계량하지 않았다. 나의 근무기록지는 나무랄 데가 없었으나, 결재자인 대표조차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다.
뭐랄까, 나는 아무도 관리하지 않은 채로 천장에 매달린 구식 CCTV 같았다. 남의 잘못과 근태를 관리하는 일을 소홀히 했다간 나의 실수와 허물부터 먼저 들킬 수밖에 없는 구조여서 나는 열심히 일했다. 남들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것도 일상이었다. 잠을 줄이기는 어려웠다. 어떻게든 출퇴근에 걸리는 시간을 줄여야만 했다. 그러자면 집을 옮기는 게 최선이었다. 여기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