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최일남 崔一男

1932년 전주 출생. 1953년 『문예』로 등단. 소설집 『서울 사람들』 『아주 느린 시간』, 장편 『거룩한 응달』 『숨통』 『만년필과 파피루스』 등이 있음. namil1229@hanafos.com

 

 

 

멀리 가버렸네

 

 

돌아앉은 남자의 등은 삼십 중반에 벌써 시무룩해 보인다. 깔밋한 새 양복으로 서슬을 세운들 이미 늦다. 스포티한 티셔츠로 시퍼런 젊음을 위장한다고 첫눈에 들통난 인상이 가실까. 어쩌지 못한다. 몸 가운데 제일 넓은 평면적의 무표정은 둘째 치고, 관리나 조작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부위이기 때문에도 달리 손쓸 염을 못 낸다.

모르겠다. 그처럼 오갈든 배면과는 달리, 삼십 중반 남자들의 표면이 아직 청청하지 말란 법 없다. 꽃미남 소리를 듣던 얼굴에 나이가 시키는 차분한 여유마저 감돌면 금상첨화다. 턱끝의 보일 듯 말 듯 거뭇한 면도자국과 함께 무척 ]시할 터이다. 그러나 이면은 어느새 그늘지고 츱츱하기 마련이다. 웬만한 사물의 앞뒤 대칭관계에서 세상의 모든 뒤는 어차피 앞만 못한 것이다. 앞이 전진적인데 비해 뒤는 퇴행적이다. 영화(榮華)와 업신여김의 평행선이 줄곧 이어지는 가운데 사람의 뒷것들은 때문에 그예 섭섭하고 억울했을라. 보고 듣고 말하는 기능이 모조리 앞에만 붙어 있어 으밀아밀 불만을 속닥거릴 생각조차 못한 채, 숙명적 박해의식에 빠져 있을 공산이 크다.

뿐인가, 폭력이나 모멸 앞에 무력하든가 무안할 때는 앞뒤 구분이 따로 없어 그나마 괜찮다 하더라도, 매사에 속수무책인 뒤쪽은 상대적으로 훨씬 겁이 많다. 멱살은 같이 잡을 수 있되 느닷없이 덜미를 잡히면 경황없이 아찔하고, 가슴이 철렁한 것보다는 등줄기에 흐르는 식은땀이 더 무섭다. 볼기는 애무와 곤장의 이중성에 평생을 두고 떤다. 그 앞에 달린 것이 누리는 호사를 원망할 겨를 없이…… 깨진 무릎엔 머큐로크롬이라도 바르지만 오금이 저리는 데에는 약도 없다. 정강이는 걷어채고 종아리는 회초리를 맞는다는 점에서 비슷할망정 정강이는 맏아들보다 낫다는 소리라도 듣는다. 

이래저래 돌아앉은 남자의 등은 든든하고 환하기 어렵다. 사십 오십 육십에 다다를수록 휑한 적막에 잠기기 쉽다. 터진 꽈리 던지듯 가볍게 말하는 쪽이나, 몸의 어느 한구석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느낌 없이 수용하기 힘든 ‘어르신’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리. 

전후 사정이 아무리 그렇기로 일과 육신에 점점 물이 올라가는 삼십 중반을 대뜸 등시린 남자의 시발점으로 삼는 건 너무했다고 볼 수 있다. 당연한 불평인데, 누가 사람의 등에 투사된 음영을 등푸른 생선만도 못하게 자꾸 까내리고 싶겠는가. 

한마디로 야멸친 경쟁의 잔인한 속성과 무관하지 않다. 기껏 따라잡은 변화를 미처 소화하기도 전에 이제는 그게 아닌 저것이라고, 또다른 변화에 편승하기를 강요하는 속성재배 풍토가 젊은 중년의 양산을 도운 셈이다. 그런 과정에서 싹튼 잡다한 의식의 찌꺼기나 부하(負荷)의 누적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어야 산다.

하다가 생긴, 절정의 나이테를 보태면서 드러나는 일된 피로가 예전의 조로벽(早老癖)과는 다른 형태로 전염의 폭을 넓혀가는 추세다. 오십 정년에 삼사십대 사장님 등장이 상징하는 젊은 사회 출현은 아닌게아니라 환상적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성공·실패가 그 정도로 무지 빠르다. 따라서 삼십 중반에 무엇을 이루어도 이루어야 한다는 불안에 등떠밀려 눈가의 주름보다 먼저 둥글게 둥글게 눕는 어깨를 적잖이 목격한다. 앞에서 감당하고 남은 폐기물을 뒤로 넘겨야 할 만큼 추락에 대한 공포가 심한 탓이다.

그렇다면 돌아앉은 삼십 중반의 여자 등은 어떤가. 매우 다르다. 앉은 키의 높낮이나 모양새와 관계없이 상체를 떠받치고 있는 둔부를 기단(基壇)삼아 허전하지 않다. 볼륨이 빵빵하면 빵빵한 대로, 굴곡진 허리가 뚜렷할 만치 탱탱하면 탱탱한 대로, 남자의 등에 드러나기 쉬운, 일견 시무룩한 기색이 좀처럼 없다. 펑퍼짐한 앉음앉음과 더불어 무던히 좁은 안노인의 등은 하물며, 견디고 배긴 세월의 징표로 차라리 조촐하다. 

남과 여의 등에 나타난 첫인상을 굳이 나누자면 그렇다뿐, 일일이 대비하기 쑥스럽다. 여 쪽이라고 늘 신간(身幹)이 편해서 그럴 것인가. 아니다. 여자라고 들씌우는 담타기 때문에도 속에서 끓는 내출혈이 남 이상으로 분출 직전일 테다. 다만 그렇게 보일 따름이다. ‘이리 오너라 앞태를 보자. 저리 가거라 뒤태를 보자’고 했던 시절과는 동떨어진 차원에서 황금분할 비슷한 비율로 안팎 태에 마음을 쓴 결과 아니겠는가. 본래적으로 부드럽고 둥근 어깨선이 음전한 뒷모습을 거들어 애시당초 무주공산같이 폭폭한 남자의 등짝과 비교할 것이 못된다. 

얘기가 좀 빗나가는 감이 있지만 그와 같이 호의적인 묘사 속에는 18, 19세기 유럽 화가들의 회화적 엉덩이 예찬과 관련된 선입관도 끼여 있다. 규시(窺視)심리야 있고 없고, 꾸르베나 드가 등의 그림에 숱한 ‘목욕하는 여인’의 풍만한 엉덩이는 그 자체로 아름다움의 극치였으니까. 제목 한번 즉물적인 책 『엉덩이』를 보면 안다. 구석기시대에서 마릴린 먼로에 이르도록 여자의 엉덩이를 죄 등장시켜 인간해방의 관점에서 가닥을 잡아나갔다. 소제목의 하나인 ‘먹고 싶은 엉덩이’는 얼마나 당돌하냐. 역사가 따로 있나, 엉덩이도 모으면 역사지, 소리가 절로 나오게끔 만들었다.

하면, 먹는 나이를 따라 후줄근해지기 마련인 남자의 등은 그걸 받쳐주는 엉덩이가 별볼일 없어 더욱 그늘지는가. 그런 점이 없지 않다. 서양에서는 엉덩이가 작아야 성기의 볼륨이 크다고 했거늘, 착 올라붙었다가 축 내려앉은 물렁살을 의식하는 연배들은 족히 수긍할 것이다. 두부살에 인비늘마저 하얗게 떨어질 지경의 노년은 더더구나 아니라고 우길 염치가 없다. 섣부른 관찰에 무책임한 단언이 스스로 부질없지만 그같은 측면에서 또 말할 수 있다. 남자다운 기력의 원천이자 거처였던 뱃심이 이제는 힘의 저장, 방출, 조작이 한결 용이한 어깨로 옮아갔으며, 넓고 빳빳했던 어깻죽지의 점진적 위축은 뒤에서 볼수록 두드러진다는 것을.  

그야 어떻든 근엄하기 이를 데 없던 역사가 자질구레한 생활 속으로 다양하게 가지를 치는 현상이 흥미롭다. 등으로 역사를 새긴대도 시비할 것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과장이 심하거나 모호하다면, 역사의 뒤안이라든가 갓길에서 세상을 견딘 사람들의 자기 서술로 말을 바꾼들 상관없다. 쇠퇴한 기억력의 길고 짧음을 다투며 그들은 오늘도 별의별 이야기를 보고 겪은 만큼만 쓴다. 입으로 나눈다. 그런 예를 멀리서 찾을 것 무엇 있나. 천지간에 널려 있다. 

 

대충 어림하기로도 커피숍 손님이 여남은은 넘었으나 나는 금방 하총재를 알아보았다. 문을 열고 바삐 사방을 훑다가 발견했다. 그가 정면으로 앉아 있었다면 동문수학 이전 이후에 걸쳐 하도 신물나게 대해온 얼굴이기 때문에도 대번에 알아봤다는 따위 표현이 어색하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삐딱하게 돌아앉은 그의 등만 보고도 네가 너로구나 짐작한 까닭에 내 식별법이 남다르다는 뜻이다. 하총재는 다중 속에서 특히 그렇다. 앉거나 서거나, 가능하면 타인과의 면대를 피하려 든다. 뭬 그리 눈꼴신 것이 많아 티를 내지 않고는 못 배기는지, 가다가는 거꾸로 눈꼴사납다.

“어. 임당수.”

하총재는 보고 있던 신문을 접으며 나에게 눈인사를 건넨다. 임당수 소리가 조금 컸는가, 옆자리의 중년남녀가 흘깃거린다. 나이 지긋한 층에겐 ‘도리우찌’로 더 익숙한 내 헌팅캡 스타일과 당수의 이미지를 어떻게 꿰맞춰야 할지 헷갈리는 눈치다. 쑥스럽기는 내가 더한데, 세속적 가늠으로는 잠바차림인 하총재의 맵시도 총재 직함에 안 어울린다. 무엇보다도 장소가 틀렸다. 평일의 커피숍은 도대체 당수나 총재가 앉아 있을 곳이 못되기 때문이다. 

그처럼 거창한 호칭은 산행을 중심으로 자주 만나는 고향친구끼리 아무 근거 없이 멋대로 안긴 별명이다. 하 아무개, 임 아무개를 본래 이름대로 또박또박 부르느니 각계의 우두머리 직함을 따 호명하는 것도 심심찮겠다고 해서 하나씩 나눠쓴 감투이므로, 당수 총재 외에 장군 총리 의장 호칭 또한 없을 리 없다. 대통령만 빼고 다 있다. 물론 또래들의 회합 때에나 통하는 입감투인 까닭에 아무데서나 주고받을 것이 못된다. 따라서 이런 자리에서 불쑥 터뜨리면 피차 멋쩍다.

“근데 말야, 나 큰일 났어.”

“왜.”

열쩍은 장면을 눅이기 위해 불현듯이 꺼낸 것이 분명한 하총재의 말에 나도 얼른 달라붙었다.

“며칠 전부터야. 눈앞에 뜬금없이 하루살이가 날아다니지 뭐냐. 한여름이라면 몰라. 매화가 필 동 말 동 이른봄에 웬 하루살이?”

“한마리? 두마리? 갸들도 하루 빨리 세상구경이 하고 싶었던 게지.”

“장난이 아냐. 나중엔 파리로 변하네. 처음엔 엉겁결에 손으로 탁 잡으려고 나댔지 뭐냐. 알고 보니 일종의 착시래. 눈병이지. 그러니 그것들이 잡히겠어. 남들이 보고 비웃었을 거야. 병원에 갈래다 말았다. 저절로 가라앉는, 다 아는 질환이래서 아직 안 갔어.”

“너는 역시 여러가지 면에서 나보다 늦되고만. 이제사 그걸 겪다니.”

“머시라고?”

“산동(散瞳)이라는 거다, 그게.”

“산통이 아니고?”

“동공이 커지면서 생기는 현상인데 파적(破寂)거리로 좋지 머. 눈을 위로 치뜨거나 밑으로 까는 데 따라 춤추는 미물들의 고공 저공 비행이 재밌잖냐.”

“재밌기도 하겠다. 오래 가냐.”

“마음을 곱게 쓰면 석달 열흘, 지랄같이 쓰면 일년.”

“데끼!”

힐난하는 입과 달리 하총재의 눈이 안도의 기미로 넉넉하다.

“왜 나오랬냐.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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