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뫼비우스의 심층: 환상과 리얼리즘

 

 

윤지관 尹志寬

문학평론가, 덕성여대 영문과 교수. 저서로 『민족현실과 문학비평』 『근대사회의 교양과 비평』 『리얼리즘의 옹호』 『놋쇠하늘 아래서』 등이 있음. jkyoon@duksung.ac.kr

 

 

1. 환상적인 것과 리얼한 것

 

최근 들어 문학에서 환상의 요소가 중요한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환상을 정의하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지만,대개 그것이 리얼리즘이라는 말로 통칭되는 기존의 소설문법에 대한 비판이자 전복이라는 생각은 어느 정도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 두 항목은 단순히 적대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좀더 착잡하게 얽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령과 같은 존재는 상식화·규범화된 것의 경계를 벗어나 고정된 정체성의 범주를 위반하는 상상력의 힘을 보여주는 면이 분명히 있지만, 환상 자체는 그것이 개인적 정신활동이든 집단적 심리의 차원이든 우리 삶을 구성하는 한 요소임도 부정할 수 없다. 리얼리즘은 삶의 한 측면으로서의 환상적인 것 혹은 현존하지 않는 것의 세계에 열려 있어야, 상식에 지배되는 일상세계의 풍속화를 넘어 좀더 입체적이고 심층적인 삶의 실체에 도달할 수 있다. 문학 자체가 환상(fantasy)과 모방(mimesis)이라는 두 가지 욕구에 근거하고 있다는 발상에 따르면, 창조적 작품 속에는 현실을 모방하려는 충동과 주어진 현실을 벗어나거나 변화시키려는 충동이 공존한다. 모방을 떠나서 리얼리즘을 말할 수 없겠으되,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지향과 요구는 리얼리즘을 성립시키는 불가결한 요소이기도 하다. 문학에서 모든 환상이 변화의 욕구와 맺어져 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리얼리즘을 사실의 모사라는 식으로 좁게 이해하지 않는 이상 환상의 작용과 그것의 문학적 표현의 문제는 리얼리즘 논의에서 필수적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근대문학이 서구 현대문학의 주된 흐름과 구별되는 차이와 특수성을 보여준 것과 유사하게, 리얼리즘과 환상의 문제에서도 유럽이나 미국의 경우와 우리 문학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서양에서 리얼리즘이 전성기를 이루었던 19세기 소설의 경우, 가령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디킨즈나 브론테 자매, 프랑스의 발자끄나 플로베르, 러시아의 고골이나 도스또예프스끼, 그리고 미국의 호손이나 멜빌 등이 환상과 몽환을 사실적인 서사와 결합함으로써 근대적 삶의 양상을 총체적으로 그려내는 성과를 거두었다면, 한국 리얼리즘 문학에서는 환상의 요소가 리얼리즘의 깊이를 더해준 성취는 드문 편이다. 이는 현실에 대한 사실 차원의 접근조차 차단해온 정치적·사회적 요소들이 역으로 자연주의적인 묘사의 위력을 크게 요구하였고, 민중운동과의 좀더 구체적인 결합을 부추겼던 까닭으로 이해된다. 그리하여 환상과 심리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삶의 또다른 양상에 대한 관찰은 모더니즘의 배타적인 영역이 되어버리는 일종의 분리가 작품과 담론 모두에서 일어났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충돌이라는 틀이 근대성 이해에 유효한 것만큼이나 이 둘의 대립을 형이상학적으로 설정하는 관행을 혁파하는 과제가 우리 문학담론에서 중요한 시기에, 환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관계를 새롭게 모색하는 일은 이 과제를 수행하는 한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근자에 리얼리즘을 표방하는 작품들에서 환상의 요소가 서사 속에 뚜렷한 자리를 차지할 뿐 아니라 작가에 따라서는 거의 폭발적이라고 할 정도로 환상에 대한 경사가 두드러지는 현상은 주목된다. 이같은 변화를 대변하는 작가는 최인석(崔仁碩)으로, 최근 출간된 장편소설 『이상한 나라에서 온 스파이』가 그러하듯 그의 소설은 사실과 환상의 공존과 경계의 흐려짐, 변신과 초자연적 현상의 빈번한 활용 등 좁은 의미의 사실주의 기율을 통째로 위반한다. 최인석의 경우 최근작만이 아니라 90년대 후반부터 폭력으로 현상하는 사회적 모순과 어두움에 천착하면서 점차 환상성으로의 경사가 짙어졌고, 사회현실에 대한 격렬한 관심이 오히려 환상의 대폭적인 수용이라는 기법상의 혁신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하다. 이 못지않게 흥미로운 것이 한국 리얼리즘 문학을 대표해온 작가 중 한사람인 황석영(黃晳暎)의 장편소설 『손님』(창작과비평사 2001)의 새로운 시도이다. 역사적 진실에 대한 탐구를 유령들과의 대화와 병치하여 전통적인 소설구성의 문법을 교란하는 이 작품은 종래의 리얼리즘에 대한 의도적인 이탈로서, 작가 스스로 후기에서 “과거의 리얼리즘 형식은 보다 과감하게 보다 풍부하게 해체하여 재구성해야”(260면) 함을 피력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시도와 발언은 그 자체로서 이론적 해명을 요구한다. 최근 작품들의 성과를 점검하고 환상과 리얼리즘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는 일은, 리얼리즘의 갱신을 모색해온 90년대 이후 민족문학 논의의 연장선상에 있고, 근년의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을 새로운 지평 위로 떠올릴 계기이기도 하다. 이 글이 이 두 작가의 최근작들에 대한 논의만이 아니라 조세희(趙世熙)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내포된 어떤 원형적인 문제의식을 되짚어보고, 백민석(白旻石)의 『헤이, 우리 소풍 간다』와 같은 근래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성취와,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일종의 접경지대에서 현실과 환상의 문제에 천착해온 신경숙(申京淑)을 함께 거론하고자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 논의의 이면에 깔린 좀더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근자의 의미있는 문학적 모색들이 특히 죽음과 환상, 그리고 유토피아에의 강한 열망으로 점철되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에 있다. 물론 방현석의 중편 「존재의 형식」(『랍스터를 먹는 시간』, 창비 2003)이 그 한 예이듯이, 초월이나 비실재의 영역을 일절 끌어들이지 않고 견실한 구성으로 인간 내면의식의 추이를 포함한 삶의 복합적인 양상을 고찰해내는 단단한 성과도 산출되고 있으며, 이것은 환상의 도입이나 활용이 문학적 성취의 필요조건은 아님을 입증한다. 또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문학동네 1996)의 환상적 취향에서 시작한 김영하(金英夏)가 최근 장편소설 『검은 꽃』(문학동네 2003)에서 환상의 흔적을 말끔히 지우고 거의 전통적인 리얼리즘의 수법으로 역사적 사건의 실감을 살려내는 데 성공한 것도 흥미롭다. 그럼에도 리얼리즘 문학을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문학적·문화적 상상력에서 환상의 작용이 점차 강력해지는 정치적 맥락이 분명 존재하고 있는 듯 보인다. 환상적인 것과 실재하는 것은 삶과 사회의 두 대립양상으로 공존한다고 할 수 있겠으나, 환상이 허용되지 않는 세계가 무언가 억눌리고 폐쇄된 상황을 말해준다면, 환상이 지배적이 되는 현상 또한 그것대로 문제적일 터이다. 나로서는 문학담론과 실천에서 환상의 용도가 높아지는 것이 문화의 영역이 지배적이 되고 사물화가 깊어진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지만, 그런 점에서도 환상 그 자체를 천착하여 이루어지는 문학적 창조의 고투가 새로운 의미를 지니기도 하는 것이다.

 

 

2. 뫼비우스의 띠가 상징하는 것―조세희

 

환상적인 것의 팽배가 그 한 예이듯 최근의 문학 및 문화 담론에서 경계의 소멸 혹은 해체의 논리는 이론 차원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작품논의에까지 광범하게 퍼져 있다. 현실과 환상, 실재와 비실재, 혹은 존재와 부재 사이의 경계선이 흐려지면서 두 영역이 뒤섞이고 서로 침투하는 일종의 황혼지대에 대한 인식은 새로운 것이 아니나, 서구 해체론의 대세에 힘입어 우리 문학논의에서도 큰 영향력을 떨치게 된 것이다. 이분법적인 사고에 대한 해체로 특징지어지는 이같은 논리는 사물이나 인간을 불변의 실체로 이해하는 일체의 관념론을 거부한다는 잇점이 있다. 그러나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적 대립과 모순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흐리게 하고 현실의 구조 자체를 바꾸고자 하는 변혁운동의 존립근거를 아래에서부터 허무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는, 인식과 실천의 통합을 지향하는 리얼리즘론이 싸워내야 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이분법의 해체가 양날의 칼로 쓰인다는 것은, 현실과 환상이라든가 존재와 부재 같은 좀더 추상적인 대립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 지배자와 피지배자, 부자와 빈자 등 사회적인 내용들이 실리는 대립항이 그 대상이 될 때 더 뚜렷해진다. 대립의 영역들이 단단하고 고정된 실체로 존재한다는 관념에 대한 비판은 합당하지만, 모든 대립이 유동적이고 경계지을 수 없는 것으로 환원되는 순간 기실 해체의 계기 자체도 그와 함께 소멸되고 실천의 공간도 사라지고 만다. 모더니즘으로 분류되든 리얼리즘으로 분류되든 근대성에 대응하는 문학의 뜻깊은 도전에는 늘 해체와 통합이라는 두 활동이 공존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근대는 맑스의 말처럼 “모든 것이 녹아 없어지는” 해체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끝없는 해체만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구성하고 실현해온 가치의 지점들이 근대의 성취로 혹은 지향해야 할 탈근대의 기획으로 떠올랐던 것의 역사이기도 하다.1

근대의 이같은 복합적 속성을 담아내는 본격적인 문학적 성취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 70년대라면, 이 시대의 대표작 중 하나인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문학과지성사 1978; 이성과 힘 2000)이 안과 밖이 연결된 공간인 ‘뫼비우스의 띠’를 하나의 화두로 제시하는 것은 대단히 상징적이다. 안과 밖이 구별되면서 동시에 서로 연결되어 있는 ‘상상적’ 공간에 대한 관심이야말로 급격한 산업화의 와중에서 연출되는 해체와 통합이라는 근대적 드라마의 핵심에 닿아 있다. 이 연작의 서장에 해당하는 「뫼비우스의 띠」에서 교사는 학생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해답을 제시한다.

 

두 아이가 굴뚝 청소를 했다. 한 아이는 얼굴이 새까맣게 되어 내려왔고, 또 한 아이는 그을음을 전혀 묻히지 않은 깨끗한 얼굴로 내려왔다. 제군은 어느 쪽의 아이가 얼굴을 씻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교사의 해답은 다음의 두 가지다. ① 얼굴이 깨끗한 아이가 씻을 것이다. 상대방의 더러운 얼굴을 보고 자기도 더럽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② 두 아이는 똑같이 굴뚝 청소를 했기 때문에 한 아이는 얼굴이 깨끗한데 다른 아이의 얼굴이 더럽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학생들을 당혹스럽게 한 이 두 가지 다른 해답 사이에는 일종의 단절이 게재되어 있다. 즉 첫번째 해답은 두 아이의 심리적·내면적 층위(즉 안)에서의 반응으로, 서로 상대방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음에 반해, 두번째 해답은 두 아이의 심리적 상태와 무관하게 작용하는 사회적·정치적 층위(즉 밖)의 존재와 그 논리를 환기하기 때문이다. 상대의 얼굴을 자기의 얼굴과 동일시하는 아이의 심리기제는 타자에 비추어 자신의 정체성을 상상적으로 형성해낸다는 점에서, 사회라는 타자에 호명되는 과정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아이의 바깥은 내부에 들어와 안이 되고, 안과 밖 사이를 구별하는 계기는 소멸된다. 그러나 두번째 해답에서 안과 밖의 상상적인 동일시는 두 아이의 상황을 전체적으로 보는 시각에 의해서 깨어진다. 함께 굴뚝 청소를 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이같은 차이가 부조리함을 적시함으로써, 그런 결과를 초래한 현실의 모순이라는 기원을 소환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안팎이 연결된 평면 혹은 공간인 뫼비우스의 띠는 이중의 의미를 가진다. 한편으로는 안과 밖이 상상적으로 통합되어 있다는, 즉 주체가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제도화된 삶의 일부로 행복하게 편입되어 있다는 나르시시즘(혹은 반대로 주체의 소멸에 대한 공포감)을 유발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밖에 의해 지배되는 존재가 아니라 밖을 향해 나아가려는 주체의 해방과 실천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은유가 된다. 이와 같은 복합성은 근대성 자체가 해체와 통합의 이중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앞의 논의를 연상시킨다.

  1. 재작년 ‘모더니즘 논쟁’에서 황종연(黃鍾淵)이 필자의 ‘놋쇠하늘’ 이미지를 비판하면서 ‘액체근대’의 의미를 강조한 것은 의미있는 지적이나, 근대성을 ‘녹이는’ 것으로 이해하는 마샬 버먼(Marshall Berman)의 모더니즘론에 대한 전폭적인 의존이 그것대로 일면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황종연 「모더니즘에 대한 오해에 맞서서」, 『창작과비평』 2002년 여름호 253~54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