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조명

 

무라까미 하루끼와 동아시아의 역사적 기억

 

 

백지운 白池雲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 중국 현대문학. 주요 논문으로 「포스트모더니즘시대 중국지식계의 ‘문화’담론」 「현대 중국의 계몽주의 문학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등이 있다. jiwoon-b@hanmail.net

 

 

1. 감수성이 단절된 틈

 

1987년 『노르웨이의 숲』(ノルウェイの森, 한국어판 『상실의 시대』)이 발간된 후 최근에 이르기까지, 무라까미 하루끼(村上春樹) 소설은 전무후무한 판매부수를 기록하며 동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노르웨이의 숲』은 일본에서만 천만부 넘게 팔렸고, 한국에서는 출판계의 불황 속에서도 톱쎌러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루끼는 2000년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가장 영향력있는 작가로 자리잡았고 중국에서도 90년대 후반부터 출현한 ‘중산계층’의 문화적 욕망을 가장 잘 충족시켜주는 작가가 되었다. 『노르웨이의 숲』은 2001년 샹하이 이원(譯文)출판사에서 재출간된 이래 지금까지 22쇄를 찍었고 총 인쇄부수가 백만부를 넘어섬으로써, 문학서적의 평균 인쇄부수가 만부를 넘지 못하는 중국 출판계에 하나의 신화적 현상이 되고 있다.1

그런데 이런 수치적 성과보다 하루끼의 작품이 일국적 범위를 넘어 동아시아 전역에 걸쳐 거대한 문화적 ‘현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것도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라 80년대 말부터 10여년이 넘도록 동아시아 각지역에서 중단없는 연쇄바람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하루끼 소설을 읽은 동아시아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소설 속 인물의 의식은 물론이거니와 말투와 행동, 심지어는 복장까지 모방하는 이른바 ‘하루끼족’이 늘어나고 있다. 비교적 늦게 하루끼 열풍을 겪고 있는 중국의 어느 인터넷 기사에 따르면,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는 “너 하루끼 읽었니?”가 아니라 “너 하루끼 하니?”라는 대화가 유행한다고 한다. 인터넷이 생활의 일부가 된 시대에 우리 귀에 익은 광고문구 “Do You Yahoo?”처럼 하루끼는 이제 단순한 독서물이 아니라 신세대 도시남녀들의 일상적 욕망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루끼(의 인물)가 먹는 비프스튜와 스빠게띠를 먹고 캔맥주를 마시며 비틀즈와 재즈를 듣고 쿨하게 연애하고 싶어한다.

일본의 저명한 중문학자 후지이 쇼오조오(藤井省三)는 ‘노르웨이의 숲’현상이 일본을 기점으로 하여 한국–타이완–홍콩–샹하이–뻬이징으로 확산되는 것을, ‘시계방향으로 전개되는 현대 동아시아 공통문화’의 형성이라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노르웨이의 숲’ 현상은 각 도시별로 고도경제성장의 단계를 지나 과잉도시화와 인간관계의 격변이 일어나기 시작한 때에 맞추어 순차적으로 일어났다.2 그러나 이처럼 경제적·물질적 풍요로 인한 도시문화 성숙의 지표라는 다소 경제결정론적 방식은 이른바 ‘범동아시아 공통의 대중문화’ 현상을 설명하기에 충분치 못해 보인다. ‘하루끼현상’이 범동아시아적으로 확산되는 시간적 순서는, 대중의 문화감수성이 국경을 넘어 범지역적으로 동질화·보편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아르준 아파두라이(Arjun Appadurai)는 전지구화가 진행됨에 따라 국가를 기준으로 문화의 경계선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는 기존의 생각은 설득력을 잃고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문화에 대한 관념은 국경 내부의 종족적·민족적 정체성과 관련시켜 사고하는 데에서 현상의 한 국면 즉 이질적 영역과 접촉하는 상황이나 체화되는 정도에 따라 차이를 갖는 하나의 국면으로 이동하고 있다.3 그러나 ‘하루끼현상’을 동아시아에서 대중감수성의 동질화가 낳은 막연한 결과로만 볼 수는 없다. 그보다는 대중적 감수성이 내셔널하지 않은 보편적인 무엇을 상상하고자 하는 욕망의 근저를 하루끼가 건드림으로써 이른바 ‘하루끼현상’이 생겨난 데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수성이 단절되어 꺾이는 계기이다. 즉 대중적 감수성이 어떤 싯점을 계기로 보편적이고 무국적적인 것을 향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그 꺾임의 지점을 하루끼가 공략했다는 것, 그것에서부터 이른바 ‘하루끼현상’이 범동아시아적 대중 사이에 파급된 심층적 원인으로 접근할 수 있다.

하루끼의 독자들은 대부분 국적을 막론하고 자신이 하루끼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로, ‘그 분위기 자체에 공감’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분위기’란 『노르웨이의 숲』이 첫 출간된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까지는 허무한 것에 가까웠고, 2000년대에 그것은 다시 ‘쿨’한 신세대의 감각을 대표한다. 그렇다면 지난 10여년간 동아시아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대중들이 허무하고 쿨한 것에 자신의 감수성을 내맡기게 된 것일까. 생각건대, 그것은 동아시아 각국의 문단에서 한번쯤은 토론을 거쳤던 본격문학·엄숙문학의 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각국의 역사와 현실을 무겁게 다루는 문학이 대중에게 외면당하면서 본격문학과 통속문학의 경계가 무너지고 그 틈새로 허무하고 쿨한 것이 침입해들어와, 이른바 범지역적으로 균질한 감수성이 형성된 것이다.

말하자면 동아시아의 트랜스내셔널한 감수성의 동질화는 내셔널한 영역 안의 감수성의 단절을 거쳐서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감수성의 단절 속에는 일국적 역사와 기억을 대중적·문화적인 차원에서 처리하지 못한 상황이 내포되어 있다. 일례로 중국의 어느 일간지는 최근 중국에서 하루끼 소설이 유행하는 원인으로 90년대에 새롭게 형성된 ‘독자대중’에 주목한다.80년대까지 중국에서 독서란 맑스주의 이념을 신봉하는 작가지망생의 문학수업을 의미했다. 그런데 90년대에 이르러 문학수업이 아닌 여가선용으로 책을 읽는 신흥 중산계층이 생겨났는데, 문제는 이들이 찾는 ‘소비하기 위한 상품’으로서의 소설을 만들어낼 국내 작가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 공백을 메운 것이 바로 하루끼다.4 이러한 상황은 한국에서도 비슷하다.80년대 문학의 중심을 이루었던 민족·민중 이념이 지나간 자리를 치고 들어온 것이 하루끼였다. 말하자면 감수성의 단절은 각국의 인문학을 지탱하던 중심이념이 해체되는 순간에 일어났다.그리고 그 아노미의 공간을 차례차례 메워나간 것이 무국적성·무취성(無臭性)을 띤 하루끼의 소설이다.

따라서

  1. 林少華 「『挪威的森林』,永遠的靑春讀本」, 『中華讀書報』 2005년 7월 13일.
  2. 藤井省三 「中國·香港·台灣と村上春樹―都市現代化のメルクマ一ルとしての文學」, 『記憶する台灣―帝國との相剋』, 東京大學出版會2005, 178~85면.
  3. 아르준 아파두라이 『고삐 풀린 현대성』(차원현 외 옮김), 현실문화연구 2004, 28면.
  4. 何小竹 「村上春樹和大衆閱讀」, 『深쐴晩報』 2003년 3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