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무엇이 외국이론 수용의 문제인가

지난호 황정아의 비판에 대한 반론

 

서동욱 徐東煜

서강대 철학과 교수. 저서로 『차이와 타자: 현대철학과 비표상적 사유의 모험』 『들뢰즈의 철학: 사상과 그 원천』 『일상의 모험: 태어나 먹고 자고 말하고 연애하며, 죽는 것들의 구원』 등이 있음. dwseo@sogang.ac.kr

 

 

야니스 스타브라카키스의 글에 대한 나의 첫 반응은 어리둥절함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무고(誣告)가 가능할까? 만일 적절히 대응하려고 든다면 우선 각 요점별로 무수한 인용들과 어떻게 내 입장이 아닌 것을 내 것으로 그가 지적했는지를 하나하나 지루하게 설명해야 하는 따분한 일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슬라보예 지젝1

 

 

1. 외국이론 수용을 점검하기

 

지난호 『창작과비평』(2009년 여름호) 인문학 특집에 실린 황정아(黃靜雅)의 글 「묻혀버린 질문: ‘윤리’에 관한 비평과 외국이론 수용의 문제」(이하‘황’으로 표시)는 부제가 알려주는 대로‘외국이론 수용의 문제’를 다룬다. 문학과 사회의 여러 현안을 이해하고 문제들을 타개해나갈 사유의 자양분을 얻기 위해 많은 비평가들은 외국이론 공부에 관심을 가져왔다. 이런 관심은 단지 최근 우리의 경우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 일반이 성장해나가는 방식 자체의 근본 요소이기도 하다. 따라서 외국이론이 올바로 수용되고 있는지‘점검’하는 일은 상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중요한 작업이며, 나아가 그 자체가 외국이론 수용의 필수적인 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이 점검작업이 외국이론에 대한 오해에 근거한 잘못된 비판을 내용으로 할 경우엔, 그 자체 하나의 심각한 외국이론 수용의 문제가 되며, 비판의 대상이 된 다른 이들의 작업조차 부당하게 훼손된다. 이 글은 황정아가 수행한 점검작업이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것은 아닌지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황정아가 비판적 점검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최근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바디우(A. Badiou)나 아감벤(G. Agamben) 등을 다룬 국내 학자와 비평가들의 글이다. 이 글의 필자도 그 가운데 하나다. 황정아는 “〔바디우, 아감벤 등등의〕 이론가를 매개삼아 등장하는 〔국내 논자들의〕 급진적 언사들이 얼마나 탄탄한 인식에 근거하는가를 점검하려는 것”(황, 117면)이 자신의 의도라고 말한다. 이 글 역시 황정아의 저 의도를 충실히 따르면서, 외국이론 수용에서 진정으로 탄탄한 인식에 근거하지 않는 것이 어떤 것인지 밝혀볼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어떤 면에선 황정아가 수행한 외국이론 수용 문제에 대한 점검에 협력해서, 얼마간이라도 그것을 더 완성에 근접하게 해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지젝(S. Zizek)의 저 구절에서처럼,‘어떻게 그렇게 많은 무고(誣告)가 가능할까’어리둥절하게 만드는 황정아의 글이 가진 모든 문제들을 드러내자면, 문장들에 일일이 주석을 달아 비판하는 긴 글쓰기를 시도해야 할 것이다. 독자들을 지치게 할 이 이상적 글쓰기에 욕심을 내고 싶지는 않다. 그보다는 황정아의 외국이론 수용 점검의 기본 문제점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는 핵심적인 지점들을, 필자에 대한 황정아의 비판을 주로 검토하면서 드러내고자 한다.

 

 

2. 아감벤과 법의 위반

 

계간 『세계의 문학』(2008년 가을호)은 세계적으로 국가 및 법의 차원에서 소외되고 있는 외국인들을 다각적으로 조명해보려는 뜻에서‘외국인이란 무엇인가’라는 특집을 꾸민 바 있다. 황정아가 비판하는 필자의 글은 이 특집의 일부로 마련된 「사도 바울, 메시아, 외국인」(이하‘서’로 표시)이다. 외국인들의 사도라고도 불렸던 바울과 메시아주의에 대한 철학적 사색들과 더불어 법과 이방인 문제를 생각해보려는 의도를 가진 글이며, 부제‘익명적 주체 또는 보편주의’가 알려주듯, 메시아적 주체 개념을 통해‘익명성’이란 개념을 숙고해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2

필자의 글에 대한 황정아의 비판, 그리고 법과 관련된 제안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아감벤이 말하는 메시아주의와‘법의 위반’이란 주제는 관계가 없는데 필자는 그렇게 본다는 것, 바디우와 관련해‘법의 철폐’라는 도식이 성립하지 않는데 필자는 그렇게 본다는 것, 부당하게 바디우의 메시아론과 레비나스(E. Levinas)의 그것을 연관시킨다는 것, 법의 영역을 천착하기 위해 바디우나 아감벤과는 다른 지젝을 참조하자는 것 등이다. 이 모든 비판과 제안에 문제가 있다. 이제 보겠지만, 황정아는 바디우와 아감벤 등과 관련해서는 그들의 텍스트에 실제 기록된 내용과 반대되는 잘못된 비판을 하고 있으며, 지젝과 관련해서는‘위험한 발상’이라고 스스로 비판했던 사상을 대안적으로 제안하는 이해 못할 일을 수행하면서, “실정적인 법(으로 대표되는 권력기제)”(황, 117면)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한다. 요컨대 “외국이론을 인용한 몇몇‘윤리’비평이 상당히 급진적인 수사를 동반하는 데 비해 치밀한 점검을 생략하고”(황, 120면) 있다는 황정아의 비판은, 궁극적으로 독자들이 확인할 문제겠지만, 황정아 자신이 돌려받아야 할 평가라고 생각된다.

아감벤부터 살펴보자. 황정아는 말한다. “메시아주의적 주체와‘율법’의 관계가 서동욱이 주장하듯 (그에 따르면 바디우와 더불어)‘아감벤에서 반복(즉결심판)을 통한 토라〔율법〕의 완성은 사실 율법을‘위반’하고‘금지’하는 일이다’는 것으로 귀결되는지 살펴볼 차례이다”(황, 115면). 그리고 결론적으로 황정아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감벤이 메시아주의와 법의 관계를 폐지나 위반으로 볼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 사실은 분명해진다”(황, 116면). 이러한 황정아의 주장과 달리 아감벤은 메시아주의에서 다음과 같이‘율법의 위반’-더 정확히는‘율법의 위반을 통한 율법의 완성’-을 강조한다.<

  1. 슬라보예 지젝 「“혹자가 부르기를…”: 야니스 스타브라카키스에 대한 답변」, 강수영 옮김 『법은 아무것도 모른다』(인간사랑 2008), 237면. 이하의 모든 인용에서 원저자의 강조는‘ ’로, 인용자의 강조는 고딕체로 표기한다. 〔 〕 안의 말은 뜻을 잘 통하게 하기 위해 인용자가 집어넣은 것이다.
  2. 참고로‘익명성’은 몇년 전부터 필자의 공부의 중심적 화두인데, 가령 「익명의 밤: 최근 시 읽기」(『세계의 문학』 2007년 가을호)에서는 강정, 이원, 조연호, 김행숙, 황병승 등이 보여준 최근 시의 핵심으로‘익명성’을 제시했다. 익명성이 최근 시의 핵심이라는 필자의 생각은 그 뒤에 다른 비평가도 다시 확인하고 있다. 「익명의 밤」이 쓰인 이듬해에 발표된 이광호의 「익명적 사랑, 비인칭의 복화술」(『현대한국시』 2008년 여름호)이 그렇다. 이광호는 이 글을 최근 출간된 평론집의 표제작으로 삼기도 했는데, 이런 결정은 최근 우리 시에서 익명성이 가지는 중요성을 얼마간 간접적으로 확인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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