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인터뷰

 

무엇이 한국문학의 보람인가

문학평론가 백낙청과의 대화

 

 

황종연 黃鍾淵

문학평론가. 동국대 국문과 교수.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 저서로 『비루한 것의 카니발』 등이 있음. jongyon@empal.com

 

백낙청 白樂晴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계간 『창작과비평』 편집인. 저서로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흔들리는 분단체제』 등이 있음.

 

 

 

사진ⓒ이장욱

사진ⓒ이장욱

 

『창작과비평』(이하 『창비』)이 2006년 봄호로 창간 40주년을 맞았다. 지난 40년 동안 넓게는 한국사회의 공론 영역의 발전에, 좁게는 문학저널리즘의 발전에 『창비』가 지대한 공헌을 해왔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문학만 놓고 보더라도 지난 40년 동안 한국 작가 및 비평가 들 사이에 존재하는 민족적 양심은 바로 『창비』를 통해, 또는 『창비』 덕분에 진지하고 강력한 목소리를 얻었다. 민족문학이라 불리는 그 문학적 입장을 둘러싼 논란이야 어찌되었든 『창비』는 문학을 한국사회의 창조적인 활동영역으로 유지시키고 발전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이러한 『창비』의 공적은 문예지 발행이 창조, 실천, 운동 등의 아우라를 잃어버린, 문학저널리즘이 전반적으로 혼미한 형세를 보이고 있는 최근의 사정에 비추어보면 한층 빛난다. 창간 40주년을 맞아 『창비』가 시작하는 ‘도전인터뷰’첫회에 이 잡지의 편집인이기도 한 문학평론가 백낙청을 만난 자리에서 나는 문예지로서 『창비』의 역할을 계속 이어나갈 방법이랄까 원칙이랄까 하는 게 무엇인가를 우선 듣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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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白樂晴

백낙청• 40년의 세월이 잡지로서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지요. 『창비』는 창간 40주년을 맞아서 인생을 기준으로 불혹의 나이라고 하기보다 잡지의 수명은 개인의 수명보다 훨씬 길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이제부터 정말 젊어지는 것이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웃음)

그런데 요즘 문예지뿐 아니라 진지한 태도로 담론을 하는 잡지들이 다 힘든 풍토 아니에요? 『창비』는 어떻게 보면 이중으로 불리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문학계간지들이 다들 어려움에 부닥쳐 있지만 그래도 황교수가 관여하시는 『문학동네』처럼, 말하자면 문학에 ‘올인’하는 잡지가 확실하게 독자층을 잡기가 낫지 않나 싶어요. 지금 『창비』는 절반이 문학지이고 절반이 정론지를 지향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일반독자를 대상으로 한 정론지가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는 것 같아요. 상업화되거나 아니면 전문분야별로 세분화되거나…… 그러나 지난 한해 동안 우리 내부에서 여러 토론을 한 끝에 『창비』는 죽으나 사나 현체재로 가자, 문학지 겸 정론지의 모양새를 유지하자고 했어요. 다만 담론개발을 좀더 현장감있고 시의성있게 해나가고, 문학지면도 우리 문학현장에 한층 밀착해서 만들어보자는 각오를 했죠. 어쨌든 문예지로서의 역할을 고수하고 발전시켜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창비』가 40년간 문예지로서 인정을 받아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사실 꽤 완고한 문학주의자거든요.(웃음) 문학주의자라는 말이 꼭 적당한 표현은 아니에요. 문학과 이른바 문학 이외의 것이라는 것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이 있어서 그 경계선 이쪽의 문학만 한다는 의미의 문학주의자는 아니고, 문학을 제대로 하다보면 문학 이외의 것으로 저절로 연결이 되어나가는데 그러기 위해서도 문학을 문학 자체로 제대로 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문학주의자라고 할 수 있죠.

黃鍾淵 문학평론가. 동국대 국문과 교수.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 저서로 『비루한 것의 카니발』 등이 있음.

황종연黃鍾淵

 

자신이 실은 문학주의자라는 그의 말이 내겐 그리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문학주의가 문학을 그 이외의 활동과 분리시켜 생각하고 숭상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문학 고유의 역할과 권능에 대한 신뢰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면 세상에는 여러 유형의 문학주의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1990년에 나온 『민족문학의 새 단계』로부터 계산하면 16년 만에 새로 묶여 나오는 백낙청의 평론집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원고를 읽으면서 내가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분단체제극복을 비롯한 지구시대 한반도 주민의 과제와 관련하여 문학의 주도적 역할 또는 문학 본연의 임무를 반복해서 강조한 발언들에서다. 현재 우리 문단이나 학계는 문학의 탈신비화라고 부를 만한 사태 이후를 살고 있어서, 문학의 주도성 주장이 일각에서는 엘리뜨주의나 아니면 기타 수상쩍은 반동주의로 비칠 소지가 많기 때문에, 그런 발언은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그는 문학을 탈신비화하고 변방화하는 구미의 이론에 어느 누구 못지않게 밝을 텐데도 오히려 문학을 창조적인 사업의 중심에 놓고 있다.

 

백낙청• 문학의 탈신비화라고 말한 그런 큰 흐름이 있는 게 사실이에요. 세계적으로 그런 대세가 있고, 또 그것이 국내에 들어와서 대학의 문학학과 안에서도 그런 흐름이 점점 커가고 있는데요. 아까 내가 문학주의를 두 가지로 구별했는데, 전자의 경우 그야말로 문학을 문학 이외의 것으로부터 완전히 절연시켜서 신비화하는 그런 문학주의니까 이런 식의 문학주의를 비판하고 문학을 ‘탈신비화’하는 노력은 그런대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다른 의미의 문학주의, 문학을 통해 문학 이외의 것과 만나기 위해서라도 문학을 문학으로서 제대로 해야 한다는 의미의 문학중시사상마저 부정하는 ‘탈신비화’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몇가지 글에서도 썼습니다만, 나의 이론적 입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예술의 진리가 과학의 진리보다 오히려 한급 높은 진리라는 거예요. 따라서 이론에 대해서도 그것이 순전히 이론작업인 한에서는 창조적인 작품을 수용하는 비평작업보다 한급 떨어진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내 나름으로 문학을 공부하고 문학이론이라든가 예술이론, 또 문학을 해체하고 비판하는 이론에 대해 공부해서 도달한 입장이 하나 있고요. 또 하나는 문학에 대한 신념이라는 것은 동시대 모국어의 문학에 대한 신념 없이는 강력해지기가 힘든 법인데, 일종의 신상발언이 되겠지만, 한국문학과 나의 관계는 원래 그렇게 자연스럽거나 밀착된 관계는 아니에요. 젊어서 외국에 가서 공부를 했고, 또 전공분야가 서양문학이고, 거기다가 문학에 전념할 수 없는 생활을 많이 해왔어요. 말하자면 한국문학의 현장에서 떠나갈 사유가 나이가 들수록 많아진 셈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그런 처지였기 때문에 그렇게 한국문학의 창조적 활기를 거듭거듭 확인함으로써만 한국문학의 현장을 아주 떠나지 않는 게 가능했지요. 현장에서 좀 멀어져 있다가도 어느 순간에 작가들의 작품을 다시 챙겨 읽다보면 내가 결코 저버릴 수 없는 창조적인 현장이 여기 있구나 하는 느낌을 갖곤 했어요. 최근에도 훌륭한 시집을 여러 권 만났고, 박민규나 김연수, 김애란 같은 신예 소설가들의 작품집을 읽으면서 많은 자극을 받고 있습니다. 김연수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는 아직 절반쯤밖에 못 읽은 처지라 중편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이 흥미진진한 역작이라는 언급 정도로 넘어가렵니다만, 박민규나 김애란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더 이야기해도 좋겠습니다.

 

민족문학론과 분단체제론은 문학에 어떤 도움을 주는가

 

한국문학에 대한 백낙청의 관심은 두말할 것 없이 민족문학론으로 요약된다. 그의 민족문학은 어떤 확고한 신념의 표현임은 분명하지만 개념적으로 유연한 용어이다. 수십년에 걸쳐 이어지고 있는 그의 민족문학론은 그때그때 시대적 상황에 빠르게 대응하면서 그 외연을 변경시켜가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평론집에도 시대적 과제에 대응하여 민족문학의 개념을 조정하려고 노력한 자취가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그는 민족문학이라는 용어가 과연 여전히 유효한가 하는, 종래에 민족문학을 지지하던 사람들 사이에조차 퍼져 있는 의문에 응답하여 ‘분단체제극복에 기여하는 문학’이라는 의미에서, 작금의 전지구화 상황에서는 민족어 또는 지역어에 근거한 문학 옹호가 중요하다는 이유에서, 그리고 그밖의 여러 이유에서 민족문학이라는 용어가 쓸모있다고 말하고 있다. ‘분단체제극복을 위한 문학’은, “남북분단이나 민족분열, 외세개입 등의 문제와 표면상 별 관련이 없는 소재를 다루더라도, 분단체제가 지배하는 오늘의 현실에 대해 새로운 깨우침을 주고 창조적 대응을 일깨우는 작품이면 되는 것이”라는 백낙청의 구절에 따르건대, 문학에 대한, 이를테면 이데올로기적 통제를 추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 내가 관찰한 바로는 지난 십수년간 작가들은, 특히 젊은 세대의 작가들은 “오늘의 현실”을 “분단체제”와의 연관보다는 그와는 다른 다수의 연관 속에서 인식하고 탐구하는 방향으로 작품세계를 전개해왔다. 민족통일 같은 공적 대의에 봉사하기보다는 개인의 체험적 진실에 충실하려는 경향을 보였고, 민족문제보다 젠더문제, 환경문제, 세대문제 등에 더욱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민족현실과의 싸움이나 한민족공동체의 비전이 문학적 성취를 촉진한다는 신념은 작가들 사이에서 크게 약화되었다.

 

백낙청• 몇가지 오해가 있는 것 같군요. 하나는 분단체제의 개념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평론의 성격에 대한 것, 그리고 세번째로 한민족공동체 얘기가 있어요. 먼저, 그냥 분단극복이 아니고 분단체제의 극복이라고 할 때는 우리가 단순히 통일만 하자는 게 아니라 지금 남과 북의 분단이 일정한 체제의 성격을 갖고 자리를 잡았는데 이 체제를 허물면서 이를 넘어서는, 분단체제보다 나은 체제를 만들자는 얘기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통일이라는 민족문제를 해결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문제, 젠더문제, 환경문제, 이런 것들이 물론 완전히 해결은 안되지만 지금보다는 한차원 높은 단계로 진전이 되고 해결에 다가가는 그런 식으로 분단을 철폐해가는 것을 분단체제의 극복이라고 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민족현실에만 치중하는 것이 옳으냐는 질문은 ‘분단극복’문학에는 해당될지 몰라도 ‘분단체제극복’문학에는 해당이 안되지요.

다음으로,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자꾸 그런 식의 주문을 작가에게 하는 것이 도움이 되느냐는 문제인데, 우리가 평론을 할 때 일종의 화법으로 작가가 이랬어야 한다든지 하는 표현을 쓰긴 해요. 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평론은 한 독자의 입장에서 동료 독자들과 대화하는 것이고, 거기에 작가도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끼여들어와도 좋고 안 들어와도 그만이라고 봐요. 그래서 작가나 작품에 대해서 이런저런 주문을 하는 것이 당장에 그 사람보고 그런 식으로 창작을 하라고 압력을 가하는 것이 아니고, 작품을 수용하는 독자들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