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금희 錦姬

1979년 중국 길림성 구태시 출생. 2007년 『연변문학』 주관 윤동주신인문학상을 받고, 2014년 『창작과비평』으로 국내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 『세상에 없는 나의 집』, 장편소설 『천진 시절』 등이 있음.

jinjinji79@naver.com

 

 

 

무한오리부위집

 

 

아파트 입구의 게시판이 바뀌었다.

같은 색상과 디자인의 직원복을 입은 여덟 사람의 사진이 사라진 것이다. 사진이 붙어 있을 때 그들의 위쪽에는 붉은색 고딕체 글씨가, 아래에는 인물의 이름, 직함과 더불어 간단한 이력이 더 작은 서체로 타이핑돼 있었다.

소홍(蕭紅)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오늘 오후 그녀는 만능 요리기계로 서리태 콩물을 만들 거라고 했다. 더운 날은 지나갔고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깨지 못한 꿈속 같은 허망한 나날을 반년 이상 보낸 것이다. 나는 수학 연습지와 어문 훈련 문제집을 가방에 챙겼다. 문을 나서기 전 책장을 한번 더 보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곁다리로 읽을 책 한권을 꺼내 챙겼다.

 

오개월 전의 늦은 봄, 바로 그 유리장 안 게시판에 새 사진들이 붙은 것을 보고 소홍은 머리를 옆으로 살짝 틀었다. 파란 일회용 마스크 위에 빼꼼 드러난 그녀의 두 눈은 웃는 듯 아닌 듯 했다. 미끄럼틀이 있는 놀이터에서부터 운동기구가 배치된 작은 쉼터, 파란 잔디밭 가운데 지어진 정자를 지나 동문 쪽으로 돌아오면서 우리는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몇개월 묵은 스트레스를 방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집이 있는 동문 가까이의 2호 아파트 아래에 와서 우리는 잠시 멈췄다. 게시판은 맞은편에 있었고 스무보폭 정도 떨어진 곳에 까만 철창으로 만들어진 동문이 있었다. 사람이 드나드는 작고 좁은 문과 차량이 드나드는 넓고 큰 문.

소홍은 내게 철문 너머의 하늘을 턱짓해 보였다. “하늘이 얼마나 파래졌니. 최소한 한가지 좋은 일은 일어난 셈이지.”

철문 위로 둥그러니 드리워진 하늘은 확실히 파랬다. 여러 나라의 인공위성에 장착된 카메라도 이 부분은 인정한다는 사진을 찍어 보냈으니 그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었다.

“어떻게든 지나가겠지, 안 그래?” 소홍은 하늘에서 무상으로 쏟아지는 청정한 공기를 맞받기라도 하듯 두 팔을 살짝 앞으로 뻗었다. 철문 위쪽에 솟은 뾰족한 창끝에 구름덩어리 한조각이 걸려 할딱거렸다. 나는 300여 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도시에서 매일 점심, 칸막이 삼아 세워놓은 종이박스를 마주한 채 도시락을 먹는 남편을 생각했다. 출근이 회복되었지만 회사 식당에서 도시락을 먹는 직원들은 삼분지 일가량 줄었다고 했다. 일주일에 한번은 닭다리도 나오니까, 그만한 도시락이면 얼마나 행운이냐고 남편은 ‘위챗’ 채팅방에 사진과 함께 메모를 남겼다. 반찬값이라도 벌려고 초등학생 네명을 받았던 나의 ‘숙제반’(방과 후 아이들의 숙제를 돕는 과외반)은 긴 방학 중이었다. 우리 부부에겐 ‘어떻게든 지나갈 수 있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연히 소홍은 그 느낌을 본질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난 뭐, 캥거루족이니까.” 사이가 점차 가까워지면서 소홍은 내가 생활난으로 어려움을 호소할 때마다 자조와 무심함이 잘 섞인 어투로 나를 위로했다. 나는 그녀의 솔직함이 마음 편했다.

그녀와 알고 지낸 지는 오년. 일년에 한번씩 열리는 전교 학부모회의에서 어느 한번 우리는 우연히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딸과 내 아들 채건이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던 여름학기였다. 딱히 적을 것은 없었지만 나는 그녀에게 펜을 빌려줬고 그녀는 내게 노트 두장을 찢어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소홍 모녀는 시종 우리 모자 앞에서 걸었는데 아파트단지까지 들어와서야 같은 곳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뒤로 아파트 주위 슈퍼와 국숫집과 주차장에서 가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새로 생긴 요가학원에 무료 체험수업을 받으러 간 날, 내 앞줄에 파란 매트를 펴고 앉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신기하게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녀도 나를 보고 맑게 웃었다. 서로에게 이해관계가 없었으므로 우리는 훨씬 단순하게 친해질 수 있었다. 아이들은 같은 중학교에 들어갔고 이로써 소홍과 나에게는 한 학교 학부모로서 공동의 화제가 육년은 더 보장됐다. 자연히 다른 화제도 하나둘 추가되었다. 그녀는 착하고 배려심 많은, 접촉하기 편한 스타일이었다. 요가를 끝내고 때로 같이 국숫집에 들르면 그녀는 늘 내게 물었다. “난 괜찮아, 넌 뭐 먹을 건데?”

 

소홍은 외동이었고 부모 모두 시급 도시의 공무원이라 별로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았다. 평범한 이력에 겉으로 봐서 큰 곡절도 없는 결혼생활이었다. 삼년제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회계사무소에 출근하다가 남편이 일회용 용기 생산기계를 들여오면서부터 남편 회사의 장부를 봐주었다. 출산하기 전에는 가끔 사무실에 나가 돕기도 했지만 그렇게 보낸 시간이 많지는 않았고 대체로 한달에 일주일만 출근하는 여유로운 일상을 보냈다.

출근을 드문드문 해온 원인을 육아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따지고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소홍의 딸아이는 할머니와 외할머니의 품을 번갈아 옮겨가다시피 하며 컸다. 방 안에서 뒹굴며 크던 돌 전에는 거의 외할머니가, 놀이터에 가는 것을 하루 일과 삼던 유치원 전까지는 주로 할머니가, 공식적인 교육기구에 들어가면서부터 여태까지는 양가 어른들 중 시간 편한 쪽이 소홍을 도왔다. 애 하나 키울 뿐인데 무슨 일이 그렇게 많은지 몰랐다. 어릴 때는 먹이고 입히고 놀아주는 일만 해도 노동량이 상당했고 좀더 커서는 영어반, 미술반, 피아노반, 무용반, 사회자반에 수학반과 서예반…… 각종 과외반에 다니느라 항상 스케줄이 빡빡했다. 소홍은 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과외 네개쯤은 견지했는데 또래 엄마들 사이에서 그 정도는 극성에 속하지도 않았다. 그녀처럼 집안 어른들이 도울 수 있다면 나도 아마 태권도반이랑 서예반을 채건의 과외에 추가했을 것이다.

소홍의 시간이 여의치 않은 날 시댁이나 친정 어른이 아이를 마중해 저녁을 해 먹였고, 그녀가 저녁 늦게까지 아이와 함께 과외를 다녀오고 숙제를 하고 복습을 하는 동안 당번 어르신들은 집을 치우고 쌓여 있는 택배 박스를 접어두고 침대커버를 빨고 베란다의 화분과 감자, 무 따위를 돌아보고 냉장고를 정리하고 아침거리를 준비해두었다. 모두 안주인이 해야 하는 일이지만 소홍이 며칠 미루는 사이, 또는 그녀의 솜씨가 영 아닌 것을 넘어갈 수 없어 조부모들은 습관처럼 했다.

처음에는 연로한 부모님을 부려먹는 것 같아 죄송한 마음에 명절이나 생일, 또는 아이를 봐주러 올 때마다 용돈을 챙겨드렸지만 유동자금이 늘 빠듯한 회사 사정을 잘 아는 부모님들은 오히려 만날 때마다 손녀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는 명분으로 두세배의 돈을 얹어주고 갔다. 뭔가 옳지 않다는 건 알겠는데 같은 과정이 오년이고 십년이고 되풀이되다보니 송구스러운 마음, 감사한 마음은 점점 희미해지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 당연한 마음으로 바뀌게 되더라고 소홍은 털어놓았다. 이제 소홍은 춘절 외에 부모님께 따로 용돈을 챙겨드리지 않았다. 게다가 올해는 연초부터 남편 회사의 기계마저 작동을 멈춘 것이었다.

내게는 소홍처럼 가까운 곳에 살면서 나를 도와줄 어른들이 없었다. 친정아버지는 고등학교 시절 지병으로 돌아가셨고 몸이 약한 어머니가 식당을 전전하며 나와 언니의 뒷바라지를 했다. 혼자 애를 키우고 집안을 돌보고 여가시간을 이용해 반나절 타임의 일이라도 찾아 하는 나를 보며 소홍은 불가사의해했다. “넌 진짜 유전변이야, 바링허우(중국에서 1980년대에 태어난 세대를 가리키는 말)가 아닌 것 같애.” 소홍이 상상하는 중국의 바링허우는 그녀 같은 도시 중산층의 자녀들이었지만 농촌에서 나고 자란 나는 그녀 상상과는 다른 우리 또래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소홍이 보기에 ‘생활력 짱’인 나도 엄마에게는 ‘옛날 우리 때와 다르다’라는 핀잔을 무시로 듣는 게 사실이었다. 엄마는 우리가 모두 너무 약해 터졌다고, 우리의 아이들은 더 물러 터졌다고 머리를 흔들었다.

 

아파트 입구 가까이로 가는데 철문 바깥 먼발치에서 택배 상자를 포개 들고 마주 오는 아가씨가 보였다. 무인 택배 보관함이나 택배슈퍼(택배 발송과 대신 받기를 취급하는 곳)에서 금방 찾은 것 같았다. 내가 안쪽에서 자석 여닫이 단추를 누르기 전에 입구 쪽에 앉아 있던 경비 아저씨가 먼저 카드를 식별기에 대는 소리가 들렸다. 삐— 철컥.

잠금이 풀렸고 경비 아저씨가 철문을 열어 붙들고 섰다. 나는 택배 상자 아가씨가 먼저 들어오도록 비켜섰다. 금방 머리를 감았는지 샴푸 냄새가 진했다. 그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명랑하게 “감사합니다”를 외쳤다. 경비원들이 가장 듣기 좋아하는 인사말이었다.

경비원들의 카드는 만능카드로, 근무하는 아파트단지 내 모든 출입문과 엘리베이터 가동에 유효했다. 그들의 주 임무는 보안이었지만 실제로 가장 많이 하는 일은 도움이 필요한 주민을 위해 카드를 찍어주는 것이었다. 전동자전거를 탄 남자들, 어린 아기를 유모차에 태운 젊은 엄마 또는 할머니들, 양손 가득 장을 보고 돌아오는 직장인들, 그리고 여러개의 택배 상자를 든 주부들. 경비원들은 이 도시에서 이름난 아파트 관리회사의 교육을 받는 직원들이었다. 이 단지의 관리비용은 평균가의 두배였다.

그들은 비싼 값을 했다. 단지 내에는 원칙상 차량을 들여보내지 않았고 건물마다 매일 깨끗이 물걸레질을 했으며 놀이터와 잔디밭과 배드민턴장, 길가에는 늘 쓰레기 한점 없었다. 봄에는 새로 꽃모종을 심었고 여름에는 시원한 분수를 틀었으며 겨울에는 주민들이 불편하지 않게 제때 눈을 치웠다. 키를 잃어버렸거나 물건을 맡겨야 하거나 수도꼭지 따위가 고장 나면 여러가지로 도왔다. 그들은 분공(分功)이 명확했고 비교적 효율적이었고 친절했다. 아침마다 제복을 입고 허리띠를 찬 건장한 모습으로 달리기와 몸풀이 운동을 했고 업체 사무실 앞, 아파트 입구 주위에는 늘 그들과 한담하는 주민들이 있었다.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는 경비실을 지나치며 나는 흘끗 안을 들여다보았다. 한 사람이 더 있었지만 키다리 풍아저씨는 아니었다. 그를 본 지 꽤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풍위덕, 5개월 전 소홍과 같이 유리장 앞에 섰을 때 여덟장의 사진 중에 그가 있었다. 소홍도 풍아저씨를 알았다.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거구의 아저씨는 이 아파트의 경비원들 중 주민들의 상황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주민들과 제일 많은 소통을 하는 경비팀장이었다. 그의 사진이 유리장 안에 붙은 것은 의아해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게시판의 새 사진들을 본 오후, 채건의 인터넷수업 답안지를 체크하는데 소홍에게서 문자가 왔다. “요 아래 세탁소 곁에 무한오리부위집 세놨더라. 목이 그닥 좋지는 않지만.” 문자를 보고 나는 피씩 허구프게 웃었다. 하필이면 ‘무한(武漢, 중국 우한시)’오리인가, 그 가게는 십중팔구 이름 때문에 ‘매운오리집’에 밀린 것 같았다. 가게가 개장하고 한창 흥성했던 작년 겨울 나와 소홍은 그 집에서 독특하게 매운 향의 오리 머리와 혀, 발을 사 먹었다. 가게주인 부부의 농후한 동북 사투리로 봐서는 단언컨대 호북 사람이 아니었다.

메인 메뉴는 물론 오리 목이었으나 내가 제일 좋아한 것은 쫀득쫀득한 창자였고 소홍은 같은 양념으로 무친 연근을 좋아했다. 이제 다시 비슷한 맛을 느끼려면 한 블록 건너 큰길가에 있는 ‘매운오리집’으로 가야 할 것이다. 아파트에서는 일자를 찍은 출입증을 더이상 나눠주지 않았고 길거리에 오다니는 사람들도 서서히 많아졌지만 ‘세 줌’을 붙인 가게는 서너집 건너 하나꼴로 눈에 들어왔다. 셔터를 내린 녹슨 문, 먼지 쌓인 유리창, 재개장 허락을 기다리는 과외반, 학교, 극장…… 삶은 계속되고 있는 듯했지만 모든 게 된 풍을 맞은 환자의 몸처럼 예전 같지 않았다.

“그래서? 건물 주인이랑 연락했어? 정말 해보려고?” 나는 소홍에게 음성메시지를 보냈다. 이 시점에 분식집을 내보겠다는 소홍의 계획은 그녀 남편 회사의 창고 구석에 높이 쌓인 일회용 용기들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어 보였다. 세는 좀 싸졌을지 모르지만 경기가 바닥을 치고 있었고 무엇보다 소홍은 요리에 기질이 없었다.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일이 급하다면 차라리 원래의 전공을 살려서 회계사무소에 출근하는 편이 더 현실적이라고 두어번 권했지만 그녀는 ‘틱톡’에서 김밥이며 샌드위치며 마라탕 만드는 영상을 열심히 뒤졌다.

어떤 일에 그만큼 열성을 보이는 모습은 그녀를 알고 나서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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