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과 현장

 

문익환, 김주석을 설득하다

늦봄 방북 20주년을 맞아

 

 

이승환 李承煥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집행위원장. 논문으로 「2000년 이후 대북정책 담론 연구」 등이 있으며, 저서로 『민족화해와 남남대화』(공저) 등이 있음. sknkok@paran.com

 

 

올해는 늦봄 문익환(文益煥, 1918~94) 목사 15주기가 되는 해이고, 또 그의 삶에서 가장 극적인 한 시기로 평가되는 평양 방문 20주년이 되는 해이다.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기어이 가고 말거야 이건/잠꼬대가 아니라고”(「잠꼬대 아닌 잠꼬대」). 평양을 방문하던 그해의 첫새벽에 썼던 싯구 그대로, 늦봄은 1989년 3월 25일 정경모(鄭敬謨), 유원호(劉元琥)와 함께 방북했다.

 

 

늦봄의 통일사상

 

늦봄이 방북하자, 당시 정권과 대부분의 언론은 그를‘색깔이 의심스러운 위험한 인물’이라고 하거나,‘소영웅주의적, 감상적 통일주의자’등의 이미지를 부각하는 데 주력했다. 노태우정부는 문익환의 방북을‘우리 정부의 협상력을 파탄시키고 북한의 대남공작에 놀아난 것’이라면서,1 실정법 위반을 명분으로 그를 구속하고 새로운 공안정국을 일으켜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는 빌미로 삼았다.

당시 언론과 정권이 만들어낸 이러한 이미지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인식을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늦봄의 방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통일사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의 통일사상은 그가 왜 방북했는지 이해할 수 있는 기본 배경이 된다.

1989년 방북 당시 그의 통일관은‘민주화와 통일은 하나다’‘통일은 민족해방의 완성이고 민족자주의 성취다’‘통일의 주인은 민(民)이다’라는 세 명제로 요약된다.2 문익환의 이 세 명제는 각각 별개의 것이라기보다 서로 연결된 하나의 논리였다.

그는 통일이 민족사의 정통성 회복운동이자 곧‘민족해방운동의 완성이고 민족자주의 성취’라 보면서, 그런 의미에서‘통일은 민족의 부활’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민족의 부활은 민중의 자각과 해방을 향한 노력, 즉‘민중의 부활〓민주’없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결론은‘통일은 곧 민주’이고‘민주는 민(民) 주도’이므로‘통일 역시 민 주도’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민 주도’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것은 결코 관을 밀어내자는 말이 아닙니다. 관은 어디까지나 민의 뜻을 받아 민과 함께 민을 앞세우고 민에 밀리면서 통일의 문을 향해서 걸어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민을 배제하고 관이 독점한 관 주도하의 통일운동이 불통일운동이었다는 것을 지난 45년 민족사가 증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3

이러한 문익환의‘민 주도 통일사상’에 비추어볼 때, 그의 방북은‘소영웅주의’가 아니라‘통일논의의 정치사회 독점’을 무너뜨리기 위한 실천적 돌파였고,‘민의 통일운동’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몸을 내던진’투쟁의 일환이었다. 즉 그의 방북은 통일논의가 정치사회의 전유물일 수 없다는‘민의 독립선언’이었던 것이다.

 

 

왜 방북했는가

 

문익환의‘민 주도 통일사상’이 방북이라는 구체적 결단으로 이어진 계기는‘분신정국’으로까지 불렸던 당시의 수많은 젊은이들의 분신, 투신이었다. 그는 분단, 반공의 깜깜한 절벽 앞에서 몸을 내던지는 젊은이들을 보며, 이 죽음의 행렬을 멈추기 위해 자신이 목숨을 내걸고 방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자신이‘민’이기 때문에 지난 40년간 허송세월만 한 당국자들간의 대화보다 훨씬 더 많은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두 당국자들이 만나면 쌍방이 각자의 권익을 유지하고 수호해야 한다는 입장 때문에 줄다리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과 북의 집권층은 이 줄다리기를 하다가 40년 세월을 흘려보낸 것이 아닙니까? 적어도 저는 그런 줄다리기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김주석도 저와는 줄다리기를 할 필요가 없었던 것 아닙니까?”(180면) 그래서 자신이 앞장서서 남북관계의 새로운 돌파구를 열게 되면 “젊은이들이 죽지 않고 살아서” 민주와 통일을 쟁취해나갈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역사는 그의 믿음대로 전개되었다.4

또한 늦봄은‘통일은 하나가 되어 더욱 커지는 것이고, 커지기 위해서는 사소한 생각의 차이, 제도의 차이,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여겨, 이를 위해 남쪽에서 투쟁했듯이 북쪽에 가서도 이 점을 분명히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평양에 도착했을 때 늦봄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번에 말로 하는 대화가 아니라 가슴과 눈으로 하는 대화를 하러 왔습니다. 어느 한편을 이롭게 하고 한편을 불리하게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 한편이 이기고 한편이 지는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승리자가 되는 길을 찾아 왔습니다.”(124면) 그는 이 말의 뜻을 남쪽의 정부와 국민의 마음을 전달해서 남쪽에 대한 북쪽의 신뢰를 이끌어내고, 북쪽의 진의를 알아 남쪽에 전달함으로써 북에

  1. 공안당국은 늦봄의 방북을‘북한의 공작에 의한 적지 잠입’으로 규정하고, 늦봄과 함께 방북한 정경모와 유원호 두 사람을‘북한공작원과 그 지령을 받은 자’라고 주장했다. 물론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늦봄은 방북 당시 많은 문서의 초안을 썼던 정경모에 대해‘내 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의 글’이라며 감탄했고, 귀국길까지 함께해준 유원호에 대해서는 매우‘마음 든든하게’생각하고 있었다.
  2. 문익환의 통일론으로 흔히‘3단계 연방제론’등이 언급되지만, 그는 통찰력과 실천으로 이론을 돌파해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런 이론보다 그의 통찰력있는 통일관이 훨씬 큰 힘을 지녔다.
  3. 문익환 「상고이유서」, 『문익환전집』 제5권, 사계절 1999, 236면. 이후 「상고이유서」에서 인용한 부분은 본문에 면수만 표기하며, 『문익환전집』(『전집』)에서의 재인용은 권수와 면수만 밝힌다.
  4. “내가 방북하고 수경이가 방북하면서 분단의 벽이 무너지기 시작하니까 젊은이들이 죽을 필요가 없어진 거예요. 만약 갔다 오지 않았으면 1년 반 동안 얼마나 많은 학생이 죽었을지 모르는 일이에요. 그런 의미에서‘조금 더 기다리다 갔다 왔어야지’라는 지적은 전혀 당치 않은 논리입니다.” 인터뷰 「민주화가 통일이고 통일이 민주화」, 『평민연회보』 제10호, 1990.12.20, 『전집』 제5권 41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