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문학이라는 커먼즈

 

문학성과 커먼즈

 

 

황정아 黃靜雅

문학평론가,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저서 『개념비평의 인문학』, 역서 『패니와 애니』(공역) 『도둑맞은 세계화』, 편서 『다시 소설이론을 읽는다』 등이 있음. jhwang612@hanmail.net

 

 

1. 문학이라는 커먼즈1

 

촛불혁명의 뜨거운 열망은 남북정상회담과 판문점선언 같은 거대한 변화를 촉발했는가 하면 제도와 일상으로도 스며들며 더 지속적인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불과 2년 남짓한 시간이 지났을 뿐이지만 이 혁명을 만든, 또 그 혁명이 만들어낸 단절의 감각은 이전의 삶의 관행들을 연대기적 순서보다 훨씬 먼 곳으로 보내버려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을 매순간 상기시킨다. 그 사이 문학에서도 변화의 기운에 더 직접 호응하기를 원하는 움직임을 볼 수 있었다. 이런 경향은 ‘정치적 정답주의’라는 말을 새삼스럽게, 그러나 본격적으로 소환하면서, 르뽀에 가까울 정도로 사회성을 앞세우거나 첨단의 사회적 이슈들을 앞다투어 다루는 작품들로 나타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문학은 그 혁명의 이름으로 낡은 관행의 온상이라 지탄받기도 했다. 최근의 ‘미투’운동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문단 내 성폭력에 대한 고발이 문학장() 전체에 대한 비난과 회의를 촉발한 착잡한 사태가 그 단적인 사례다. 어느 평론가는 문학을 향한 숱한 비판과 자기비판을 두고, “제도는 여전히 문제이기에 신나게 난타당하는 중이고 ‘문학’은 수많은 문제와 모순에도 아직 달성되지 않은 무의미한 인용으로 끊임없이 시도되는 ‘무한 동력의 꿈’ 같은 것으로 최선을 다해 공회전하면서 지켜보는 모든 이들을 절망에 빠뜨리는 중”2 이라고 침울하게 진단했다.

문학에서 나타나는 이 두 경향은 언뜻 생각하기에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문학을 향한 사회적 개탄이 늘어날수록 당면한 이슈를 즉각적으로 다룸으로써 그 개탄에 내포된 요청에 부합하려는 충동도 팽창한다. 두드러지게 사회적이라는 이유로 이런 경향을 문학의 일에서 벗어나 있다고 말한다면 낡디낡은 문학의 자율성론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이런 것들도 분명 문학의 일이다. 문학을 향해 권력과 부패와 폭력을 말하고 또 문학을 통해 사회적 발언과 폭로를 모색하는 이 사태는 다소 역설적인 방식이긴 해도 랑시에르(J. Rancière)가 말한 ‘문학의 정치’와 맞닿아 있다. 랑시에르는 역사적 개념으로서의 ‘문학’이 위계와 구분을 해체하여 누구나, 어떤 것에 대해서든, 어떤 말로든, 글을 쓰고 수용할 수 있는 평등과 더불어 정착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3 그는 이같은 ‘문학의 정치’를 비롯한 정치 일반을 “커먼한(공통적인) 것의 활동 영역”(the sphere of activity of a common)4이라 정의했거니와, 현재의 사태는 또한 제도와 시장과 소유관계가 문학을 어떻게 분할하든 어떤 근본적인 혹은 잠재적인 차원에서 문학은 모두에게 있고 모두가 나눌 수 있는 어떤 것, 곧 하나의 커먼즈임을 새삼 상기해준다.

커먼즈와 관련하여 하트(M. Hardt)와 네그리(A. Negri)는 ‘공통적인 것’(the common)이 공기와 물처럼 물질세계에 속한 공동의 부(wealth)만이 아니라 “지식, 언어, 코드, 정보, 정동 등 사회적 상호작용과 이후의 생산에 필요한 사회적 생산의 결과물 또한, 한층 중요하게” 포함한다고 정의했다.5 이런 관점에서 보아도 언어를 매개로 하며 지식, 규범, 정보, 정동 등 모두와 관계하는 문학이 커먼즈에 속하리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들의 논의를 좀더 따라가면, 심지어 문학처럼 지적이고 문화적인 커먼즈야말로 오늘날 가장 중요한 커먼즈라는 추론에 다다른다. “가치평가 과정에서 비물질 생산의 헤게모니 혹은 우위를 향한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지금의 자본주의는 과거와 근본적으로 다르고, 여기서는 “가령 이미지, 정보, 지식, 정동, 코드, 사회적 관계가 자본주의적 가치평가 과정에서 물질적 상품이나 상품의 물질적 양상을 능가하고 있”기 때문이다.6 랑시에르가 ‘문학’의 역사적 성립이 곧 문학적 평등과 민주주의의 도입이라 본 것처럼, 하트와 네그리도 사회적 생산에서 비물질성의 중요도가 증가하는 오늘날의 변화가 곧 커먼즈 자체의 위력이 강화되는 과정이라 낙관한다. “현재의 자본주의적 생산 및 축적 형식은 자원과 부를 사유화하려는 여전한 충동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공통적인 것의 확장을 가능하게 하고 또 심지어 요구”하는바, 비물질 생산이 지배적인 새로운 생산방식에서 “생산자들은 점점 더 (…) 공통적인 것에 대한 열린 접근뿐 아니라 고도의 자유를 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7

그런데 현재의 경향들이 문학을 일종의 커먼즈로 재확인해준다 해도, 또 하트와 네그리의 커먼즈 논의가 문학에 유효하다 해도, 문학을 커먼즈로 볼 수 있다는 점이 이른바 ‘문학성’이라 부를 수 있는, 그러니까 문학의 핵심적으로 문학다운 성격에 어떻게, 또 얼마나 깊숙이 관계하는가 하는 질문은 남는다. 문학은 다른 무엇에 앞서 커먼즈인가, 아니면 일단은 커먼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게 다른 무엇인가, 하는 질문 말이다. 이 질문은 일차적으로 문학이란 어떤 것인가를 묻는 형식이지만 여기에 적절히 답하려면 술어에 위치한 커먼즈를 주어의 자리로 소환할 필요가 생긴다. 문학이 어떤 것이기에 커먼즈인가를 탐문하는 방향과 커먼즈가 어떤 것이기에 문학이 커먼즈인가를 살피는 방향이 만나는 지점에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 질문을 놓치지 않는 선에서 커먼즈 논의를 좀더 따라가보자. 지적·문화적 커먼즈와 관련하여 하비(D. Harvey)는 그것이 물리적 커먼즈와 달리 희소성의 원리에 지배되지는 않지만 “질적 저하와 인클로저의 논리(a logic of debasement and enclosure)에서는 자유롭지 않아서, 변질되고 부패하고 가치가 떨어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정보의 상업화, 가짜 뉴스, 댓글 조작 같은 사안을 생각하면 “오늘날 재현물에 대한 가장 심각한 비판은 정보의 질의 타락을 비롯하여 정동, 기호, 코드의 타락”과 관련되어 있음은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사실이다. 하비는 이 현상이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가장 거대한 커먼즈”, 즉 화폐가 갖는 가치의 타락이나 평가절하와 유사하다고 본다.8 당연히 문학 역시 질적 저하와 가치 하락이라는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이 문제는 애초에 문학에서 가치라는 것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살피지 않으면 제대로 접근할 수 없다. 이는 다시 문학이 커먼즈로서 어떤 특성을 갖는가, 혹은 문학이 커먼즈라면 이때 ‘공통적인 것’ 혹은 ‘함께 나눔’이 어떤 성격인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대안근대성’(altermodernity)을 표방하느니만큼 하트와 네그리의 커먼즈론도 화폐가치를 넘어서는 새로운 가치이론을 중요하게 부각한다. 그들은 새로운 가치가 “저항이 넘쳐흐르고 창조적이고 무한할 때, 그래서 인간 활동이 권력 균형을 초과하고 그 내부의 틈을 밝혀낼 때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국가나 자본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연히 보여주는 것으로 내세워온 발전에 대한 관리가 다중(multitude)의 저항, 노동력, 그리고 사회적 단독성(singularity)들의 전체를 더는 저지하지 못할 때, 그때에야 가치가 존재할 것”9이라 했으므로, 그들의 논의에서 가치와 커먼즈는 상호 구축하는 관계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하비는 이렇게 만들어지는 커먼즈의 대안적 가치가 어떻게 객관화되는지, 그럴 때 화폐가치와 어떻게 거리를 유지하는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10 그런데 애초에 이런 의문이 제기되는 이유는, 가치가 화폐가치 바깥이나 그 너머에서 만들어진다는 기원적 소재 차원과 별도로, 애초에 화폐가치로 환수되려야 될 수 없는 그것의 성격, 다시 말해 가치의 ‘창조성’ 혹은 ‘무한성’ 자체가 충분히 해명되지 못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 지점에서 문학에서의 가치, 그리고 무엇보다 문학에서의 ‘함께 나눔’이 갖는 성격을 탐구한 비평가, 리비스(F. R. Leavis)를 떠올리게 된다.

 

 

2. 리비스의 커먼즈론

 

스노우(C. P. Snow)의 이른바 ‘두개의 문화’(Two Cultures)론을 더할 나위 없이 신랄하게 논평한 글에서, 리비스는 스노우가 물질세계를 다룬 과학적 업적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찬탄한 대목을 두고, 그보다 선차적이며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하지만 스노우는 전혀 알아보지 못한) “협동적 창조”(collaborative creation)가 있는바 “언어를 포함하는 인간적 세계의 창조”가 그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적 세계라는 표현은 언뜻 전통과 유산 같은 것을 연상시키지만, 과거에 이미 만들어져서 우리가 그저 가져다 쓰거나 기댈 수 있는 게 아니라 “현재를 바꾸기 위한 살아 있는 창조적 반응에서만 살아 있는” 세계, 다시 말해 협동적 창조를 통해 생성될 뿐 아니라 그것을 통해 지속되는 세계를 말한다.11 리비스의 문제의식에 비추면 이 세계를 단순히 문화적 커먼즈로 부르는 것은 온당치 않고, 하트와 네그리가 구분한 물질적 생산과 비물질적 생산 모두의 전제가 되는 인간문명으로서의 커먼즈에 가깝다.

그렇다면 커먼즈 논의가 핵심적으로 겨냥하는 소유라는 면에서는 어떨까. 커먼즈론이 보여준 문제의식의 근간에 사적 소유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 있고, 하트와 네그리의 논의 또한 재산권을 신성시하는 ‘재산 공화국’(the republic of property)을 극복하여 ‘공통의 부’(commonwealth)로 나아가는 데 초점을 둔다. 리비스의 문학론은 물론 재산권을 직접 다루지는 않는다. 대신 그는 ‘인간적 세계’에서 무언가를 갖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이야기한다. 과학과 기술의 전례 없는 발전으로 변화가 가속화되고 변화의 결과 또한 중요해지는 상황에 직면한 인류에게 “온전한 인간됨의 온전히 지적인 보유”(full intelligent possession of its full humanity)가 절실하다고 지적하는 과정에서, 리비스는 이때의 보유 혹은 ‘가짐’이란 “우리에게 속한 것, 곧 우리의 재산에 대한 당당한 소유권(ownership)”을 말하는 게 아니라고 부연한다. 법률적 의미로 보아도 소지하거나 보유하고 있음을 뜻하는 ‘possession’과 재산 소유자로서의 권리인 ‘ownership’은 구분되지만, 리비스가 단순히 그런 구분을 말하는 건 아니다. 여기서 ‘가짐’이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가 그에 속한 (…) 것을 향한 근본적이며 살아 있는 경의(deference)”를 뜻한다.12 관습적 소유 관념에 전제된 주체-대상의 관계를 전복시키면서 실상 그런 방식으로 소유할 수 없음을 깨닫고 존중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런 전복이 성립하는 조건은 ‘온전한 인간됨’이라는 것이 역설적으로 ‘온전히’ 인간에게 귀속되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것에 열려 있으며 그 자체 또한 측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13 그런 점에서 인간적 세계 역시 인간적인 것 이상의 세계에 기대고서야 성립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통상적으로 무언가를 갖는다는 뜻이 전혀 아님에도 여전히 ‘갖는다’고 표현하는 것은 어째서일까? 아마도 우리가 속한 무엇을 향한 깨달음과 존중이 일회적 사건이 아닌, 계속해서 살아 유지되는 것이어야 하는 까닭으로 보인다. 이런 뜻의 소유는 앞서 언급한 ‘살아 있는 창조적 반응’으로 이루어지는 ‘인간적 세계의 창조’에 합당하게 조응하며, ‘재산 공화국’의 해체가 사유냐 국유냐 혹은 공유냐를 논하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갖는다는 것’ 자체에 관한 생각을 바꾸는 데까지 이르러야 함을 환기한다.

다소 추상적이고 막연하게 느껴지는 리비스식 커먼즈론은 문학을 논할 때 구체적 실감을 더한다. 리비스의 논의에서 본래적 커먼즈의 시공간은 그가 ‘제3의 영역’(the third realm)으로 지칭한 데 놓인다. 여기서 ‘제3’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사적이지도 개인적이지도, 또 실험실에 들고 들어가거나 딱 지목할 수 없다는 점에서 공적인 것도”14 아니라는 뜻이다. 이 독특한 영역이 어떤 성격이며 또 그것이 단순히 독특한 영역이 아니라 다른 무엇에 앞서는 ‘선차적인’ 영역임을 제대로 알아보려면, 문학 특히 문학에서 이루어지는 판단이 가치를 띠는 기제를 살펴야 한다고 리비스는 말한다. 그는 ‘인간적 세계’의 중요한 일부인 언어에서 “개별 존재들이 어떤 의미 안에서 만날 수 있어야만 의미”라는 것이 있을 수 있듯이,15 가령 한편의 시는 “페이지에 적힌 검은 글자들에 대한 개개인의 재-창조적인(recreative) 반응으로만 ‘거기’ 있”으며, 이런 반응들이 서로 “만날 수 있게” 되는 어떤 것이 시다.16

물론 우리는 인쇄된 페이지의 글자들을 가리켜 이것이 시라고 지칭하기도 하지만, 리비스가 말하는 바는 시가 정말 시답게 존재하는 방식, 그러니까 협동적 창조를 통해 생성되며 그것을 통해 지속되고 또 ‘소유’되는 것으로서 시가 존재하는 방식이다. 문학에서 이런 ‘재-창조적인 반응’과 ‘만남’은 곧 (비평전문가의 전유물이 아닌 ‘누구나’에게 개방된) 비평적 판단(judgement) 과정 그 자체다. 비평적 판단은 남의 것을 그대로 가져다 써서는 의미없다는 점에서 개인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의 “내재적 형식”은 “이건 이렇습니다, 그렇지 않나요?”와 “그렇지요, 하지만”으로 구성되는 대화, 더 정확히는 무수히 서로를 촉발하는 대화의 연쇄이며 이 연쇄는 또한 가치의 유통과정과 다름없다. 여기서는 나의 ‘소유’를 주장하는 행위가 공통적인 ‘소유’임을 강화하고 또 그럼으로써 ‘소유’의 숨은 주체를 드러낸다. 시를 “어떤 의미로 공적인 세계의, 공통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무엇으로서 ‘거기 있’”게 하는 행위로서, 비평적 가치판단은 협동적 창조의 범례이다.17

리비스의 문학론을 참조하면, “일반적으로는 공()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커먼즈가 실제에 있어서는 공(), 공(), 사() 영역 전반에 걸쳐 작동”18한다는 사실이 재확인되지만, 커먼즈가 이들 영역을 단순히 아우르는 데 그치지 않으며, 그 영역들이 가능하기 위해 먼저 있어야 하는 장()이 커먼즈의 본래 거처라는 점도 분명해진다. 시를 ‘거기 있게’ 하는 비평의 협동적 창조과정은 “커먼즈를 통해 자원을 얻고 주체가 되는 과정, (…) 공동체를 능동적으로 구성 및 재구성하는 전 과정을 일”컫는 “커머닝(commoning)19과 상응할 것이다. 다만 이때도 커먼즈가 커머닝과 별도로 존재할 수 없으며, 오히려 커머닝을 통해 구성되고 재구성되기 ‘때문에’ 커먼즈가 비로소 존재한다는, 따라서 커머닝이야말로 커먼즈임이 문학에서 더욱 확연해진다. 하비가 던진 가치의 객관화라는 질문은 어떻게 될까. 리비스의 논의를 짚어가면, 가치가 어떻게 객관화되는가 하는 질문 자체가, (다른) 가치가 객관화를 어떻게 (다르게) 이해하게 만드는가 하는 문제로 이미 전화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그 때문에 자본주의의 지배적 가치형태인 화폐가치와 어떤 관계냐는 질문이 전적으로 무화되지는 않겠지만, 화폐가치란 다만 협동적 창조라는 ‘객관적’ 사건을 매우 흐릿하고 대체로 왜곡하여 반영할 따름임을 잊지 않을 좋은 방편이 된다.

 

3. 문학의 자율성과 문학의 죽음

 

문학이 그 근본에서 커먼즈이고 문학을 비롯한 커먼즈로서의 인간적 세계가 공(), 공(), 사()의 구분보다 선차적이라는 통찰은 언제든 중요하겠으나,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어떤 것이든 또 어떤 식으로든 말할 수 있음이 한층 가시화된 오늘의 문학을 사유하는 데 특히 의미심장하다. 문학의 몫이 누구에게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할수록 그 ‘있음’에 담긴 본뜻이 더욱 중요해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그만큼 구태여 그것을 생각하지 않을 방법도 많아진다. 실제로 문학이 ‘언제나 이미’ 커먼즈임을 선뜻 인정해버림으로써 도리어 커먼즈가 어떤 의미인지 묻는 일을 방기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이를테면 언어란 궁극적으로 특정 개인이 독점할 수 없는 소통수단이니 당연히 커먼즈이고 그러니 언어를 매체로 하는 문학 역시 커먼즈라는 익숙한 논법이 그렇다. 이런 식의 정리는 문학을 커먼즈로 호명하는 동시에 그 사실을 두고 더 생각할 필요가 없음을 보증해주는 논법이다.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가 보여주었듯이 이론에서 일어난 ‘언어로의 선회’ 역시 사회와 역사를 포함하는 구체적인 삶과 현실로 다가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언어체계의 내적 구조나 문학적 언어의 구조적 특이성에 몰입하며 언어의 자율성 혹은 문학의 자율성이라는 논제를 직접적으로 뒷받침하거나, 혹은 자율성의 불가능성을 줄곧 언급하는 부정적인 방식으로 논제 자체를 지속시키기 일쑤였다. 한국문학의 역사에서도 문학의 매체는 언어이고 언어란 기본적으로 사회적이고 역사적이니 문학 또한 언제나 이미 사회적이고 역사적이라는 산뜻한 인정이, “문학과 사회의 길항이라는 긴박한 현실적 의제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거나 혹은 우회해”20버리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리비스가 문학의 ‘거기 있음’을 어떤 경로로 설명하는지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는 언어가 협동적이므로 문학이 커먼즈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문학에서 의미와 가치를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협동적 창조야말로 언어가 갖는 커먼즈로서의 본성을 가장 여실히 체현한다는 것이 그의 논지였다.

한국문학에서 문학의 자율성이라는 논제는 실로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며 ‘근대문학 종언론’과 ‘문학의 정치’ 논의마저 우회했고, 최근에는 쏟아져 나온 페미니즘 문학에 대한 평가를 계기로 정치적 올바름의 반대편 자리에서 여전히 하나의 지평으로 기능한다. 언어의 자율성보다 어쩌면 더 오래 문학의 자율성의 토대 역할을 한 것은 사적 주체 혹은 개성적 주체로서의 ‘개인’의 자율성이다. ‘엄밀히 말해 한국사회에는 개인이 없다’는 익숙한 개탄이 실상 ‘한국사회는 충분히 근대화되지 않았다’는 의미를 동반하며 오래도록 유통된 데서도 드러나듯, 문학적 주체로서의 개인의 강조는 근대적 주체의 상상과 이어진 문제로서 근대화의 어젠다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었다. 이때 ‘개인의 없음’은 단순히 부재를 지칭하지 않으며 부재를 말하는 방식으로 개인을 핵심 주체로 정립한다.

가령 ‘한국문학의 가능성’이라는 막중한 주제를 다룬 1970년 김현의 글은 “한국에서는 어떤 종류의 예술이 가능한가”를 묻고, 이 질문이 “오늘날의 한국사회가 요구하는 이념형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문화 담당층이 아직 형성되지 않”고 있는 “현 상황을 주어진 환경으로 수락하는” 태도를 강조하면서, 여기에 맞는 이념형으로 “신분적 불평등을 진리로서 수락함으로 그것을 뛰어넘는 어려운 정신적 곡예”를 수행하는, 다시 말해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수락하고 인정함으로써 그것을 극복한다는 불교적 태도”를 제시한다. 이런 정신주의를 감당할 수 있는 주체는 개인일 수밖에 없는데 그것도 “높은 개인의식 때문에 얻어지는 개인의 강렬한 승리”를 이룰 수 있는 일종의 초월적 개인이다.21

이런 논의에는 개인과 현실, 혹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사이의 구분이 다분히 극단적인 방식으로 기입되어 있다. 개인 대 현실의 구도에서 공적 영역에 상응하는 집단 주체가 전혀 다루어지지 않은 것은 물론 아니다. 1960년대 말 김주연의 소시민문학론에 제시된 문학적 주체인 소시민은 근대적 공적 주체를 생각할 때 흔히 떠올리는 시민에 대한 대항개념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수행한 기능은 사실상 공적 주체를 사적인 영역으로 재환수하는 역할이었다. 김승옥을 위시한 60년대 문학을 샤머니즘, 인습, 풍속 등등의 전근대적 성격에서 마침내 벗어난 근대문학의 분기로 제시하면서 김주연은 그 특징으로 개인의식 혹은 개인화를 들고 이를 다시 ‘소시민의식’으로 지칭한다.22 왜 시민이 아니라 소시민인가를 두고 그는 한국사회에서 시민은 아직 부재하는 반면, 소시민의식이야말로 “출발의 단서이며 외면할 수 없는 현실 속의 방법론”으로 주어져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애초에 그에게 “시민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의식을 자율적으로 하고 의식된 생각을 자율적으로 표현한다는 점”이므로, 결국 부재하는 시민은 개인의식의 주체로서 실재하는 소시민과 개념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23

그 이래로도 자율성 논의는 우리 모두가 개인이라는 것(혹은 아직 개인이 되지 못했다는 것) 말고는 공동의 혹은 공통적인 차원을 적극적으로 감지하지 않는다. 대신 개인의식이 갖는 자율성으로 세계를 정신적으로 초월하거나 아니면 초월의 실패를 개인의식의 징표로 삼아 다시 세계와 대립하는 ‘어려운 정신적 곡예’를 여러 방식으로 되풀이해왔다. 이같은 개인의 이념형은 내면성의 주체나 진정성의 주체로 계속 변주되어오다가 끝내 초월의 불가능을 인정한 채 죽음을 선고받기도 했다. 하지만 부재를 두고 그러하듯 죽음을 개탄하는 방식으로 개인 주체를 텅 빈 중심에 계속 세워두는 일은 얼마든지 이어질 것이다. 이른바 근대문학 종언론이 말한 문학의 죽음 역시, 근대문학 자체가 “이미 그 자체로 자신의 소멸에 대한 응시, 자신의 불가능성에 대한 성찰”이었다는, 그래서 시작부터 “이미 ‘죽음’에 침윤되어 있”었다는24 논리를 통해 오히려 문학의 출발점이자 문학적 자율성의 가능성으로 역전되기도 했다. 처음부터 죽음과 더불어 있던 근대문학 대신 실제로 죽어 속물 혹은 동물이 되었다고 선언된 진정성의 주체에도25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 “역사의 종언에도 불구하고 잔여적으로 남은 한줌의 부정성, 여기에 여전히 문학의 어떤 진정한 가능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과연 어려운 일일까”를 반문하며 이번에는 진정성을 더 섬세하게 분별하여 “[푸꼬적] 장치로서의 내면/서정적 자아(역사성)와 진정성(현실성)의 분리를 도모”하고 그리하여 종언을 맞은 건 “기존과는 다른 방식(캠페인)으로 작동하는 진정성이지, 진정성 자체는 아니”26라고 역전된다.

이처럼 문학과 문학의 주체가 심오한 내적 부정성을 매개로 죽음과 부활의 센티멘털리즘을 연출하는 동안에도 좀체 부정되지 않은 것은 ‘역사의 종언’ 혹은 의미있는 현실 변화의 불가능성이었다. 이 압도적인 부정성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문학의 소생은 겸허하든 비장하든 결국 자율성의 폐쇄된 공간을 벗어나지 못한다. 협동적 창조의 범례로서 삶과 현실의 창조적 가능성을 증언하는 문학에 대한 존중과는 더더구나 거리가 멀다. 랑시에르는 “예술이 집단적 존재조건의 절대적 변화를 수행할 능력을 가졌다는 생각”27이 끝났다는 주장이 만연한 이후의 예술을 두가지로 분류한다. 하나는 ‘숭고’ 개념이 보여주듯이 예술의 진정한 급진성이란 예술의 단독성, 다시 말해 예술과 현실 사이의 근본적인 이질성 내지 통약 불가능성을 강조하는 데 있다는 태도다. 다른 하나는 반대로 예술이 세계를 바꾸지도 또 무슨 단독성을 주장할 입장도 아니기에 이른바 ‘관계적 예술’이 그러하듯 모호한 공동의 소속감을 고취하고 막연한 유대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사회적 중재 기능을 담당한다.28 한국 문학장에서 문학의 자율성론이 보여준 스펙트럼도 바로 이 두가지를 축으로 전개되어왔다.29

 

 

4. 문학이라는 커머닝

 

끝났다고 하기엔 너무 생생한 역사적 시간들을 경험하는 오늘, 문학장에서도 공공성을 강조하며 문학의 자율성의 종언을 선언하고 새로운 문학의 도래를 말하는 목소리들이 전면에 나서고 있다. “이제까지의 문학을 지지하고 재생산하는 데 기여해온 문학 자율성 테제나 그 신화가 붕괴되”고 “‘나’의 가치로 정향된 사회와 문학의 구조”가 바뀌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네트워킹된 발화”와 “연대의 정동”을 이야기하는 김미정의 논의30도 그중 하나다. 그는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이 불러일으킨 공감과 비판을 예로 들면서, 문학을 둘러싼 기술적·물질적 조건의 변화나 그 변화가 야기한 말과 감각의 변화, 그리고 무엇보다 “문학장을 향해 직접 자신을 발화하고 욕망을 주장하기 원하는 새로운 독자들”이 기존의 문학적 ‘대의/재현’을 흔들고 있다고 본다.31 한국문학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임경규 역시 “문학의 자율성은 이제 신화가 되었다. 아니 (라캉적인 의미에서) 폐제(foreclosure)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복원 불가능해진 것이다”라고 강조하고, “문학과 정치의 경계가 와해되고, 문학과 사회의 경계가 와해되고, 문학과 저널리즘의 경계가 와해되면서, 새로운 혼종적 문학” 혹은 “정치적 올바름의 문학”이 등장했음을 알린다.32

하지만 이같은 자율성 종언론은 문학이 그 본연의 사회성을 통해 사회성 자체를 어떻게 다르게 보게 하는지, 그리고 문학이 개인들의 협동적 창조라는 존재방식을 통해 주체와 대상에 대한 통념을 어떻게 바꾸는지는 살피지 않는다. 그렇기에 “문학이 더이상 사회를 상징화할 수 없는 무력함을 견디지 못한다는 듯이, 더욱 직접적으로 성난 듯이, 문학 속에 사회가 들어와 있다고 강변”하는 데 지나지 않으며, “문학에서 작용하는 주관성을 개인이 아니라 상호주관적인 공통성으로 환원함으로써 ‘주체 없는 글쓰기’가 아니라 보다 농밀한 주체를 불러들”33인다는 비판을 불가피하게 야기한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사안을 다루거나 ‘직접 자신을 발화하여’ 널리 공감을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것은 자율성 담론만큼이나 오래된 일이다. 그런 일을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직접적이고 의식적으로 하게 될 경향도 늘 잠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올바름 혹은 어떤 공감도 우리를 정말 사는 듯이 살아 있게 하는가라는 물음을 대체하지 않으며 공공성 역시 그 물음의 자장에서 발생해야 마땅하다.

문학의 공공성에 대한 대개의 주장은 사실상 랑시에르가 말한바, 일찍이 역사적인 문학, 그리고 근대적 예술체제가 성립시킨 ‘누구나, 어떤 것에 대해서든, 어떤 식으로든’의 평등을 반복해서 진술하는 데 그친다. 랑시에르의 문학적 평등이 놓치고 있는 것은 ‘누구나’와 ‘아무것’의 집합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집합이 서로를 연루하고 촉발하는 만남일 때, 그리고 그 만남이 이룩하는 것이 의미의 구축이자 가치의 창조일 때, 비로소 문학은 성립한다는 점이다. 개인 혹은 개인들이 언제나 이미 가졌지만 또한 새로이 누리게 된 몫을 행사하는 일이 커먼즈로서의 문학이 갖는 일면임은 분명하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일치와 불화, 공감과 연대도 의미있는 사건이다. 하지만 더 근원적인 의미에서, 문학의 몫이란 나의 것으로도 또 모두의 것으로도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함께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커머닝으로서만 거기 있음을 기억하는 일이 무엇보다 선차적일 것이다. 모든 뛰어난 작품들은 그와 같은 커머닝의 ‘강렬도’와 더불어 우리에게 도래했다.

 

 

  1. 이 글에서는 공유지, 공유재, 공유자원 등으로도 번역되는 ‘commons’를 ‘커먼즈’로 옮긴다. 이 용어의 번역과 관련해서는 백영경 「복지와 커먼즈: 돌봄의 위기와 공공성의 재구성」, 『창작과비평』 2017년 가을호 25면 각주 5번 참조.
  2. 윤재민 「레알폴리티크Realpolitik를 건너는 한국의 ‘문학성’: 다시 그것을 건너기 위한 시도」,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7년 봄호 47면. 이 글이 침울한 진단으로 일관하는 것은 아니고 ‘레알폴리티크’의 물질성에 맞서 ‘문학성’을 성공적으로 제도화한 과거의 시도들을 계승할 필요를 강조한다.
  3. Jacques Rancière, The Politics of Literature, trans. Julie Rose, Polity 2011, 4~13면 참조. 그에 따르면 ‘문학’은 19세기에 와서야 지금의 의미, 곧 ‘배운 자들의 지식’이 아닌 ‘글쓰기 예술’(art of writing)이라는 의미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하지만 랑시에르는 그런 일차적 의미보다 재현과 관련된 위계와 구분을 무너뜨린 근대적 예술체제(미학적 체제)를 확립하는 데 ‘문학’이 결정적 계기였음에 초점을 맞춘다.
  4. Jacques Rancière, Disagreement: Politics and Philosophy, trans. Julie Rose,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9, 14면. 이 구절은 데이비드 하비의 「커먼즈의 미래」(『창작과비평』 2017년 가을호)에도 인용되어 있는데, 거기서는 커먼즈가 모순적인 것이며 정치가 본질적으로 그렇듯이 논쟁을 유발한다는 점, 말하자면 불화의 도입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인용된다. 한편 널리 알려진 랑시에르의 ‘감지 가능한 것의 배분’이라는 개념 자체도 ‘공동의 것’을 드러내고 그 경계를 설정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Jacques Rancière, The Politics of Aesthetics, trans. Gabriel Rockhill, Continuum 2004, 12면 참조.
  5. Michael Hardt & Antonio Negri, Commonwealth, Harvard UP 2011, 서문 ⅷ. 이들이 대개 ‘공유지’처럼 물질적인 것을 연상시키는 커먼즈라는 표현을 피하는 이유도 이와 관련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커먼즈에 관련된 용어상의 차이(및 그에 함축된 일정한 입장 차이)는 논외로 두고 커먼즈 논의로 통칭한다.
  6. 같은 책 132면. 한편 데이비드 하비는 하트와 네그리가 ‘비물질적 생산’을 파악하는 방식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맑스에게 이미 이런 발상이 있었고 더욱이 맑스는 생산의 비물질적이면서도 ‘객관적인’ 계기를 강조한 반면, 하트와 네그리는 그같은 객관적 계기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음이, 가령 자본의 금융화를 강조하면서도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는 ‘의제자본’(fictitious capital)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는 데서 드러난다고 지적한다. 하비의 지적과 하트·네그리의 답변에 관해서는 David Harvey, 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Commonwealth: An Exchange,” Artforum 48:3 (2009) 214~15면 참조.
  7. Michael Hardt & Antonio Negri, 앞의 책 서문 ⅸ~ⅹ.
  8. David Harvey, 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앞의 글 221~22면.
  9. Michael Hardt & Antonio Negri, 앞의 책 319면.
  10. David Harvey, 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앞의 글 222면. 이 지적에 담긴 하비의 문제의식은 화폐가치와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화폐가치로 옮겨지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사유해야 한다는 요청으로 보인다.
  11. F. R. Leavis, Nor Shall My Sword: Discourses on Pluralism, Compassion and Social Hope, Chatto & Windus 1972, 61면.
  12. 같은 책 60면.
  13. 같은 곳.
  14. 언어관을 비롯하여 리비스의 문학론 일반에 관해서는 김영희 『비평의 객관성과 실천적 지평』(창작과비평사 1993), 정남영 「리비스의 작품비평과 언어의 창조적 사용」, 『영미문학연구』 6(2004) 등 참조. 이 글은 리비스의 문학론 가운데 커먼즈 논의와 관련이 깊다고 여겨지는 일부 대목에 논의를 한정한다.
  15. F. R. Leavis, The Living Principle: ‘English’ as a Discipline of Thought, Chatto & Windus 1977, 58면.
  16. F. R. Leavis, Nor Shall My Sword 62면.
  17. 같은 곳.
  18. 백영경, 앞의 글 23면.
  19. 같은 글 28면.
  20. 서은주 「1970년대 문학사회학의 담론 지형」, 『현대문학의 연구』 45(2011), 499면. 이 글은 1970년대 문학사회학의 도입이 실제로는 문학과 사회의 관계를 깊이 고민하지 않을 핑계로 작용했다고 평가한다.
  21. 김현 「한국문학의 가능성」, 『창작과비평』 1970년 봄호. 인용은 44~46면, 54~56면.
  22. 김주연 「새시대 문학의 성립: 인식의 출발로서 60년대」, 『아세아』 1969년 2월호 253~55면. 소시민문학론에 관한 상세한 분석은 졸고 「소시민문학론과 근대화」, 『인문논총』 74:3(2017) 참조.
  23. 김주연 「계승의 문학적 인식: <소시민의식> 파악이 갖는 방법론적 의미」, 『월간문학』 1969년 8월호 58면, 51면.
  24. 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119면, 122면
  25. “근대문학의 종언은 근대소설의 죽음을 넘어서, 근대소설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가치, 정신, 태도의 사회적 구조인 진정성의 윤리 그 자체의 죽음을 지시하고 있다.” 같은 책 131면.
  26. 강동호 「파괴된 꿈, 전망으로서의 비평」, 김형중·우찬제·이광호 엮음 『한국문학의 가능성: 문지의 논리 1970-2015』, 문학과지성사 2015, 336면, 343면.
  27. Jacques Rancière, Aesthetics and Its Discontents, trans. Steven Corcoran, Polity 2009, 19면.
  28. 같은 글 21면, 120~23면 참조.
  29. 이와 관련해서도 강동호의 앞의 글은 시사적이다. 그는 “역사의 종언이라고 불리는 이 암담한 시대의 무기력 속에 있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그리고 경험적으로 부정할 수 없다”(347~48면)면서도 다른 한편 희망을 보존하기 위해 ”역사로서의 비평의 비판적 대화 가능성”은 여전히 포기하지 말자고 강조한다. 또한 그는 “내면을 유일한 형식으로 삼는 독백적 혹은 자기고백적 진정성이 아니라 ‘대화적 진정성’으로의 전환”을 요청하는데 또 그러면서도 “철저하게 이 대화가 사유의 통약 불가능한 지점으로 이끌도록 적극적으로 독려해야 한다”고 주문한다(353면). 종언과 희망, 대화와 통약 불가능성 사이의 메워지지 않는 간극이 바로 문학적 자율성의 ‘정치’일 것이다.
  30. 김미정 「‘나-우리’라는 주어와 만들어갈 공통성들: 2017년, 다시 문학의 공공성을 생각하며」, 『문학3』 2017년 1호 21면, 24면, 22면.
  31. 김미정 「흔들리는 대의/재현의 시간: 2017년 한국소설 안팎」, 『문학들』 2017년 겨울호 48면.
  32. 임경규 「정치적 올바름 vs. 예술의 자율성: 다문화시대 문학의 운명」, 『문학동네』 2017년 겨울호 388~89면.
  33. 서동진 「서정시와 사회, 어게인!」, 『문학동네』 2017년 여름호 282면, 28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