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문학의 새로움과 리얼리즘 문제
손정수의 반론에 답하며
한기욱 韓基煜
문학평론가, 인제대 영문과 교수. 주요 평론으로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세계문학의 쌍방향성과 미국 소수자문학의 활력」 「한국문학의 새로운 현실 읽기」 등이 있음. englhkwn@inje.ac.kr
글머리에
작년 겨울호 『창작과비평』의 특집‘문학이란 무엇인가’는 촛불의 빛과 위력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의 글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의 시발 역시 촛불이었다.‘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묻는 한 방편으로‘문학의 새로움’을 화두처럼 붙든 것은 촛불집회의 유연하고 독특한 방식에서 기존 시위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면모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새로움으로 인해 사람들의 생각과 느낌이 달라지고, 어쩌면 세상 자체가 달라진 듯했다. 아니, 사람들의 생각과 느낌, 세상 자체가 이미 달라져 있다가 새로움으로 피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도래하는 새로움에 어울릴 법한 문학의 새로움이 있다면 그것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런 물음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문학의 새로움’에 대한 필자의 탐구는 겨우 몇걸음을 내디딘 정도였다. 새로움에 대한 발본적인 물음은 계속 쌓여가는 새것 더미 속에서‘새것다운 새것’과‘사이비 새것’-이를테면 포장이나 무늬만 새것인 것-을 분별하는, 품이 많이 드는 비평작업과 분리될 수 없다. 말하자면 이중적인 과제인 것이다. 지난 글에서는‘새로움에 강박된 최근 독법’의 몇몇 사례를 살펴보고 그 밑바탕에 깔린 편의적이고 허구적인 전제들을 지적하는 일에 치중했지만, 그 근본 취지는 어디까지나 이러한 과제의 수행에서 구체적인 비평작업이 필수적임을 강조하려는 데 있었다.
그후 필자가 비판한 비평가들 중 하나인 손정수(孫禎秀)의 거센 반론이 지난호 『창작과비평』에 실렸다. 특집 글 가운데 백낙청과 필자의 글을 겨냥한 것이었는데, 그의 반론에 일일이 재반론을 펴자면 끝이 없을 듯하다. 주로 필자에 관한 부분에 한정하여 답한다. 이를 계기로 문학의 새로움에 관한 논의가 조금이라도 진전되었으면 한다.
새것 강박에서 벗어나야 할 이유
필자가‘새로움에 강박된 독법’의 문제점을 제기한 데 대해 손정수는 새로움에 강박된 독법과 그렇지 않은 독법의 구분이 창비가 만들어낸‘허구적인 이분법의 구도’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하며 이렇게 말한다.
넓게 보자면 새것에 대한 강박은 몇몇 비평가들에게만 한정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우리사회가 생존해온 삶의 형식 자체가 그러한 편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봐야 한다. 새삼스러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 점에서는 창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어느 시점 이후 창비라는 출판자본의 운영방식이 그렇고, 백낙청의 배수아나 박민규 소설에 대한 편향 역시 넓게 보면 그런 강박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새로움에 대한 강박에 걸린 비평가들과 그렇지 않은 비평가들을 대립시키는 구도는 스스로를 현실로부터 소거한 후에야 가능한 허구적인 것이다.1
손정수는 여기서‘새로움에 강박된 독법’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을‘우리사회가 생존해온 삶의 형식 자체’의 탓으로 돌린다. 그런 형식 자체가 지닌‘새것에 대한 강박’에서 오늘날의 비평가들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분명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런데 비평이‘새것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온전한 삶의 관점에서 새것다운 새것을 가려낼 수 없는 것일까?
물론 쉬운 작업은 아니다. 그러나 어렵다고 포기할 수 있는 사안이 결코 아님은 이런 질문을 해보면 분명해진다. 가령 오늘날의 비평이 자본주의적 삶의 형식 속에 내장된‘새것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포기할 때 자본주의 상품미학을 거스를 수 있을까? 그런 노력을 포기할 때 문학이 (랑씨에르적 의미에서) 정치적이 될 수 있을까? 요컨대, “우리사회가 생존해온 삶의 형식 자체가 그러한 편향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편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비평적 노력이 그만큼 더 절실해진다. 그러니 손정수는 배수아나 박민규 소설에 대한 백낙청의 비평이 “넓게 보면 그런 강박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어림으로 말할 게 아니라 그것이‘새것에 대한 강박’에 휘둘린‘편향’인지 그런 강박에서 벗어난 독법인지 비평적으로 따질 일이다. 그럴 때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새것에 대한 강박’을 불편해하기는커녕 되레 정당화하려는 손정수 자신의 태도가 아닐까.
여기서 강유정(姜由禎)의 반론에 대해서도 잠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는데, 그의 경우는 손정수와 또 다르다. 애초에‘새로움에 강박된 최근 독법’의 폐단을 날카롭게 비판한 것은 그였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도 그런 강박이 있음을 지적당하자 논법을 바꾼다. 강유정은 필자가‘새로움에 강박된 독법’을 비판하는 까닭이 “사실상 2000년대에 등장한 새로운 세대가 소설의 패러다임을 교체해나가는 것에 대한 불만”2에서 비롯된 것으로 넘겨짚는다. 필자는 2000년대에 새로운 세대의 작가들이 대거 등장함으로써 우리 문학의 작가층이 두터워지고 문학지형이 크게 바뀌고 있는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 새로운 세대가 일방적으로 “소설의 패러다임을 교체해나가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시 장르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판단하지만, 소설의 경우 2000년 이전에 등단한 작가들과 이후에 등단한 작가들이 저마다 자기 문학의 새로움을 보여주기 위해 분투함으로써 한국문학이 만만찮은 활력을 보이고 여러 세대와 성향을 가로질러 새로운 소설형식들이 실험되고 창안되고 연마되고 있다. 이 활력 가운데 서로 다른 세대와 경향의 작가들 간의 예술적 교호작용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움과 낡음의 기준을 세대론적 경향으로 갈음하거나‘근대문학의 종언과 그 이후의 문학’이라는 프레임에 따라 정하는 것은 편리하기는 하되 생산적인 방식은 아니다. 새로움과 낡음의 분기점으로 제시된 손정수의‘투명한 현실의 재현’이나 강유정의‘시각중심의 근대성’의 기준에 반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박민규 소설 평가문제
손정수의 비판이 종종 억측이나 무리한 주장으로 나아가는 데는 창비의 문학관이나 창비 내부의 메커니즘에 대한 완강한 선입관이 큰 몫을 하는 듯하다. 손정수를 포함한 몇몇 비평가들에게 창비의 실상에 부합되지 않는 이미지가 끈질기게 남아 있는 것은 그들의 구도에서 볼 때 창비의 실상이 이미지보다 훨씬 불편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가령 박민규 소설에 대한 평가 문제에서 그러하다. 박민규의 『카스테라』(문학동네 2005)는 창비 편집진 사이에서 상당한 호평을 받았거니와 2005년 신동엽창작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게다가 『카스테라』를 읽으면서‘한국문학의 보람’을 느꼈다는 백낙청의 발언은 문단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3 그런데 창
- 손정수 「진정 물어야 했던 것」, 『창작과비평』 2009년 봄호 328~29면. 앞으로 본문에 면수만 표시함. ↩
- 강유정 「돌아온 탕아, 수상한 귀환」, 『세계의문학』 2009년 봄호 313면. 해당 대목을 전부 인용하면 이렇다. “한기욱은 문학적 본질에 대한 질문이 사실상 2000년대에 등장한 새로운 세대가 소설의 패러다임을 교체해나가는 것에 대한 불만이며 회귀의 감옥이라는 사실을 뚜렷이 보여준다. 새롭게 등장한 낯선 문학적 시도를 호명하고자 하는 젊은 비평가들의 시도를 강박증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
- 물론 이 발언도‘한국문학의 보람’을 신예작가들을 읽는 중에도 느낄 수 있었다면서 박민규의 단편집을 그중 한 예로 든 것이지 한마디로 박민규가 한국문학의 보람이라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백낙청·황종연 대담 「무엇이 한국문학의 보람인가」, 『창작과비평』 2006년 봄호 314~17면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