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2000년대 소설과 비평의 향방

 

한기욱 韓基煜

문학평론가, 인제대 영문과 교수. 주요 평론으로 「세계문학의 쌍방향성과 미국 소수자문학의 활력」 「한국문학의 새로운 현실 읽기」 「최경계의 글쓰기-배수아 소설집 『훌』」 등이 있음. englhkwn@inje.ac.kr

 

 

1. ‘새로움’에 강박된 비평

 

거듭되는 문학위기론과 평단을 떠들썩하게 한‘문학의 종언’론에도 불구하고 한국문학은 춘추전국시대를 맞은 듯 온갖 경향의 작품과 비평을 쏟아낸다. 작금의 한국문학에는 새것과 옛것이 엇비슷한 비중으로 공존하는데, 이 가운데 새것다운 새것이 있고 겉만 새것이지 속은 낡은 것이 있다. 그런가 하면 옛것처럼 보이지만 새로운 것이 있고 겉도 속도 낡아버린 것이 있다. 천차만별인 작품과 비평의 실제를 가늠하는 데는 이 네가지 분류법도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분명한 것은 한국문학의 활력 속에 상당한 거품이 끼어 있다는 것이다. 이 거품을 제거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한국문학의 향방이 달라질 것이다. 여기서‘새로움’과‘낡음’의 기준에 대해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여러 경향의 작품들이 저마다 자신이 진정한 문학임을 자임하고 나설 때일수록 비평의 역할이 중요해진다.‘비평가’(critic)라는 영어 어원에도 담겨 있듯이 어떤 작품이 가치가 있는가, 어떤 점에서 새로운가를 가려내는 비평작업이‘결정적으로 중요한’(critical) 것이다. 그것은 이 작업에 문학다운 문학이 무엇인가라는 물음뿐 아니라 삶다운 삶이 무엇인가라는 물음도 걸려 있기 때문이다. 비평가는‘준비된 독자’로서 이런 비평작업의 포문을 여는 사람인데, 그 선도적인 역할에 힘입어 작가를 포함한 수많은 독자들 사이에 대화와 토론의 공간이 마련될 때, 문학은 소위‘문학인’들의 좁은 마당에서 벗어나 동시대 사람들의 소중한 공유자산이 된다.

그런데 우리의 상당수 비평가들은 마치‘신상’(품)을 소개하는 홈쇼핑 쇼호스트처럼 작품의 진면목이 아닌 이런저런 서사적 특색에 의거하여 2000년대의 젊은 문학에‘새롭다’는 형용사를 남발한다. 어느 시대이건 새로 등장하는 문학에 새로움을 과도하게 부여하는 경향이 있지만, 오늘날 상당수 비평가들이 최신 소설에서 발견하는‘새로움’은 강박증적이고‘코드화’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신예 평론가 강유정(姜由禎)은 이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어떤 점에서 동시대의 문학 혹은 새로운 문학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작가들은‘새로움’에 대한 예증이자 주석으로 차용되는 바가 없지 않다. 새로운 작품들이 나타났기에 의미 규정이 이루어진다기보다 새로움을 선언하기 위해 낯선 작품들이 수배되고 있는 형편이라는 뜻이다. 새로움에 강박된 최근의 독법에 각각의 구체적 실재에 대한 반성적 인식이 결여되어 있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선언의 도그마는 반성이나 회의를 허용하지 않는다.‘새로움’에 대한 담론적 조감도만 있을 뿐 작품의 실체가 주석처럼 왜소화되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1

 

2000년대 문학의 새로움을 논한 (필자를 포함한) 평자들의 행태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대목이다. 이것이 2000년대 소설에‘무중력 공간의 글쓰기’라는 이름을 붙인 이광호(李光鎬)나‘무력한 자아’를 특징으로 내세우는 김영찬(金永贊) 등‘새로움’선언을 선도한 비평가들에 대한 비판이라면 과도한 면이 있지만,2 그들 이후에 가속화된 새로움 강박증은 이런 비판을 받을 만하다. 최근 평단의 잘못된 관행을 이처럼 야무지게 비판하는 강유정은 한유주(韓裕周)와 김유진을 다루는 자신의 글이 “새로움이라는 미개척지에 대한 또다른 점유라기보다 점유된 영역의 타당성에 대한 반성적 고찰”(36면)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두 작가의 작품을 분석한 후 “그들이 시도하는 소설의 혁신이나 언어의 갱신이 불가능한 모험일 수도 있다”(51면)고 살짝 꼬집는 것만으로‘새로움에 강박된 최근의 독법’에 어떤 교정효과를 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사실 강유정은‘새로움’을 남발하면 안된다는 자각에도 불구하고 새로움을 맹렬히 찾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가령 “최근의 소설들은 마치 공모라도 한 듯이 소설의 원리에서‘근대성’을 지우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지움이 바로 소설이라는 근대적 축조물을 내파하고 있는 방식”이라고 지적하며, “최근 소설 속에 의도적인 눈감기의 행위가 자주 출몰하는 맥락”에 주목한다.(20면) 이어서 이기호, 박형서, 한유주, 편혜영을 근대소설의 원리를 내파하는 작가로 호명하며‘눈먼 오이디푸스의 새로운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김중혁과 김애란의 작품세계를 자세히 분석한다. 이로써‘근대성’을 지워버린‘새로운 소설’의 작가 명단이 제시되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쯤 되면 강유정 자신이야말로‘새로움에 강박된 최근 독법’의 모범사례를 보여주는 격이다.

그런데 낯설고 새로운 소설에 대한‘수배’경쟁에 중견 평론가 손정수(孫禎秀)까지 끼어든 것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일러준다. 손정수는 “새로움에 모든 것을 거는 비평가들의 도박에는 응당 그에 합당한 판돈이 있는 법”3이라면서 그‘도박’에 과감하게 뛰어든다. 말하자면 나름대로 최근 소설의 문법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작가(박민규, 김중혁, 한유주, 김태용, 황정은 등)의 명단을 작성한다. 그런데 작품의 가치평가와 무관한 이런 강박증적인 새로움 추구의 이면에는‘허구적’인 낡음이 도사리고 있기 마련이다. 강유정의 경우 그것은 한마디로‘시각 중심의 근대성’이다. 그렇다면 손정수에게 그 기준은 무엇일까. 손정수가 최근 소설의 동향에 대해 “어느 시점 이후 소설은 작가의 삶이나 기억, 사회적 현실 등으로부터 발원하지 않고 앞서 존재했던 텍스트들을 재전유하는 방식으로 재생산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투명한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상징적 상상이거나 혹은 상상적 상징일 것”(같은 면)이라고 말할 때 그가 내세운 기준은 드러난다. 그에게‘낡음’의 뚜렷한 징표는‘투명한 현실의 재현’인 것이다.

그런데 손정수의 이 진술은 이중으로 사태를 왜곡한다. 우선 “작가의 삶이나 기억, 사회적 현실 등으로부터 발원”하는 소설들이 다수 씌어지고 있는 엄연한 현실을 삭제한다. 그같은 소설들은 아마‘리얼리즘’소설들을 지칭하는 듯하다. 둘째 이런 (리얼리즘) 소설들의 특징이‘투명한 현실의 재현’인 것처럼 호도한다.‘투명한’현실의 재현은 가능하지도 않다는 것이 리얼리즘의 오랜 전통 속에서 단련된 작가와 비평가의 상식이거니와, 리얼리즘 작가들이‘재현주의’적 발상의 한계를 돌파하는 예술적 분투의 과정을 소설화한 사례도 여럿이다.4 이론 쪽에서도 리얼리즘의 핵심은‘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작품 전체가‘시적 경지’에 이르렀는가 여부라는 것을 강조하지 않았던가.5

 

 

2. ‘근대문학의 종언과 그 이후의 문학’이라는 프레임

 

손정수가 한국소설의‘새로움’과‘낡음’의 분기점을‘투명한 현실의 재현’에서 찾는다는 것은 우리 비평의 일부가 몽매주의 속에서 표류하고 있음을 일러준다. 그런데 그 연유를 추적하다 보면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의‘근대문학 종언’론의 수용 문제와 맥이 닿는다. 알다시피 카라따니는 한국문학의 급격한 영향력 쇠퇴에서‘근대문학의 종언’을 실감하고,‘근대문학 이후의 문학’은 오락에 불과하므로 문학과 결별한다고 선언한다.‘종언’론을 둘러싼 논쟁에서 “카라따니의 『근대문학의 종언』은 지금 이 시대, 우리에게 문학은, 비평은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되묻고 있다”6는 권성우(權晟右)의 지적은 경청할 만하다.

하지만 권성우 자신이 그 물음을‘근본적으로’되묻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카라따니의‘종언’론에 기대어 한국문단을 향해 반성과 성찰을 촉구할 뿐 그의 주장(특히‘한국문학 종언’론)의 허실을 꼼꼼히 검토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 문학과 일본문학의 차이에 대해 “김원일, 조정래, 황석영, 방현석, 김남일, 정지아, 정도상, 안재성, 공선옥, 전성태 등이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분투하고 있는 문학세계에 해당하는 이 시대 일본작가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는 점”(137면)을 일껏 거론해놓고, 한일 양국의 문화적·문학적 차이가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는 이유로 이들 작가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 황석영(黃晳暎)에서 안재성(安載成)까지 예술적 성향과 수준이 현격한 작가들을 뒤죽박죽 도열시키는 방식도 문제다. 이들이 모두 사실주의적 서사를 사용한다는 것에 주목할 뿐, 누가 그런 서사로써 우리 시대에‘결정적으로 중요한’예술을 만들어내느냐의 문제는 불문에 붙이기 때문이다. 이런 범주화 역시 일종의‘코드화’이다. 권성우가 박민규(朴玟奎) 소설의 빼어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에 대한 백낙청의 높은 평가를 무슨 다른 저의가 있는 것처럼 의심하는 것7도 이런‘코드화’된 문학관에 사로잡혀 있는 탓이 아닐까 싶다.

황종연(黃鐘淵)의 반응은 좀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논의의 편의상 카라따니의‘종언’론을 1)‘근대문학’개념 2)‘근대문학의 종언과 그 이후의 문학’이라는 구도 3)‘근대문학 이후의 문학’은 오락에 불과하다는 주장, 세 항목으로 나눠 살펴보자. 황종연의 반응이 불만족스러운 것은 카라따니에게는‘근대문학’이 문학다운 문학인데, 황종연에게는 그게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황종연은 “근대문학은 끝났다는 카라따니의 주장이 타당하고 유용한 가설”8이라고 인정하지만 카라따니와 달리‘근대문학’

  1. 강유정 「Welcome to Nowhere-land-한유주, 김유진의 새로운 소설」, 『오이디푸스의 숲』, 문학과지성사 2007, 35면.
  2. 필자는 이광호의 발상이 2000년대 작가들의 소설을 “실제 이상으로 탈현실적이고 탈역사적인 맥락에서 읽기 쉽다”고 비판하고, 김영찬의 주장에 대해서는 “부분의 성향을 전체의 성격으로 확대”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특히 그들이‘새로움’의 발상의 예로 거론한 작가들 가운데 경우에 맞지 않는 작가(김애란, 김중혁, 박민규)도 끼어 있다는 것이 불만이었다. 작품의 가치평가와 별개의 차원에서 이뤄지는 일종의‘코드화’에 대한 불만도 있었다. 졸고 「한국문학의 새로운 현실 읽기」, 『창작과비평』 2006년 여름호 214~15면 참조. 이에 대해 이광호는 “‘설정된 글쓰기 주체의 무중력’을‘비평가의 무중력’ ‘독해방식으로서의 무중력’으로 왜곡하는 논법”이라고 반박하고 있으나, 필자의 비판은‘글쓰기 주체의 무중력’을 설정하는 데 따른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광호의 반박에 대해서는, 「‘2000년대 문학 논쟁’을 넘어서」, 『문학과사회』 2007년 봄호 249면 참조.
  3. 손정수 「변형되고 생성되는 최근 한국소설의 문법들」, 『자음과모음』 2008년 가을호 226면.
  4. 가령 전성태(全成太)의 「퇴역 레슬러」(2000)와 「존재의 숲」(2003)은 재현주의와 반영론의 한계를 묘파하는 작품들이다. 이에 대해서는 졸고 「한국문학의 새로운 현실 읽기」 참조.
  5. 백낙청 「시와 리얼리즘에 관한 단상」(1991),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창비 2006, 428면 참조. 백낙청은 여러 군데서 리얼리즘 예술의 핵심은 사실주의적 재현이 아님을 분명히했는데, 자세한 논의로는, 백낙청 「로렌스와 재현 및 (가상)현실 문제」, 『안과밖』 1996년 하반기호 참조.
  6. 권성우 「추억과 집착-‘근대문학의 종언’과 그 논의에 대하여」, 『안과밖』 2007년 상반기호 146면.
  7. 권성우 「박민규, 혹은 비평의 운명·1」, 『오늘의 문예비평』 2008년 여름호 참조.
  8. 황종연 「문학의 묵시록 이후-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을 읽고」, 『현대문학』 2006년 8월호 196면.